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3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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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
칠곡 가산산성은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조선시대 석성이다. 내성은 1640년, 외성은 1700년 그리고 중성은 1741년 각각 완성하였고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 객사, 인화관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보루, 장대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곡 가산바위는 가산산성 서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가암 또는 개산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면이 깎아지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 바위 정상부에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오르면 대구광역시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바위의 정상면에는 깊이 파인 구멍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이 땅의 기운을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으나,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칠곡 가산산성 등산 코스는 가산봉과 가산바위를 오르는 코스이다. 팔공산 가산산성지구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동문과 가산봉을 지나 중문을 거쳐 가산바위에 다다를 수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경주 김유신묘
경주시 충효동 옥녀봉 능선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로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비단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 100명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하는 백성을 배정해 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다. 후에 흥덕왕대에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봉분은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으로 둘레에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고 호석과 돌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그 무덤의 양식 또한 왕릉이나 다름없는 규모와 형태이다.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우 온화해 보인다. 경주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조각이 있으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으로는 김유신묘를 따를 수 없다. 면적 1만 4143㎡로 경주시에서 관리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2길 44-7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아랑각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당으로 밀양 남천강 옆의 영남루 바로 아래 대나무숲 속에 있다. 이 비각은 죽음으로써 처녀의 정절을 지킨 아랑을 기리는 것으로 조선 명종 때 세워진 것이라 한다. 1965년 종래의 건물이 낡아 지역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성금과 당국의 보조로 현재의 아랑각을 중건하였다. 사당은 맞배지붕의 3칸 건물이며 삼문으로 이루어진 정문은 정순문이라고 편액 하였다. 사당 안에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아랑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 윤동옥을 가리키며 재기 있고 자색이 뛰어난 규수로 전해진다. 18세 때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통인 주기에게 정조를 강요당하자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아랑의 시신이 묻혔던 곳에 열녀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매년 음력 4월 16일이면 소복한 처녀들이 제관이 되어 제등을 밝히고 그의 정숙한 넋을 기리는 아랑제가 열리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밀양 영남루
밀양 남천강 옆 아동산에 위치한 영남루는 국보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운 것이다. 부속건물로 능파각, 침류각,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고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 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경주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도라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 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 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 절기를 표시한다.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해 농사 시기를 정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도 첨성대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과거의 특별한 인연으로 묶인 보겸과 지아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유적으로서 관람가치가 뛰어난 것은 물론 계절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피어나 나들이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40-25

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금관총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어 붙은 이름이다. 1921년 9월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인데, 이미 파괴된 고분인 데다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것이 아니어서 묘의 구조나 유물의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출토물은 금관을 비롯하여 장신구·무구(武具)·용기 등이며,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다. 금관총의 원형은 지름이 50m, 높이 13m 정도이고, 신라 때만 있었던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속에 덧널[木槨]을 마련하여 옻칠한 널 [木棺]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구조와 불교의 영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 신라 이전인 지증왕(智證王) 전후의 6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봉황로 15 (노서동)

경주 무열왕릉·태종무열왕릉비
경주 무열왕릉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능남길 10-4

경주 선덕여왕릉
경주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재위 632∼647)은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 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첨성대와 분황사,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며,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과 함께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 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수 선덕여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옥산서원(경주)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회재 이언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다음 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공간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식의 배치 체계를 따르고 있다. 구인당은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무변루, 학생들의 기숙사로 동재인 민구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사액서원 중 하나로 그 덕분에 선생의 저서는 물론,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다양한 문집 등의 귀중한 서적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경주 오릉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왕비 1명의 무덤이라 나와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 승하 후 7일 만에 몸이 다섯 개로 흩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오릉 동편에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의 탄생과 관련한 알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1

천마총(대릉원)
경주 대릉원 안에 위치한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 이전 신라의 고분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으며,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은 높이 12.7m, 지름 50m 규모로 봉토 안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으며 적석층 내부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만든 방이 있고 그 중앙에 목관을 두어 시신을 안치했다. 천마총은 대릉원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에 공개된 고분으로 인근의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바로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토된 유물은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관식, 금허리띠, 금동신발 등 피장자가 착용한 장신구류를 포함해 총 11,526점에 달한다. 이 중 대표 유물인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세 줄 장식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두 줄 장식이 있다. 또한 나뭇가지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천마총의 이름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천마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로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회화작품이며, 신라 회화의 대표작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의기사와 의암
의기사는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 패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의암은 진주성 촉석루 암벽 아래 남강 물속에 있는 바위로서 임진왜란 전에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고 불리었으며, 임진왜란 때 논개가 이 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후 의리를 세운 바위라 하여 의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바위의 크기는 가로 3.65m, 세로 3.3m이며, 오랜 시일을 두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 암벽 쪽으로 다가섰다가, 때로는 강 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진주 8경 중 제2경에 속하는 관광지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경주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69/3581269_image2_1.jpg)
경주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유산]
석굴암(국보)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석굴암의 구조는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며, 특히 벽면을 따라 조각된 38구의 불상과 보살상은 어느 것 하나 걸작이 아닌 것이 없고 전체적인 조화를 통해 고도의 철학성과 과학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백색 화강암으로 된 본존불인 여래좌상이 동해를 굽어보고 있으며, 여래좌상의 정면은 문무왕 수중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되고 있다.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너머의 붉은 해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장관을 이룬다. 석굴암에서 해돋이를 감상한 뒤에는 1998년에 개설된 석장로를 따라 토함산에서 동해안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감포와 양북 앞바다에서 청정해역의 신선한 회를 맛보고,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함께 둘러보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석굴로 238 (진현동)

