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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49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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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포교당·통도사
역사관광경상남도

창녕 포교당·통도사

화왕산의 억새와 관룡사로 유명한 경남 창녕은 예부터 비화가야(非火伽倻), 즉 비사벌이라 불려지던 문화의 고장으로 각종 문화재가 많아 제2의 경주라 불린다.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낙동강 이동(以東)에 아름다운 가야문화를 창조해 온 창녕은 부처님의 법화도 함께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전통사찰인 통도사 창녕포교당은 불법을 수호하고 포교의 일선에서 매진하고 있는 창녕의 명찰 중 하나이다. 비록 포교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절집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창녕포교당은 적멸보궁을 조성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시대 목조석가여래가 안치되어 있는 사찰이다. 또한 창녕포교당이 자리한 곳은 신라시대 거찰로 알려졌던 인왕사(仁旺寺)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니 창녕포교당은 포교당 이상의 조건과 역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창녕포교당은 기도처와 포교의 방편 외에도 관내 독거노인 돕기 활동을 매일 펼쳐나가는 등 지역사회 내에서도 기여하는 사찰로 정평이 나있다. 비화가야의 넓은 들판 속 인왕사터에 자리한 창녕포교당은 불국정토를 만들기 위한 염원이 불보살의 뜻과 닿아있으리라 믿어본다. 또 ‘창녕지명사’에 전하는 창녕읍 신당마을 유래에 대해 ‘창녕여고와 포교당(仁旺寺)이 있는 일대로 말흘리의 동북부에 위치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창녕군의 전통사찰현황에 창녕포교당은 1920년도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 창녕읍 술정리에 ‘인왕사’라는 포교당 전신인 대사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자 동산선사가 옛 인왕산사를 재현한 포교당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에 초창시부터 지극정성으로 다니고 있는 법왕자(法王子, 85세, 신당리 거주) 보살의 증언에 의하면 곤양군수를 지낸 만석군의 모친인 김선명화(金善明華) 보살과 아들 내외인 하준석(河駿錫), 서공덕화(徐功德華) 보살이 이 아들을 낳기 위해 원불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영달(永達)이 범종을 시주하였다는데 지금도 적멸보궁에 ‘하영달’이라는 명문이 있는 당시의 범종이 남아 있다. 따라서 창녕포교당은 1939년 창건이 확실해 보인다. 이후 1978년 청운스님(현 밀양 표충사 주지)이 주석할 당시 6·25 때 화마를 입은 관룡사 팔상전에 모셨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이운해 왔는데 현재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이후 적멸보궁에 봉안해 놓았다. 이후 설법전 등의 요사채와 석가모니입상 등을 조성해 놓았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창덕암(남원)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창덕암(남원)

창덕암의 창건은 1933년에 김보덕화 여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당시부터 부녀자들 사이에 영험 있는 기도처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절에서 전하기로는 창건 이전에도 움막 형태로나마 절이 있었다고 하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1933년의 불사를 중창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것은 지금 절에 전하는 삼층석탑이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므로 절의 역사를 적어도 석탑이 세워진 조선시대까지 올려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절은 조선시대 이래 나름대로 면면이 법등을 이어왔던 것이다. 1997년에는 대웅전을 헐었는데 예전 삼성각 자리에다 새로 지을 계획이며, 그전까지 있었던 삼성각을 헐어버리고 대웅전 자리에 새로 지었다. 대웅전과 삼성각을 서로 자리를 바꾸어 새로 짓는 셈이다. 최근에는 요사도 새로 지었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동면 중절길

창룡사(충주)
역사관광충청북도

창룡사(충주)

창룡사는 충주의 금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조선시대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1988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창룡사는 절의 창건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시대 대중 불교의 전파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던 원효대사의 꿈에 푸른 용이 나타나 여의주를 물고 간 명당에 창건한 것이 창룡사이다. 창룡사의 시설은 극락보전, 산신각, 요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2006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창룡사 다층청석탑이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고든골길 63-89

척판암(부산)
사찰부산광역시

척판암(부산)

