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49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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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충북)
현암사는 바위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다람절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한자화한 현암사(懸岩寺)라는 이름을 같게 되었다. 현암사의 창건시기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절에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백제 전지왕 때 달솔해충(達率解忠)의 발원으로 고구려의 스님인 청원선경(淸遠仙境) 대사가 창건했으며, 원효대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현암사는 조선시대의 각종지리서에는 견불사(見佛寺), 혹은 현사(懸寺)로 나와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조선초기의 기록에서는 견불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후기로 들어서면서 현사로 바뀐 것이 지금의 현암사가 되었던 것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대청호반로 151

현풍포교당
산 중의 큰 절이 도심의 포교를 위한 거점을 삼기 위해 도시민들의 생활터전 가까운 곳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보다 더 부처님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곳이 이른바 포교당이다. 현풍포교당은 애초 유가사의 포교당에서 출발해 현재는 동화사 포교당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08년 창건된 현풍포교당은 창건 취지에 맞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포교의 최전선에서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현풍포교당은 어떠한 특별한 기도처로 표방하지도 않고 누구나 절에 와서 자신이 소원한 바를 부처님께 기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27길 54-6

혜광사(경산)
대한불교 법화종에 소속된 혜광사는 1931년 창건됐다. 혜광사의 사찰 건물은 조선시대 자인현 객사로 쓰던 건물을 일제강점기 ‘투현’이라는 일본 승려가 일본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현 위치로 이건해 일본식 사찰로 건축해 운영해 왔다고 전한다. 일본 승려가 이곳에 터를 정한 것은 이 곳이 당시 경산의 중심지였으며 풍수적으로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형상인 연화부수형국의 명당자리였다고 알려져 있다. 해방 후 일본에 거주했던 한국 스님인 혜광스님이 이곳에서 주석하면서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대한 불교 법화종단에 사찰을 등록하게 됐다. 이때부터 주지스님의 법명을 따 혜광사라 사명을 짓고 지금의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를 국내 모 사찰에서 모셔와 명실공히 한국불교 법화종 사찰로 사격을 일신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혜광사는 점차 쇠락해져가 거의 폐사 직전에 놓였던 것을 1975년 사찰의 주지로 새로이 부임해 지금까지 주석하고 있는 법화종 원로 혜문스님이 대웅전을 중창하고 지금의 사찰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장산로24길 7

혜국사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 중턱에 자리 잡은 혜국사(惠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성왕 8년(846년)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법흥사라고 하였다. 고려 말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크게 활약하여 나라에서 절 이름을 혜국사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청허와 송운·기허 등이 이 절에 머물며 승병을 지도했다고 한다. 산내 암자로 안정암이 있으며, 건물로 대웅전, 관음전, 산신각, 큰방, 요사채 등이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052-220
혜봉사
혜봉사는 김제 IC 및 금구면 소재지 인근에 있는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이 사찰은 1936년에 청신녀 전주이씨 청정월 보살이 인동장씨 종중의 땅을 헌사하면서 불사가 시작되었고, 1970~90년대에 지금의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곳은 볕이 잘 들어 아름다운 꽃이 자연적으로 피어 ‘꽃밭댕이절’이라고도 불린다. 건물은 대웅전, 염불전, 종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칠층석탑도 세워져 있다. 대웅전은 문살마다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겨 꽃 창살로 만들어 놓았고, 벽화로 사군자를 그려놓았다. 이곳은 또한 도량이 넓고 시설이 좋아 영산작법보존회의 하계 정기수련대회 장소로 활용되며,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금구향교, 남강정사, 선암저수지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양시로 142-13

