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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10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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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양동 석불입상
역사관광경기도

아양동 석불입상

아양동 석불입상은 보살입상 옆에 위치한 미륵불로, 화강암 1석으로 조각하였으며, 수법이 고졸하고 토속화 경향을 지닌 석불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규모는 보살입상보다 작으며, 인상은 위엄이 깃들어 있다. 머리 부위에는 관모처럼 두정에 표식이 있고, 눈과 코, 입이 가지런하며, 귀는 짧고 목에는 3도의 표현이 없이 의문으로 보이는 넓은 띠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에 걸쳤는데, 좌우의 늘어진 소맷자락에는 각각 3개의 의문의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무릎 부위 하단부부터 매몰되어있다.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안성대농리석불입상
역사관광경기도

안성대농리석불입상

고려시대에 유행한 불상 양식의 석불입상이다. 대농리 석불입상은 마을 소나무 숲 옆으로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도로 한편에 조용히 서 있다. 신체에 비해 큰 머리에는 원나라 귀족들이 쓰던 모자였으나 원 간섭기 이후 고려의 관리와 승려들이 착용 원 정모 형식의 갓이 얹혀 있다. 양감이 없는 얼굴에는 가로로 긴 눈과 도톰한 코, 다물고 있는 작은 입이 표현되었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양어깨를 덮고 내려오는 법의는 양쪽 팔뚝에서 굵은 띠 모양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왼손으로 이를 받치고 있는 특이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법의 아래 드러난 왼손에는 팔찌를 하고 있어, 여래상이 아닌 보살상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정병은 여래상이 아니라 보살상의 지물이라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돌기둥 같은 신체에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 밋밋한 표현, 몸에 비해 큰 머리와 이목구비의 표현, 머리에 쓴 갓, 한 손에 들고 있는 정병의 표현 등이 용인 미평리 약사여래입상과 매우 유사한 표현 기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표현은 특히 고려 전기에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유행한 불상 양식의 계보를 보여주며 양감 없는 얼굴과 신체, 가로로 긴 눈과 두툼한 코, 일자로 다문 입, 크기에 비해 빈약하게 처리된 두 팔과 손의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 불상의 지방 양식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

양성 석조여래입상
역사관광경기도

양성 석조여래입상

이 불상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구장리 마을 입구에 있는 팽나무 옆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륵불로 신봉되고 있다. 불상은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주형광배를 갖춘 여래입상이며, 고부조로 조각되었다. 큰 눈과 납작한 코, 튀어나온 일자 입술, 짧은 턱, 늘어진 귀를 갖추고 있으며, 다소 갸름한 얼굴에 소발의 육계를 보이고 있다. 목에는 3도가 뚜렷하고, 팔과 손이 가늘고 작아 왜소한 느낌을 준다. 수인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가슴 앞에 올리고 있다. 본래 신체보다 앞으로 나와야 할 수인을 신체와 붙여서 부조로 조각하여 약간 어색해 보인다. 불신에 걸친 통견의 법의는 양팔에서 계단식 주름을 형성하고 복부에서는 U자형 의문을 형성하고 있다. 광배 상면은 약간 손상되었으며, 광배에 다른 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기와편이 산재해 있고, 불상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상면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배례석 앞면에는 3구의 안상이, 측면에는 1구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구장리

경주 동궁과 월지
역사관광경상북도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고 삼국 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린 장소로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 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운수암
역사관광경기도

운수암

운수암은 안성 고성산 무양 산성 안의 중앙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인 1750년(영조 26)에 장씨 부인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과부였던 장씨 부인이 부처를 모시려고 무양 산성 밖에 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성안에 절을 지으라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 가서 쓰러진 풀과 나무를 치우고 보니 절터로 적합하여 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되었고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1986년에는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현재 암자의 중앙 높은 터 위에 대웅전이 있고 그 옆에는 비로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요사채는 비로전의 주축과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스님이 보수하고 대웅전을 불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산리 입구에서 서북쪽을 향해가면 낙엽송과 송림 사이로 운수암의 정취가 눈에 잡히며, 청아한 목탁소리가 숲길에 먼저 배웅 나오는 운수암은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시대 조성한 비로자나 불좌상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성하길 80-63

죽산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
역사관광경기도

죽산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

두현리 석조삼존불상은 태봉산 아래 민가 옆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은 화강암 전면에 저부조(低浮彫)로 입상의 삼존(三尊)을 조각하였다. 본존불은 높은 육계(肉桂)를 지니고, 목에는 희미한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으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은 밑으로 늘어져 가슴과 허리 밑으로 U자형의 옷 주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석불의 뒷면은 아무 조식(彫飾)을 가하지 않았다. 원래는 하반신이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2005년 보호각 보수 공사 때 묻혀있던 하반신을 올리고 좌대를 설치하였다. 세밀한 형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두현리