척판암은 원효대사가 장안사와 함께 창건한 토굴로 원효대사의 신통력으로 중국 당나라 운제산 태화사의 붕괴를 예측하고 원효대사께서 소반을 던져 천명의 대중을 구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이 남아있는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담운사'라고 불렸으나 1938년 경허스님에 의해 중수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유지되다 최근 독립된 사찰로 자리하고 있다. 사찰 곳곳에 남아 있는 전통 건축과 불교 문화유산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아름다운 자연과 고요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명소로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공간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쉼터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사찰경상북도

천룡사(경주)

서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高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천룡사는 지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 절이 계림(鷄林) 땅을 흐르는 한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의 근원지에 있으면서 객수와 역수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위치에 있고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를 아는 당(唐)의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는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했다. 신라 말기에 와서 어느 사이엔가 절이 폐사가가 되고 과연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라시대에 천룡사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존숭되고 석가 만일도량(萬日道場)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천룡사에서 열렸던 석가 만일도량에 관해서는 고려 때 최승로가 지은 글이 남아 있는데, 10,000일이면 거의 30년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라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천룡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의 아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뒤의 역사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쉬움을 준다. 현재 유일하게 옛 터에 남아있는 천룡사 삼층석탑은 본래 무너져 있던 것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발굴 조사하여 1991년 9월 25일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폐석탑이었던 이 탑이 복원되는 데는 용성(龍城) 스님의 유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용성 스님은 호국호법도량 천룡사가 흥할 때 국가도 흥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나라 8백 년 국운과 불법 중훙을 위해 천룡사 복원을 제자 동헌 스님에게 부촉했다. 그리고 동헌 스님으로부터 이 부촉을 이어받은 도문 스님은 20여 년에 걸쳐 농가로 변한 천룡사지 6만여 평을 구입하였다. 축대석, 초석, 석당(石幢)의 귀부, 맷돌 등과 함께 폐탑의 부재들이 산재해 대가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빈터에서 석탑만이라도 먼저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기로 하고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이 주관하여 90년 11월 탑지 주변을 발론하고 91년 8월~9월에 복원 완공했다. 이 탑에는 정영호 박사가 기증한 4과의 세존 진신사리를 순은으로 된 2중 원통형 사리 병과 백자로 된 사리함에 모셔 봉안했고, 호국호법 삼부경과 그 외 경전과 소탑 및 순은 판에 쓴 석탑 복원 연기문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백운대길 101-388

천보사(경기)
역사관광경기도

천보사(경기)

천보사는 남양주 불암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에 관한 기록은 ‘문종실록’에 ‘문종 1년 3월 병진일에 의정부가 원유의 혁파를 건의’하는 내용의 상소문에서 불암산을 ‘천보사 인근의 산’이라 칭하고 있다. 그 후 일제의 침탈로 황폐해졌으나 1955년 이후 동훈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처바위라는 뜻의 불암산은 주봉이 마치 송낙(여승이 쓰는 모자)을 쓴 부처의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불암산의 다른 이름이 천보산이다. 천보산이자 불암산이기도 한 산에 불암사와 천보사가 모두 있는데, 천보사는 불암사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비탈진 등산로라서 오르기에 쉽지는 않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천보사 도량에 닿으면 남양주 별내 신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범종루 앞에서 가파른 시멘트 길을 오르면 눈앞에 거대한 자연 암벽이 나타나고 암벽 앞에 천보사 대웅전이 오롯하게 자리하는데 이 모습은 방문객의 감탄을 자아낸다. 천보사는 예로부터 천연보궁으로 불리며 기도 영험이 있는 사찰로 유명했다. 암벽 아래 쌓은 석축에는 미륵불좌상과 오층석탑이 올라가 있다. 오층석탑은 천보사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후기 양식을 띄고 있다. 천보사가 있는 불암산은 해발 508m로 주요 등산로만 10개에 달하고 등산로도 평탄한 편이라 초보 등산가들도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경치가 수려하여 절에 가는 길이라면 산행도 함께 추천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로 145 (별내동)