혜원정사(부산)
혜원정사의 창건은 1925년 일제강점기 때이며, 당시 부근 마을에 살고 있던 김덕만 노인이 땔감나무를 하러 이곳 산에 왔다가 옛 절터를 발견하고 부인 김순임과 함께 이곳에 작은 사찰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산을 털어 금동부처 한 분을 조성하고, 3칸 목조기와 금당을 건립하여 30여 년간 머물렀고, 그 이후 자손들이 이 사찰을 10여 년간 계승 유지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폐사되었다. 고산 스님이 1975년 사찰터 물색차 답사하던 중 묘봉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절터를 발견하고, 이곳에 사찰 재건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혜원정사가 창건되었다. 혜원정사의 ‘정사’는 사찰을 의미하는 명칭이며, 떠돌며 수행하던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안거 하며 정진하는 곳을 말하고,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혜원은 지혜의 동산이며, 불교를 배워 깨달음을 찾는 이가 반드시 닦아야 할 3학 즉 계[戒], 정[定], 혜[慧]를 이루는 불교 수행의 동산을 의미한다. 혜원정사를 창건한 고산 스님께서 강조하시는 육화정신을 바탕으로 불교대학, 시민선방, 고산장학회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신행단체들이 부산지역 포교와 불교의 대사회적 소임을 다하고 있으며, 현재는 고산 스님의 제자이신 원허스님께서 주지를 맡아 적극적인 수행과 포교의 중심 사찰로서 나날이 발전해 나가고 있다.
부산광역시 연제구 고분로68번길 47
호국지장사(서울)
호국지장사는 670년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도선국사는 9세기 사람이나 7세기보다는 9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도선국사는 이곳이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는 명당이므로 갈궁사라 했다고 전한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혀 공민왕 때 보인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봉은 본말 사지(奉恩本末寺誌)』에 의하면 1577년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 씨(昌嬪 安氏)의 묘를 부근으로 옮기면서 이 절을 능침 사찰로 삼고 이름을 화장사로 바꿨고, 이후 1663년에 중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1862년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년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경 파루를 새로 지었으며, 1878년에는 주지 성월스님과 경해스님이 대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고, 1920년에는 주지 원옹스님과 명진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으며,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 스님이 능인전을 중수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이곳에 국립묘지가 들어섰고, 1983년에는 호국지장사로 다시 사명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호압사(서울)
서울시 금천구의 전통사찰인 호압사는 1393년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 무학대사는 호랑이 기세를 누르기 위해 호암산에 호압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호압사에서는 현재 서울특별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호압사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도량 내에 있는 500년 수량을 지닌 두 그루의 보호수는 호압사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이다. 호압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 주는 안식처로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호암로 278 (시흥동)

홍룡사(양산)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의 승려 1천 명에게 천성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할 때 낙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당시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이름을 낙수사라고 하였다. 사찰이 있는 천성산의 산 이름은 본래 원적산이었으나, 당나라 승려 1천 명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홍룡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 승려 법화가 중창하였고, 절 이름 홍룡은 사찰에 있는 폭포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홍룡폭포는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있는데, 옛날에 천룡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1970년대 말 우광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 종각, 선방, 요사채 등이 있고, 폭포 옆에 옥당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홍룡로 372