경앙사
역사관광경기도

경앙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 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덕봉서원
역사관광경기도

덕봉서원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기사사화(己巳士禍)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세상을 떠난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21년(1695)에 건립된 서원이다.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오두인은 1648년(인조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직을 두루 맡았다.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 폐위 후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 가는 도중 파주에서 사망하였다. 1694년(숙종20)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덕봉서원은 마을입구 언덕 남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 턱에는 강당인 정의당과 동재, 서재가 있으며 위쪽 터에는 사당인 덕봉사우가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강당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쪽에 있는 배치 형식)를 갖추었다. 사당과 강당은 부재의 사용으로 미루어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동재, 서재는 1940년대에 훼손 되었다가 새로 복원된 것이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서원로 529-8

안성도기동삼층석탑
문화관광경기도

안성도기동삼층석탑

옛 안성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도기동 입구 언덕 위에 세워진 화강암제 삼층석탑이다. 단층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기동삼층석탑은 단층 기단과 기단 중석이 있고 그 위에 평면 방형의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5.4m의 일반형 석탑이다.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조립된 지대석 위에 양 우주(隅柱)만이 모각된 기단을 놓았다. 갑석(甲石)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 중 1층 탑신석만 여러 장의 석재를 사용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도기동 삼층석탑 기단은 지대석 위에 결구된 기단 위로 올려진 탑신을 고려했을 때, 이중 기단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으로 보고 있는 석재는 2층 이상 옥개석과 달리 평박하고, 전각부 반전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옥개석은 편평한 석재를 놓아 다른 석탑에서와 같은 조형미를 찾을 수 없는데, 2층 옥개석에는 1단의 옥개층급과 물 끊기 홈이 표현되어 있다. 3층 탑신도 다른 층의 석재와 달리 2매 석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석탑 부재를 섞어 건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도기동

매산리석불입상
역사관광경기도

매산리석불입상

안성 봉업사지 인근에 있는 높이 3.9m의 보살상이다. 볼륨감 없이 평평한 돌기둥 같은 신체에 전체적으로 세부를 정교하게 조각하지 않고 높은 원통형의 보관에 사각의 보개(寶蓋 ; 인도에서 귀인의 외출 시에 사용하던 양산을 불상의 머리 위에 갓처럼 씌운 것)까지 얹은 표현은 고려 전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다. 보개는 이후 변형을 이루면서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한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이다. 방형의 넓적한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이 수평으로 표현되고 짧은 코에 작은 입을 표현하였다. 얼굴의 세부 표현은 높은 관과 더불어 이 작품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둥근 어깨에는 왼쪽 어깨에만 다소 두꺼운 법의를 걸쳤는데, 왼쪽 어깨로부터 신체 전면을 덮으며 내려오는 법의는 가슴에서부터 U자형 주름이 계단식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다시 양쪽 다리에서 각각의 U자 모양을 이루며 발끝까지 이어진다. 보살상답게 양 손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내보인 상태로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고, 손등을 밖으로 한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원형 보관과 보개로 이루어진 머리장식과 돌기둥 같은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 전기에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유행한 대형 석불의 계통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미륵당길 32-2

서흥김씨삼강정문
역사관광경기도

서흥김씨삼강정문

서흥김씨삼강정문은 조선시대 충신 김충수와 그의 아들 김함의 효행, 그리고 후손의 열 부인 온양 정 씨, 청주 한 씨의 행적을 기록한 정문(旌門)이다. 한 가문에서 충신과 효자 각 1명, 정절 2명이 나왔고, 『삼강행실속록』에 기록됐다.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왜군과 접전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같이 싸우던 아들 김함이 부친을 구하고자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부자가 동시에 순절했다. 선조 39년(1606) 년 김함의 효를 기려 효자 정문을 내렸고, 숙종 26년(1700)에는 김충수의 충정을 기려 충신 정문을 내렸다. 또, 병자호란에 적을 피해 투신하여 정절을 지킨 김함의 손녀며느리 온양 정 씨와 부군이 중병을 앓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부군을 따라 순절한 6대손며느리 청주 한 씨를 영조 16년(1740)과 영조 13년(1737)에 열부로 명정하고 정렬 정문을 내렸다. 이 정문들은 원래 각각 다른 곳에 세워졌으나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됐으며, 정문과 현판들을 한 군데 모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채 주변에는 담장을 두르고 앞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본채는 앞면 4칸·옆면 1칸으로 지붕 선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집인데 앞면에만 홍살이 있다. 잘 정돈된 잔디와 나무들 가운데 담장으로 둘러쳐져 아담하게 놓인 모습이 충절과 효심을 느끼게 한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고삼호수로 141-30