천성사
역사관광경상북도

천성사

천성사는 문수산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근세에 창건된 사찰이어서 봉화지역의 축서사나 각화사에 비하여 규모가 작다. 하지만 경내의 무량수전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경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또한 삼층석탑이 있다. 특히 이곳을 찾는 불자들의 다양한 기도 영험이 알려지면서 먼 곳에서부터 병을 치유하기 위한 기도나 학업성취를 위해 공부를 하러 절을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이다. 주지 경운스님에 따르면 은사인 완휴당스님의 스승이셨던 박대은스님의 은사가 환암스님이었다고 하며 그 계보를 잇고 있는 사찰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 창건배경 및 역사 천성사는 근대에 창건된 사찰로 1952년 이화성스님이 세운 절이다. 2001년 석조여래입상을 모신 산신각 앞의 당우인 무량수전의 지붕이 풍우로 훼손되자 이에 주지인 경운스님이 불사를 시작 하여 현재의 무량수전을 신축하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무량수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입상과 경내의 삼층석탑도 이화성 스님이 주지로 주석할 당시 봉화군내의 절터에서 이건 해 온 것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꿀덩이길 93

천성암(경산)
사찰경상북도

천성암(경산)

예부터 영남 지방의 명산이라 불리는 팔공산에 위치한 천성암은 통일 신라 시대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창건 시기에 대한 문헌이나 유물은 유존하지 않는다. 천성암에는 사리굴 전설이 전해지는데 창건 당시 천성암에는 하루에 한 사람만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이 나오는 바위 굴이 있었다고 한다. 주지는 매일 같이 나오는 쌀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이로써 큰 불편함 없이 지냈다고 한다. 이후 주지가 바뀌었는데 새로 온 주지는 매일 한 끼 정도의 쌀만 나오는 데 대하여 욕심을 품고 하루는 큰 막대기로 바위 구멍을 팠다. 그러자 구멍 속에서 쌀 대신 구정물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용왕당이 있다. 천성암에 대한 기록은 6·25전쟁 직후 처음 확인되었으며 주불전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자광전, 요사 등의 전각과 선묘정이라고 칭해지는 우물, 의상대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천도복숭아나무, 참선바위에 있는 작은 규모의 칠층탑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지붕 구조로 아미타불상을 주존불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을 협시로 봉안하고 있다. 극락전에는 닫집이 따로 없고 후불탱화 3점이 봉안되어 있다. 산령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맞배 기와지붕 구조로,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신중탱화 등 2점의 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이 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요사와 패널로 건축한 요사 2동이 있다. 의상대사가 식수로 쓰던 선묘정은 겨울에도 도롱뇽이 서식한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로 216-111

천왕사(제주)
역사관광제주특별자치도

천왕사(제주)

아흔아홉 골의 수려한 풍광 속에 들어앉은 천왕사는 한라산 어승생 동쪽에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 골 중 하나인 금봉곡 아래 위치한 사찰이다. 1955년 천왕사 근처 토굴에서 참선수행하던 비룡스님에 의해 수영산 선원이란 명칭으로 처음 창건되었다. 비록 건립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1994년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바로 뒤로는 용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마당 왼쪽 자락에 기세 좋게 곧게 뻗은 바위가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사찰 옆의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한라산의 유일한 폭포라는 선녀 폭포가 나오고, 사찰 입구에는 약수터가 있다. 특히 가을에 기암절벽 아래 물드는 단풍이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1100로 2528-111 (노형동)

천장사(서산)
역사관광충청남도

천장사(서산)