홍제사(밀양)
홍제사는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 수호사찰이다. 그 연혁은 자세하지 않으나 이곳 무안에 표충비가 세워진 1742년(영조 18)에 사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무안면은 사명대사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이 있던 곳으로, 홍제사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세웠던 표충사의 후신이다. 백화암은 병자호란으로 그 내부에 있던 사당이 퇴락하자 1710년(숙종 36) 밀양부사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짓고 사당을 정비하였다. 이후 표충비각의 창건주로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태허당 남붕선사가 나라로부터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현재의 터에 표충비각을 세우고 백화암에 있던 사당을 홍제사터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사당 수호사찰로 명맥을 유지다가 1838년(헌종 4)에 표충서원이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천유대사의 주도로 재약산 아래 영정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을 독자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자그마한 원당과 삼비문을 형성하여 현재의 가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각의 관리는 표충사 승려가 번갈아 파견되어 담당하다가 일제 때에는 대처승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헐고 현대식 법당과 요사를 지어 포교당으로 삼고 비각을 보존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구연운 화상이 비각의 관리를 맡아 비각과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그 뒤 거의 폐허가 되어 표충비만 남게 되었다. 1977년에는 창건주 한월 동조선사가 홍제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하여 국가의 지원으로 표충비각을 중수하면서 현재의 가람을 이룩하였다. 1978년에 표충비를 보호하는 보호각을 건립하고 그 주위로 담장, 삼비문과 비각을 수호하는 인법당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연경장엽 선사가 경충당을 건립하였고, 1981년에는 현재 요사로 쓰고 있는 인법당을 축대 아래로 내려 현재의 설법보전을 신축하였다. 1981년부터 수년간 홍제사 2대 중창주인 정상 스님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도움으로, 주법당인 설법보전과 사적비, 범종각, 경충당, 요사 등 현재 홍제사의 가람 기틀을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표충비각의 수호사찰로 밀양시가 추진하고 있는 사명대사 성역화작업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의 중대사나 위기 때마다 표충비에서 땀이 흘러 '땀 흘리는 비'를 지키는 사찰로 전국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4

수원사(수원)
수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직할 사찰로 수원 및 인근 지역 불자들의 정신적 귀의처이자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20년 4월 8일 당시 용주사 주지스님이셨던 대련스님이 수원지역 불자들을 위해 수원불교포교소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이래, 여러 스님들의 정진과 노력으로 전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가장 모범을 보이는 사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동안 대련스님 이후 임무경포교사, 손계조포교사, 정하스님, 양우스님, 법진스님, 정락스님, 자승스님, 성관스님, 세영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여 수원사를 중수하고 요사를 정비했으며, 여러 신행 단체를 설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1999년에는 연건평 1,000여 평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현대적 설비를 갖춘 불교문화원을 건립했다. 2005년 8월에는 전통 고건축과 현대식 건축기법을 이용한 연건평 200평의 공양각(요사채·식당)을 리모델링하여 수원지역 불자 및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004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제1회 템플처치 공연예술제 참여 사찰로, 2004년~2005년에는 나혜석 추모음악회를 통해 명실공이 문화공연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찰로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2007년 1월 25일 성도재일 대법회날 불교문화원 지하 200여 평에 정토마을을 건립하여 지장보살님과 시왕 및 권속, 지장원불 1,800불, 지장본존 탱화 등 시왕불화 총 11점을 조성하여 낙성하였으며, 지장원불과 함께 돌아가신 영가님을 위한 안치단(사리단)도 함께 마련하여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부처님의 진리를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 불교복지와 불법홍포를 위해 관내에 서호노인복지회관과 영통종합사회복지관과 영통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 300 (남수동)

화림선원
화림선원은 재단법인 선학원 소속의 사찰이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수리산(修理山) 연봉인 은룡산(隱龍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속에 위치한 사찰이지만 수리산 연봉인 은용산에 의지하여 터를 닦아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100년 정도 된 흙집과 오래된 우물물이 있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고 물을 뜨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며, 1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어 이곳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절의 창건이나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유명한 약수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는 약수암이 있었다고만 전해져 오고 있다. 대웅전 옆에 수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는 우물이 그것이다. 절의 이름으로 삼고 있는 ‘화림(華林)’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미륵부처가 출현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현재의 명칭인 화림선원은 1972년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장차 미륵부처가 출현하는 곳을 화림동산이라 부르므로 그 뜻을 새기고자 약수암에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주요한 전각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수각과 요사 두 채, 그리고 삼층석탑이 있다. 절에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화림선원은 원래 약수암으로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가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에서 원래의 절 이름이라고 하는 약사사도 찾아볼 수 없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하여 「東國輿地志」, 「伽藍攷」, 「輿地圖書」 등의 문헌에는 수리산에 있던 사찰로 元堂寺와 淨水菴 두 곳만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정수암은 18세기에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혹시 약수암을 정수암과 혼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절 부근을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또 탑이 많아서 ‘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의 탑들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화암사(예산)
예산의 화암사에 가면 추사 김정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조선후기 문인인 추사는 예산 사람으로서 이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색창연한 그의 생가, 추사고택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야트막한 오석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화암사는 추사나 그의 일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절이다. 이 사찰을 중건한 김한신이 김정희의 증조부이기 때문이다.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로서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로 봉해졌는데 이들 부부는 죽은 후에 용산 아래에 위치한 앵무봉에 합장되었다. 현재의 화암사는 가까이 가 보아도 사찰 입구에 위치한 정갈한 요사채에 의해 사찰이란 느낌이 잘 들지 않는 그런 곳이다. 아주 오래된 고택의 요사채를 지나야 비로소 사찰에 들어서게 되는 데 곳곳에 추사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산재해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1길 21-29