촉석루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初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되었다. 6.25 때 불탄 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진주 고적 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는데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매년 가을 진주성에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개최되어 독특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경주 문무대왕릉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수중 왕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동해 봉길리 앞바다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해수면 위로 동서 35m, 남북 36m, 높이 5.3m 정도 노출되어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 소경제도와 9 서당 10 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자신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며,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고 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한 것이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 하며, 바닷속 왕릉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인공수로를 만든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서 항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3.7m, 폭 2.06m, 두께 0.9m의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망양정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은 그 위치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 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중종 13)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屯山洞)으로 이건 하였다 한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했다. 숙종과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초,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오고 있다.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월송정
사적지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 때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으나,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향인 황만영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일제 말기 월송 주둔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4년 4월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월송정은 신라의 영랑, 술랑, 남속, 안양이라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송묘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다. 정자 주변에는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 금방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월송정의 소나무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일출 광경은 널리 알려져서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인근에 있는 망양정과 함께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몇 안 되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로 517
하동 고소성
신라 때 돌로 쌓은 산성으로 능선을 따라 5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이다.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이나, 최근에는 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거쳐 왜군을 토벌하면서 남하했을 때 쌓은 고구려 계통의 성으로 보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산성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나, 서남쪽 섬진강을 굽어보는 구간은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지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중턱의 고지에 있으며, 그 단면이 사다리형인데, 가공한 장방형 석재를 써서 견고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주산지(청송 국가지질공원)
주산지는 1720년 8월 조선조 경종 원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저수지다. 주산지 입구 바위에는 영조 47년(1771년) 월성 이씨 이진표(李震杓)공 후손들과 조세만(趙世萬)이 세운 주산지 제언(堤堰)에 공이 큰 이진표공의 공덕비가 있다. 준공 이후 현재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밑바닥이 드러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는 물을 담고 있는 땅의 지질학적 특성에 있다. 주산지는 ‘용결응회암’이라는 암석 위에 만들어졌는데 화산재가 엉겨 붙어 만들어진 용결응회암은 암석 내에 광물이 치밀하게 붙어 있어 물이 통과하기 어렵다. 특히, 주산지에는 호수에는 고목의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여 그루가 물속에 자생하고 있어 그 풍치가 호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왕버들과 어우러져 별천지에 온 것 같이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한동안 속세를 잊고 휴식을 취하기에 그지없다. 암석, 물, 나무가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풍광을 선보이는 주산지는 2013년 국가지정문화유산 명승으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은 자연유산이다.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거제도 해금강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갈개마을의 남쪽 약 500m 해상에 위치한 바위섬(해발 약 116m, 면적 약 0.1㎢)이다. 두 개의 섬이 맞닿은 ‘해금강’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1971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지형이 칡뿌리가 뻗어 내린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갈도(칡섬)라는 이름보다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해금강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해발 116m 약 0.1㎢ 의 이 섬은 중국의 진시황제의 불로장생초를 구하는 서불이 동남동녀 3,000명과 함께 찾았다는 ‘서불과차’라는 글씨가 새겨질 정도로 약초가 많다 하여 약초섬이라고도 불렸다. 주위의 경관으로는 해금강 최고의 비경인 십자동굴을 비롯하여, 사자바위, 부처바위, 촛대바위 등 기이한 암석이 많다. 그 밖에 환상적인 일출과 월출로 유명한 일월봉도 있다. 거제시 관내의 해금강, 도장포, 학동, 구조라, 와현 등지에서 해금강 주변섬을 도는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다.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대방진굴항
대방진굴항은 사천시 대방동 바깥쪽 바닷가에 있는 2,099m²(635평)의 인공 항구이다. 고려시대 말 남해안에 자주 침입했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 기지로 이용하였다 한다. 현재의 굴항은 조선 순조 때 진주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 73개 면의 백성을 동원하여 돌로 둑을 쌓아 만든 것으로, 1820년경에 완공하였다. 남해창선도의 적량첨사와 군사적 연락을 취하던 기지로, 당시에는 300여 명의 수군과 전함 2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경상남도 사천시 굴항길 82-10 (대방동)
병산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豐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당시 풍악서당의 유생들은 난리 중에도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고 이에 크게 감동한 공민왕은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며 유생들을 격려하였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서당 근처에 서당 근처에 민가가 들어서고 길이 생기면서 주변이 차츰 시끄러워졌다. 이에 유림들이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 마침 부친상을 당해 하회마을에 머물고 있던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다. 선생이 병산 자락을 가장 적당한 곳으로 추천하자, 유림들은 그 뜻을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지금의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선생의 위판은 1620년(광해 12) 합향하는 과정에서 여강서원(주향 퇴계 이황)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병산에 복향하였다. 당시 서애 선생의 위판을 여강서원과 병산서원에 봉안하는 문제를 두고 “일읍양원병향(一邑兩院竝享)”과 “일읍봉안(一邑奉安)”등 의견이 있었으나 주자의 예에 따라 한 고을 두 서원에 병향해도 무방하다 하여 두 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출처 : 병산서원 홈페이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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