천장사는 연암산(燕岩山)에 숨어있는 작은 절집이다. ‘천장(天藏)’이란 ‘하늘 속에 감춘다’는 뜻으로서 장자가 물가에 매어둔 배를 온전히 숨기려면 산이나 들이 아닌 배 그곳에 숨겨야 했던 말과 통하고 있다. 이처럼 천장사는 제비바위가 있는 산 중턱에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 하늘도 땅도 감추어진 곳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제비바위의 가파른 봉오리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에 조성된 천장사는 이러한 산 계곡 간에 세워진 너무도 작은 절집이지만 이 집을 거쳐 간 큰 스님들로 인하여 그 어느 곳보다 큰 사찰이다. 이 천장사에는 근세에 이 땅에 선풍(禪風)을 새롭게 불러일으킨 경허스님이 일 년 석 달 동안 보림수행을 한 곳이다. 이후 송만공 대사가 이곳에서 불법을 계승한 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몇 해전 큰 산불로 인해 주위에 울창한 송림이 다 불타버려 제비바위에서 사찰 쪽을 바라보면 죽은 나무들이 둘러싼 가운데 오로지 천장사만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어 불법의 오묘함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다시 제비바위에서 눈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고북저수지가 눈에 들어오고 날씨 맑은 날에는 서해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천장사는 이처럼 그 규모는 매우 작지만 선사들의 높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참선도량으로서, 오늘도 햇빛 잘 드는 사찰 앞마당에 서면 큰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바람 소리를 헤치고 들리는 듯하다. * 연혁 * 천장사의 연혁을 알려 줄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형편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견 없이 정확한 연혁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산시청 자료인 사찰 현황을 토대로 그 역사를 재음미해 볼 필요는 있다. 즉 위 자료에서 천장사는 “서기 633년에 백제의 담화(曇和) 선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말에는 경허선사가 수도하고 송만공대사가 이곳에서 득도한 고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먼저 창건주인 담화선사가 누구인지 밝히기가 어렵다. 참고로 삼국사기에서 거의 같은 시대의 신라에 담화라는 스님이 있었으며, 그는 620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안흥법사가 황룡사에서 머물면서 번역한 경전인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받아 썼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천장사가 창건되었다고 한 633년의 다음 해인 634년(백제 무왕 35년) 2월에는 백제 흥왕사가 낙성되었고, 신라에서는 분황사가 낙성되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현재의 법당 앞에 있는 7층석탑(문화재자료)이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있어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천장사가 조그만 암자로서 석탑을 갖춘 채 고려시대 언제인가부터는 현재의 자리에 창건되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오랜 세월 동안의 연혁에 대해서는 유물이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밝히기 어렵다. 다만 조선말기 이래로 선풍을 널리 떨친 고승인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 스님이 천장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한편 후학을 지도했다. 또 이곳에서는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이 경허 스님의 제자로 이 절에서 출가하여 불법을 계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1896년(건양원년) 5월에 조성된 신중탱이 남아 있다. 한편 이 절의 연혁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관음사후불탱으로 조성된 1788년(정조 12년) 작 불화가 법당 불단 뒤 후불탱으로 걸려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천장사길 100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천축사(서울)

천축사는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전통사찰(노원 제9-1호)이다. 통일신라시대 673년(문무왕 13)에 의상대사가 절을 창건하고 물이 너무 깨끗하여 옥천암이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인도 승려 지공이 나옹화상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지금의 인도)의 영축산과 비슷하다.”하였다고 한다. 그 후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이곳 옥천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태조 7년에 절을 중창하고 하늘 천(天) 나라이름 축(竺)을 써서 천축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항상 부처님이 상주해 계시는 평안한 곳’을 뜻한다. 천축사는 왕실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1474년 성종 5년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명종 때 문정왕후가 화류용상(제366호, 불교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을 하사하여 불단으로 사용하였다. 1812년 순조 12년에 경학이 중창한 왕실 기도도량으로 1959년에 중수하여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중창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천축사는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문관을 중수하여 청정수행 가풍을 이어온 근본 도량이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길 92-2 (도봉동)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천황사(영암)