꽃절(화암사)
음성군 원남면의 사향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꽃절은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고 전해지며, 여러 고증 문헌자료와 지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1937년에 김승원이 꽃절을 청진암으로 변경하여 창건하였고, 1981년 신도회에서 청진암을 화암사로 바꾸었다. 2000년도에 화암사는 다시 원래대로 꽃절이 되었다. 이곳에는 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강당을 겸하는 관음전이 있다. 사찰에 전해지던 불상 7점 가운데 3점은 흙으로 제작한 것으로, 음성읍 한벌리 수복암으로 옮겨졌는데 1점은 부서지고 다른 2점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불상 가운데 하나인 약사여래 불상이 보관되어 있고, 법당에는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덕로 330

화장사(대구)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1925년 무렵 보원거사 김영옥의 발원으로 창건되었고 그가 입적한 뒤 사리 7 과가 나와 부도를 세우고, 1980년대에 지우스님이 주석하면서 중건하였다. 가람은 극락보전을 비롯해서 원통전, 칠성각,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인 극락 회상도가 뒷벽에 탱화로 걸려 있고, 수미단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주전각인 극락보전에 신라시대 옥불로 추정되는 작은 크기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작은 이유는 원래의 본전이었던 용화전에 안치하였던 불상을 중창하면서 옮겨 왔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기념물 천내리지석묘군에 포함된 고인돌 3기가 화장사 경내에, 화장사 담에 1기가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522길 41