신창리삼층석탑
문화관광경기도

신창리삼층석탑

신창리삼층석탑은 봉국사[奉國寺]로 추정되는 절터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1991년에 복원한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약 2.18m 높이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형식으로, 하층기단은 일부 부재만 남아 있는데, 면석 모서리와 중앙부에 측면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모각했다. 상층기단은 넓은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고 탱주 없이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했다. 탑신에는 우주를 조각했는데, 석탑 복원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의 윗면에서 사리를 봉안했던 원형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옥개석은 밑면에 통일 신라 석탑과 달리 층급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어 옥개석 두께가 얇아지고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다. 처마선을 따라 전각 부에는 매우 낮게 반전을 표현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는 석탑 건립이 증가하면서 단층 기단이 유행했는데, 신창리삼층석탑이 이중 기단으로 건립된 점은 경기도 지역 고려 석탑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기단부 석재의 치석 기법과 옥개석 표현의 위축 등을 통해 고려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신창리

안성 객사 정청
역사관광경기도

안성 객사 정청

객사는 가운데에 지붕을 높인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과 서헌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청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공간이며, 동서헌은 지방에 파견 중인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설날, 임금 탄신일, 매달 보름과 그믐에 임금에게 인사드리는 의식을 치렀다. 궁궐에서 의식을 치르는 같은 시간에 각 고을에서는 수령과 아전을 포함한 모든 관리들이 객사 정청 마당에 모여 전패를 향해 인사를 드렸다.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서도 객사 정청에서 선포되었다. 따라서 객사는 각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고을의 중심에 있었다. 안성객사는 1363년(고려 공민왕 12) 이전에 건립되었으며, 현존하는 객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국력이 약해진 1906년부터 전국의 객사는 서서히 폐지되었고, 건물은 학교로 사용되었다. 안성객사도 1908년부터 안성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 교사로 사용했다. 1931년에는 현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겨졌고, 199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1842년 경 편찬된 경기도 군현의 읍지인 『경기지』에는 안성객사가 정청이 6칸, 동헌 12칸, 서헌 8칸, 중문 3칸, 외문 3칸, 행랑 4칸, 경운정 6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청과 동·서익헌만 남아있다. 안성 객사 정청은 사례가 드문 고려 말 조선 초 주심포 건축으로 건축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포의 구성은 1308년에 건립된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비슷하다. 주두는 굽 아래에 받침을 두었고, 살미(기둥 머리 위에서 정면으로 튀어나와 공포를 구성하는 개별 부재)와 첨차(기둥 머리 위애서 벽체 방향으로 공포를 구성하는 개별 부재)는 화려하게 조각했으며,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보를 사용했다. 살미와 살미 사이 중앙에 둥근 모양의 조각을 깎아 놓았는데, 이는 안성 객사 정청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종합운동장로 203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역사관광경기도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이 한옥 민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서 한 채로 건립한 것으로 형태는 곱은 자형에 1 고주 5량 집이다. 정무공 오정방(1522∼1625), 천파공 오상(1614~1672), 충정공 오두인(1624∼1689)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위치하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정방의 손자인 오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택은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퇴전당[退全堂]’이라는 현판은 오정방의 호를 1662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문간채가 전면에, 그 안쪽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별도의 담장을 두고 자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가옥은 건립된 시기와 경위가 잘 기록되어 있으며, 16세기에 건립된 원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더라도, 건물의 목재를 다듬은 상태가 좋으며, 안채의 툇마루와 부엌의 다락에 달아둔 창호에서 높은 수준의 목조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기둥의 모를 깎아 팔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의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으로 유사한 시대에 인근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

안성죽산리당간지주
역사관광경기도

안성죽산리당간지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가 서 있는 봉업사지(奉業寺址)는 여러 번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신라 말기에 화차사(華次寺)로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들어와 크게 중창되면서 봉업사로 절 이름을 바꾸어 번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당간지주는 5층 석탑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원위치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두 지주를 사각형 기둥처럼 동일하게 다듬어 세웠다. 각 면에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거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의 모서리는 경사지게 깎아 부드럽게 하였으며, 정상부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곡선을 그리도록 다듬어 다소나마 장식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다. 당간지주 안쪽 면에 별다른 흔적은 없으며, 꼭대기에 사각형으로 판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할 때 연결하는 간을 끼우도록 했다. 이처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거칠게 다듬어 정연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고, 봉업사를 크게 중창할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보여,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기단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 시대 들어와 세련되고 장식적인 외관보다는 안정적이고 기능에 충실한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안성죽산리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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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죽산리석불입상