천황사는 월출산(809m) 사자봉 아래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법화종 사찰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에 관련된 기록은 없지만, 절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추정하는 것이다. 1995년 12월에서 1996년 1월에 걸친 목탑지 발굴 때 ‘사자사(獅子寺)’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천황사의 전신인 사자사가 이곳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의 연혁은 알 수 없지만 목탑지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법통을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절에서 ‘순치병술년(順治丙戌年)’명문기와, 곧 1646년(인조 24)에 해당되는 연도가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발견되어 그 해에 중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영조 재위(1725~1776) 시절에 다시 중창되었는데 이 무렵 한 때 ‘칠산사’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그 뒤 1906년에 중창되면서 다시 현재의 절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47년에는 영암군 무궁청년단에서 지어 수련장으로 쓰던 건물을 절에 기증하여 법당으로 만들었으며, 1953년에 법당 기와 불사가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월출산에는 50여 개 이상의 사암(寺庵)의 이름이 전하며, 속전으로는 99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월출산의 사자봉(해발 700m)과 장군봉이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한 천황사는 사자봉의 웅대한 흐름을 견제하는 자리에 서있는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자봉 정상에서 내려온 협곡을 따라 옆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면적이 좁아 자연환경과 지형에 순응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소규모 산지사찰이 설립되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약간 오르면 다소 급한 경사지에 3단의 대지가 있는데 그 맨 앞의 대지에 천황사가 있고 다른 단 위에는 건물지와 탑지가 좌, 우에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군 영암읍 천황사로 280-82

청계사(상주)
역사관광경상북도

청계사(상주)

청계사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절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절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중기나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95년(고종 32) 화재로 소실된 것을 바로 복원하였다. 1907년 고종의 비밀조서를 받고 독립운동가 노병대가 이 절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단식으로 옥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924년 한 비구니가 중창하면서 인근 남장사에서 불상을 모셔왔으며 청계사의 건물로는 법당과 요사가 있다. 특별한 유물은 전해지지 않으나 청계사의 진정한 가치는 산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처라는 것이다. 맑은 계곡을 끼고 터를 잡은 청계사의 수려한 산세와 풍광으로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뒤로는 상주 사벌 출신인 견훤이 대궐터로 보았다는 대궐터 산과 옛 산성 축대 흔적이 남아 있어 이를 견훤산성이라 부른다.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하송3길 213

청량사(부산)
역사관광부산광역시

청량사(부산)

부산 명지동에 황금 닭이 알을 품는 듯 평안히 둥지를 이루는 금계포란형의 형상을 하는 곳에 청량사가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청량사는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할머니를 모신 사당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청량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석가모니 후불탱화 뒷면에 상세히 기록된 내용을 미루어 1917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산각이 있던 자리에 인근 김해의 불모산 장유암 주지 금도스님이 교당을 세우고 3년 후인 1920년 석가모니 후불탱을 모셨다고 한다. 청량사는 초창기 장유암 교당으로 불리다가 이후 연호사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홍수 때마다 일대가 물에 잠기어도 유독 사찰만은 홀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연꽃이 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한국불교의 한 기둥이었던 홍경선사가 주석하면서 홍수 피해가 많은 장마철에 맑은 날씨를 염원하는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담아 1961년 범어사 말사로 등록하면서 청량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제도로 29

청량사(서울)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청량사(서울)

청량사는 천장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도량이다. 예로부터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의 조선 강점 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되자 홍릉 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때마침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도성 사람들이 자주 몰려와 쉬던 휴양지였고 일제강점기에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많은 애국지사, 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불교 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사찰 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관음전 뒤로는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청량사에서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있다. 청량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보전은 지붕 위 중앙에 소탑 같은 보주가 박혀있다. 비탈에 세워진 사찰의 지세 때문인지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복층구조처럼 지어져 있다. 작지만 관음전, 무량수전, 대웅전, 대방채, 설선당, 적묵당 등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로31길 10-3 청량사

청련암(수원)
역사관광경기도

청련암(수원)