황령사(상주)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칠봉산 자락에 위치한 황령사는 절의 창건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인 638년(선덕왕 7)에 의상이 창건하였고, 889년(진성왕 3)에 대구화상이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1254년(고종 41) 몽고의 장군 차라대가 상주성(백화산성)을 침공하자 황령사의 승려 홍지가 관민병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의 넷째 장수를 쏘아 죽였고, 적병의 사상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절이 고려 때 존재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령사가 함창을 중심으로 봉기한 창의진 의병의 발원지로 알려지는 등 호국의 도량으로서 그 정신을 이어온 곳이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대웅전, 천불전, 나한전, 신금당 등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후 1901년 중수되고 1928년 도허에 의해 중수되었으나 1962년 소실되었다. 현재의 신금당은 1966년에 주지 이상호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대웅전은 1976년과 1980년에 걸쳐 기와 보수와 단청을 하였다. 이는 고려 이래로 국토수호의 호국사찰로서의 높은 정신을 이어온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불상은 대세지상이 있고, 석조물로는 사찰입구에 벽허당부도는 인근 못 근처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석가 삼존불상을 모셔 두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령사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은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이 탱화는 조선후기 경기도 화파인 상겸파가 경북지역에 미친 영향을 연구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18세기 황령사의 사세를 짐작하는 데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성주로 225
회룡사(의정부)
사패산 산중에 위치한 회룡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태종 이방원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 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 제7호이며, 비구니 절이다. 회룡사는 흔히 도봉산 회룡사로 불리지만 정확히는 도봉산 한쪽 끝 봉우리인 사패산에 위치한 절로 북한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회룡역 1번 출구에서 나와 회룡탐방지원센터를 출발점으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새 당도한다. 회룡사는 681년(통일신라 신문왕1) 의상이 창건하고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이후 936년(통일신라 경순왕 10) 동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070년(고려 문종 24) 혜거국사가 삼창하였다. 법성사가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인연 때문인데, 첫 번째 유래는 1384년(고려 우왕 10)에 무학대사가 절을 중창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3년간 창업 성취 기도를 올렸는데 태조는 석굴암에서 무학은 무학굴에서 각각 머물렀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청으로 출정가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찾아와 회룡사라 했다 한다. 이와 관련해 이성계가 머물렀다는 석굴암은 회룡사의 부속암자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김구가 상해로 망명하기 전 피신해 은신처로 삼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구는 해방 후 석굴암에 들러 친필을 남겼는데 입구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무학이 머물렀다는 무학굴은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두 번째 설화는 1403년(조선 태종3)에 태조가 함흥차사 끝에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와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회룡사 입구 사거리 부근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상봉지 표지석이 있는데 함흥차사로 꿈쩍도 않던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한양 환궁길에 오르니 태종이 이곳까지 나와 친히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서 이 일대의 마을을 전좌(殿坐) 마을이 되었고, 회룡사의 주소지도 전좌로다.조선의 건국 때부터 조선왕실과 깊은 인연을 이어온 회룡사는 1630년(조선 인조8) 비구니 예순이 중건하였고, 1881년(조선 고종 18)에는 최성이, 1938년 비구니 순악이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이후 6·25 전쟁 때 불에 타 크게 손실된 절을 1954년 비구니 도준이 중건하고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회룡사오층석탑과 회룡사석조,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의정부회룡사신중도가 있다. 그 중 6·25 전쟁의 피해로 복원된 석탑과 사찰의 큰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석조는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오층석탑은 의상의 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작품이라 보기 어렵고 조선시대의 것이다. 또 1887년 상국 신씨가 부모를 위해 발원해 제작된 신중도는 당시 남양주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불화승인 경성당 응석의 작품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전좌로155번길 262 (호원동)
흥덕사
흥덕사는 고흥의 관문이라 할 첨산 아래에 위치해 있고 1929년에 기불대사가 초가로 지어 석로암이라 하다가 1962년 첨산사로 개칭하고 1973년에 확장하면서 극락전을 신축하고 사명을 흥덕사라 했다. 정면 3칸 팔작지붕의 극락전, 산신각, 2층 누각 형태의 종각, 요사, 해탈문, 강당 등이 있다. 절이 자리한 첨산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서, 18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북방 중턱에 낙안사, 남방 중턱에 흥양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흥덕사가 창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낙안사에 있던 미륵불이 절 부근까지 굴러 내려왔다는 말이 전한다. 흥덕사가 자리한 첨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어 지루하지 않으며 능선에서는 넓은 들판과 멀리 여자만을 조망할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군 동강면 고흥로 4603-53

흥륜사(순천)
순천 시내에 위치한 흥륜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 소속 사찰로 시민들의 휴식처인 죽도봉공원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다. 과거 1984년 이전까지 국궁 활터로 사용되었던 곳에 새로이 건물을 이전하여 법당을 만들어 포교당을 조성했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조선시대 선조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활터와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3대 사찰의 대중과 승군의 최초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창건 및 연혁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해방 직후 대처승들이 이곳을 매도하여 약 20년 전까지 활터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활터가 북쪽으로 이전함에 따라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장대길 102