봉업사지 북쪽 죽주산성 아래에 위치한 석불입상이다. 통일 신라 여래상의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여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이는 고려 전기 불상의 우수한 사례로 여겨진다. 절단되었던 머리와 신체를 접합하였으며 발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둥근 대좌 위에 서 있으며, 광배는 남아 있지 않다. 민머리 위에는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묶음)가 큼직하다. 신체에 비해 약간 큰 얼굴은 둥글고 귀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 이목구비가 비교적 작은 편이나 눈은 거의 감은 상태로 가로로 길다. 양팔을 신체에 붙인 채 오른손은 허리 부근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손끝을 아래로 하여 펼쳐 보이고 있다. 왼팔 역시 신체에 밀착한 채 가지런히 내리고 있으며, 왼손도 밑으로 내리고 있다. 양쪽 어깨에 걸쳐져 내려오는 대의는 신체 전면을 감싸고 있는데 가슴에서 촘촘한 U자형 주름을 형성하다 대퇴부에서 Y자를 형성하며 양쪽 다리로 갈라져 각기 기다란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며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는 통일 신라 시대 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유행했던 형식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영창대군묘
역사관광경기도

영창대군묘

조선 선조의 14명 아들 중 유일하게 정비인 인목왕후가 낳은 아들로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창대군의 묘이다. 유영경 등 소북파의 지지로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에 세자에 책봉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 등 대북파에 의해 왕위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미움을 받았다.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 진술케 하였다. 이 결과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화부사가 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였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 왕실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별되는데 묘란 일반적인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왕의 자손이나 후궁,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 등의 무덤을 뜻한다. 영창대군 묘소는 원래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는데 성남시 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8월에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이해룡고가
역사관광경기도

이해룡고가

이해룡 고가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산 남쪽 계곡 근처 마을에 조선 후기 건축물로서 안채에 기록된 상량문을 통해 1797년(정조21)에 안채와 사랑채가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룡 고가는 남서향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에 면하여 있으며, 8칸 규모의 행랑채에 마련된 문간을 통하여 가옥의 출입이 이루어진다. 이해룡 고가는안채와 사랑채를 하나의 건물로 연결하여 지어 구조적인 이점을 활용하고, 좌향을 달리하여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확보하여 살림집 안에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는 공간구성 방법이 돋보인다. 또 대들보나 기둥 등 목재를 다듬는 방식은 1700년대 후반의 전통가옥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09-11

최규서어서각
역사관광경기도

최규서어서각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를 하사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리길 35

죽산향교
역사관광경기도

죽산향교

죽산향교는 153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오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사지 대지에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동·서재가 생략된 명륜당과 내삼문이 구성되어 있고,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어 앞에는 학문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중심축에서 왼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외삼문 또한 명륜당의 중심축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으며, 솟을삼문(문이 세 칸인 대문에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한 단 높게 세운 대문)으로 되어있다. 외삼문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향교길 54-45

양성향교
역사관광경기도

양성향교

양성향교는 153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74년에 다시 지어졌지만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두고 있다. 그 외에도 출입구 역할을 하는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중앙 3칸은 마루로, 좌우 2칸은 온돌로 되어있다. 대성전과 달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양성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의 규모가 작은 향교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교동길 33-4

김시민장군 충민사
역사관광충청북도

김시민장군 충민사

김시민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과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2만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전투 후 숨어 있던 적군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김시민은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갑은 자는 순초, 호는 의재, 본관은 안동으로 명종 8년(155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14년(1581)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됐고 그의 부인 이 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 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충민사길 46

쌈지길
문화관광서울특별시

쌈지길

인사동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 쌈지길은 쌈지길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과 문화를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공예품 전문 쇼핑몰이다.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만든 최고급의 전통공예품과 현대공예작품, 그리고 한국의 멋이 풍기는 디자인 제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도자, 섬유, 금속, 목공예등의 공예샵과 젊은 디자이너들의 신선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샵을 만날 수 있다. 쌈지길 곳곳에서 전시와 공연 등의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도 열리고 있다. 쌈지길에서는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도자기공예, 자개공예, 가죽, 유리, 비누 공예 등의 다양한 원데이 클래스가 준비되어 있다. 어른과 아이, 친구와 연인 누구나 함께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4 (관훈동)

제주 산방산탄산온천
문화관광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산방산탄산온천

산방산탄산온천은 서귀포의 대중 온천이자 국내에서 보기 힘든 탄산온천이다. 이곳의 온천은 예로부터 ‘구명수’라 부르기도 했는데, 구명수는 비둘기 울음소리가 난다는 뜻과 사람을 구한 물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 병을 고쳤다거나 고혈압과 심장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피부로 흡수된 탄산가스가 모세혈관을 자극해 확장시키고, 결과적으로 혈압을 낮춰 심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탄산온천은 피부 미용과 피로 해소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천장과 벽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자연 속에서 온천을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시원하게 펼쳐진 제주의 모습을 보며 입욕을 즐기기 좋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북로41번길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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