먼 옛날 고려의 창건주 태조가 후백제를 정복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사찰을 세웠다. 산에서 뿜어져 나온 광채를 보고는 필히 부처가 가르침을 주는 교시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 산을 광교산이라 하였는데, 이후 산 이름이 각지에 알려지면서 영험이 생겨났고, 이에 많은 스님들과 선남선녀들이 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산골짜기마다 암자가 들어섰고, 모두 89개소에 이르는 도량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낱 전설로 전해 내려 와 현재 그 자취를 찾을 순 없지만, 현재 광교산에는 그 뜻을 이은 부처님의 진실 도량 청련암이 조선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수원의 중심지로서 시가지가 형성되었지만, 그 길의 끝 광교산 아래에는 여전히 여법한 도량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아담한 비구니 사찰 청련암이 있다. 한때 퇴락하여 빈터만이 있던 것을 창건주 청련 스님이 지었다고 하여 청련암이라고 칭해졌으며, 이후 조선 후기 세도가인 흥선대원군의 지원과 영친왕 이은의 어머니 귀빈 엄 씨의 기도처로서 현재 가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귀빈의 화주와 보살임 씨의 도움으로 수월 도량으로서 그 맥을 이어갔으며, 나한 도량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손수 실천하는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수일로 335 청련암

청련사(창녕)
사찰경상남도

청련사(창녕)

영취산의 북녘 기슭에 자리한 청련사는 영취산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작은 암자로 세워졌으며,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東庵)이라 불려 왔다. 대흥사는 청련사뿐만 아니라 인근의 극락암(極樂庵), 삼성암(三聖庵)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일대의 많은 암자들을 거느릴 만큼 사격이 높았던 듯하다. 따라서 청련사의 중창주 덕암(德庵) 스님 또한 사라져 버린 대흥사를 아쉬워하며 퇴락한 암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목적으로 법당을 창건했을 것이다. 현재 청련사에 남아 있는 현판 자료에는 하나같이 청련암 앞에 ‘영산 대흥사’를 붙이고 있어, 대흥사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청련암이 그 법등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중에 전하는 1842년(헌종 8)의 중창([重創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 청련사가 자리한 자연적 입지를 짐작게 한다. 좌우에 둘러 있는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있어 마치 많은 별들이 북두성을 향하는 것과 같고, 앞뒤로 흐르는 골짜기 시내가 잔잔하여 수많은 옥가루가 허공에서 부서져 내린 듯하다. 이는 반드시 하늘이 아까워 숨겨놓은 곳이며 땅이 내보이기 인색하게 숨겨놓은 명승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람을 세워 법당을 창건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청련사길 99

청룡사(김제)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청룡사(김제)

청룡사는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도중 자리한 절로서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며, 금산사의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079년에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모악산 내에 40여 암자를 세웠는데, 이때 청룡사의 전신인 용장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1954년에 승려 용봉이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후 용장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청룡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건물은 1974년에 세운 것이다. 관음전에 모셔진 김제 청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55년에 왕과 왕비,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승려 천승이 나무로 만든 것이다. 원래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사에 있었으나 1950년대에 화재를 피해 이곳 청룡사로 옮겼다고 한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의 조각 기법은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양상이 돋보이며 작은 불상이지만, 상호 및 손가락의 표현 기법이 매우 섬세하여 보존의 가치가 뛰어나며, 인자하고 원만한 얼굴이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80-122

청룡사(서울)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청룡사(서울)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922년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 1036년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하여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1973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 65 (숭인동)

청룡사(충주)
역사관광충청북도

청룡사(충주)

충주시 소태면의 청계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 시대의 창건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한 도승이 이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하는데, 공중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땅에 떨어뜨렸다.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 청계산 위로 올라갔으며 여의주는 큰 빛을 내다가 사라지고 용도 함께 사라졌으며 비도 멈추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승이 산세를 살펴보았고 그곳이 비룡상천형(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의 길지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는 것을 상기한 그 도승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청룡사는 옛 터의 북쪽에 있고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가 있다. 옛 절터에는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등과 같은 역사 문화재가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

청룡사(상주)
사찰경상북도

청룡사(상주)