흥복사(김제)
흥복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온 보덕이 창건하여 승가사라 하였다.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절은 완전히 불타버려 절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1625년(인조 3) 김제에 살던 흥복 처사가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이 절을 기원도량으로 삼아 극락전을 중건하면서 절의 이름을 흥복사라 불렀다. 그 뒤 절은 다시 퇴락하였는데 근대에 들어와서는 1943년 법운 스님이 극락전과 관음전 등을 중수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 때는 교단의 행정본부가 되었으며, 1961년에는 월주 스님이 금산사와 흥복사의 주지를 겸임하면서 전라북도 지역 불교정화운동의 핵심역할을 했다. 1976-1979년에 걸쳐서 대대적 중창 불사가 거행되어 절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절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미타전, 미륵전, 삼성각, 사천왕전, 정혜원(요사), 요사 및 수각인 불유각 등 여러 채의 건물이 널찍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찰 경내에는 수령 600년 가량의 신단수와 설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승반길 103 (흥사동)

흥부암(김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하는 김해 임호산(林虎山) 꼭대기 가파른 자리에 위치한 가야불교의 성지 흥부암(興府庵)은 가락국의 수로왕 때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도성의 흥성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신비로운 땅 ‘가락국’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예로부터 그 형상이 거북, 용, 호랑이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해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수로왕 이후 사라진 훌륭한 임금이 다시 나올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기운을 간직한 임호산은 유민 산유민산, 가조산, 호구산, 안민 산안민산, 봉명산, 임오산임어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임호산(林虎山)은 이름 그대로 생긴 모양이 호랑이 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옛 가야국의 중심지인 금관가야의 중앙에 위치한 흥부암은 허황후 오빠인 장유화상이 서기 48년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전하로 269-74

흥왕사
흥왕사는 신륵사 하구로 흘러내리는 금당천과 중암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완장천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로 나지막한 야산에 그 터를 잡고 있다. 고려 초 소달[蘇達]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말 혜근(1351∼1374)이 세웠다고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흥왕사는 여주의 명찰 고달사와는 형제와 같은 절로 그 옛날 소달과 고달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달과 소달은 형제지간으로 각기 뜻을 품어 부처님 전에 그 몸을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각기 뜻을 품은 바가 달라 고달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절을 세웠으며, 소달은 사찰을 진리의 도량으로 생각하며 오래도록 중생을 교화하는 절을 세웠다. 한때 고달이 세운 고달사는 고려의 명문사찰로 명성을 떨쳤지만 일찍 폐사되었고, 소달이 세운 상왕사는 조용히 은둔하며 그 법을 이어나가 아직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소달산 흥왕사는 자그마한 암자의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진리의 도량 모습을 품고 있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당전로 345-4

흥주사(태안)
태안 흥주사는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먼 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산기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꿈인 듯 하얀 산신령님이 나타나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을 장차 부처님이 상주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이곳에 표시를 하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노승은 꿈에 산신령님이 가리킨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고 불철주야 기도를 하니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였고 노승은 더욱더 기도에 정념 하니 또다시 산신령이 나타나 이 나무에 자식 없는 자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게 되고 태어나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니라 하며 사라졌다. 그 후 몇십 년 후 산신령님 말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해 사찰이 지어졌고 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탐스런 은행과 항상 푸르름처럼 부처님의 손길이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노승은 절의 이름을 흥주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흥주사 만세루 앞에 9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몇 개의 줄기가 곧게 하늘을 향해 갈라져 있다. 은행나무의 주간부가 외형적 손상 없이 완전하고 수피도 깨끗하며, 생육상태가 양호할 뿐 만 아니라 나무의 형태도 아름다워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속말1길 61-61

율봄식물원
율봄농업예술원(율봄식물원)은 농촌예술테마농원이다. 농업을 재배, 생산뿐만이 아닌 시각적 관점으로 아름답게 가꾸고 작품화시켜 볼거리와 쉼터를 제공하는 농업 관광 서비스 공간이다. 창정 자연 속에서의 편안한 휴식과 함께 정직하게 재배된 신성한 농산물을 이용한 계절별 농촌체험도 즐길 수 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태허정로 26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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