청룡사는 경상북도 비봉산 중턱에 있는 작은 사찰로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되어 있다. 1674년(현종 1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중창과 관련된 기록은 인근 도남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사찰은 주 전각인 극락전과 산신각·요사·종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내부에는 목조보살상이 2층 누각의 화려한 보궁 안에 모셔져 있는데 높은 보관을 쓰고 한 손에 보주를 든 채 금칠한 사자상 위의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형태로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조보살상 왼쪽 불단에는 경주 옥석으로 제작했다는 높이 40㎝의 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머리에 모자를 쓴 이른바 피모지장에 천의를 걸친 양식으로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다른 손에 보주를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극락전 앞으로는 지름 130㎝가 넘는 석조 좌대 1점과 이와 비슷한 크기의 맷돌 1점이 있는데 이 유물들은 오래전에 청룡사가 많은 대중들의 수행처였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200m 거리에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청룡사전망대가 있으며 낙동강 문학관 쪽 회상나루 관광지에 주차하고 청룡사까지는 1.5㎞로 왕복 1시간 소요된다.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

청룡사(청주)
역사관광충청북도

청룡사(청주)

청주 구룡산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청주의 초입은 여름이면 동굴 속을 떠올리게 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로 시작된다. 전국의 고속도로 진입로 중 가장 아름답고, 운치가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청주 청룡사는 이 가로수길 초입 수의동에 자리한다. 수의동은 예로부터 절의를 지킨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 청룡사 인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로 동래성을 끝까지 지키다 순국한 송상현의 묘소와 위패를 모신 충렬사가 있기도 하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산사를 품고 있는 구룡산과 연관이 있는데 구룡산의 형세가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청룡사는 이 아홉 마리 용 가운데 청룡을 나타내는 산줄기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명당으로 알려진 청룡사 인근에는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많은 절터가 남아 있으며, 청룡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에도 신라 시대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청룡사는 1925년 청신녀 박문수행이 수숫대에 흙을 발라 띠집을 짓고 구도행을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이때 향불을 피우며 예불을 올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불상이 남아 있는데, 주불인 석가여래 좌상과 그 옆에 있는 조그마한 관음보살상이다. 이 두 불상은 흙으로 만든 토불이다. 토불은 흙부처, 또는 소조불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만든 불상을 말한다. 청룡사의 석가모니 불상은 흙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이쪽저쪽이 둥글둥글하다. 금칠을 입혔지만 투박한 조성 수법으로 인해 잘 다듬어지지 않은 흙의 표면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청정로 116

청송포교당
역사관광경상북도

청송포교당

청송군 청송읍 중앙로에 있는 청송포교당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은해사의 청송지역 포교당이다. 원래 경허선사가 주석했던 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936년에 청송 읍내의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세운 사찰이며, 창건 이후 별다른 사적은 전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을 딛고 청송 지역민의 포교를 위해 군법회며 불자들을 모아 불심을 펼치는 데 노력하는 등 지역주민을 위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청송포교당의 시설로는 대웅전, 포교당, 공덕비가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신도 수는 200여 명 가량이다. 1990년의 조사에서도 신도 수가 200여 명이었는데, 청송군의 기타 종교와 달리 현재까지 그 신도 수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청송 지역 포교당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중앙로 267-11

청안사(세종)
역사관광세종특별자치시

청안사(세종)

세종시 청안사는 1900년경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현재의 청안사에서 약 50m 정도 아래쪽으로 내려간 경사면에 위치한 옛 절터에서 조선시대 중기의 기와편과 백자편이 출토된 바 있어서 적어도 이 무렵에는 사찰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백제 말에 창건된 북혈사로 추정되기도 하며 일설에는 비암사에 속한 암자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한 현 사찰지에 신라시대의 불당이 있었다고 전해기기도 하고 주변지명이 절골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1900년경 스님들이 살기 시작하여 1950년경 곽재순씨가 요사터에 법당을 다시 지었고 1987년 법진스님이 법당을 현재 위치에 개축하였다. 청안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불교태고종 성불사(成佛寺)였다. 그러나 2001년 3월부터 주지로 부임한 청현(靑峴)스님에 의해 2002년에 현재의 이름인 청안사(淸眼寺)로 개명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으로 종단을 변경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가느실길 1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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