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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2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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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역사관광충청남도

금산 칠백의총

칠백의총은 충남 금산군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묘지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 8월에 조헌과 영규대사의 지휘 아래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 700인의 묘이다.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그 후 1603년(선조 36)에 ‘중봉 조헌선생 일군순의비’를 세우고 1647년(인조 25) 사당을 건립하여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시설을 파괴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황폐하게 만들어, 항일유적을 말살하였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사당을 다시 지었고 1970년에 묘역을 확장한 후 사당과 비석을 새로 지었으며, 1976년에는 기념관을 신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일부 유물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매년 9월 23일 15시에 제향 행사를 거행한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옥천 후율당
역사관광충청북도

옥천 후율당

옥천 후율당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1544∼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선조 21년 중봉 조헌 선생께서 보은 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에 낙향하여 살 때 율곡 이이 선생을 경묘 하여 그 뒤를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이라 하고, 용촌 밤티에 담을 짓고 ‘후율당’이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 선생은 옥천에서 김경백 등과 의병 약 1,600여 명을 모집하고 승병인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인 윤극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되어 700여 명으로 금산전투에 참전했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그 후 철종 5년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이건 하였다가 1864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하였다. 후율당의 건물 규모는 앞면 3칸,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솟을대문과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고, 뜰에는 금산전투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그의 아들 조완기의 효자각이 서 있다. 이곳에는 광해군 3년(1621) 판각한 10매, 선조가 내렸다는 1매를 보관하고 있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길 42

홍성 홍주읍성
역사관광충청남도

홍성 홍주읍성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안회당은 홍주목의 동헌으로 22칸의 목조 기와이다. 역대의 홍주목사와 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건물로 현재 군청 후정에 위치하고 있다. 여하정은 목조 와즙의 육각으로 된 수상정으로 현재 군청 후정에 안회당 뒤뜰과 연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0-1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역사관광충청북도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사당 및 묘소이다. 1981년 이곳에 신채호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 영당, 단재 영각으로도 불린다. 1978~1979년 사이 묘역을 정화하고 신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에 사당을 세웠다. 호석이 없는 아담한 봉분 앞에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와 상석을 놓았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 1기,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신채호 동상, 신채호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며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신채호는 민족사관을 정립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며 일제에 끝까지 대항해 싸운 독립운동가이다. 28세 무렵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 ,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 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중국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하였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

당진면천읍성
역사관광충청남도

당진면천읍성

면천읍성은 당진시 면천읍 소재지에 남아있는 평지 읍성으로 당진,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해서 백제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되었다. 지금의 읍성이 세워진 것은 1439년(세종 21년)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64m 정도로 추정된다. 이 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 성 내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군자정, 레트로거리 등이 있고, 매년 봄에는 면천 진달래민속축제가 열린다. 면천읍성은 지방도 70호선, 609호선, 619호선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당진영덕고속도로 면천IC가 가깝다. 주변에는 골정저수지, 면천향교, 고려개국공신복지겸장군유적지 등이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충주 박팽년 사당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박팽년 사당

박팽년 사당은 충주시 참샘길에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충신인 박팽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775년에 창건되고 1968년에 충주시에서 새로 복원한 것이다. 박팽년은 1447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의 관원이 되어 신숙주, 유성원 등 젊은 학자들과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단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질의 밀고로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었고,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세조의 회유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이 사우는 전면 3간 측면 2간의 목조 8작 집으로, 흙과 돌을 섞어 담장을 둘렀으며 입구에 일각대문이 있다. 사당 건물 정면에는 솟을삼문의 충신문이 있는데 중앙칸에 박팽년의 충신지문 편액이 걸려 있다. 민가 가운데에 있으며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참샘길 113

청주 상당산성
역사관광충청북도

청주 상당산성

* 삼국시대 포곡식 석축산성, 상당산성 * 상당산성이란 명칭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듯하다. 둘레가 4km를 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상당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읍지(邑誌)에 따르면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2) 고지(古址)에 의거하여 석축으로 개수하였다고 하며, 남문 등의 성문·성벽에 당시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남문의 문루는 1977년 복원되었다. * 상당산성의 구조 및 축조법 * 산성의 면적은 12.6ha,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 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아 있고,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역시 문루가 있었으며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 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고 동남방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장대(東將臺)와 서장대(西將臺)의 터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은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산이 머리에 띠를 두른 듯 또렷하게 보이는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상당산 능성 따라 이어진 성벽은 산을 돌아가며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곽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석성을 쌓았다. 성 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 3개의 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곳과 수구 3개소가 있다. 조선군이 훈련하던 동장대는 1992년에 복원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성을 한바퀴 돌고 내려오면 성안에는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전통마을에서 맛보는 전통주와 빈대떡은 산성을 돌고난 고단함을 풀어준다. ※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여 언제든지 해설을 들을 수가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상당산성’은 에서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임금 인조가 피신했던 장소로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70

예산 임존성
역사관광충청남도

예산 임존성

예산 임존성은 예당저수지 서쪽 인근 봉수산에 축조된 백제시대 산성으로 예산 제4경으로도 선정되었다. 외벽은 돌로 쌓여 있고 안은 흙으로 메워진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4km, 높이 약 2.5m, 폭 약 3.5m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했을 때 복신, 도침과 흑치상지 장군이 3년여 동안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였으며, 백제의 산성 중에서도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라 산성 연구에 많은 기초가 되고 있다. 1963년에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봉수산자연휴양림 등을 통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거나 남서쪽 마사리에서 임도를 통해 차량을 이용해 오를 수 있다. 정상부에서는 예당저수지 외에도 오서산, 백월산, 가야산 등을 전망할 수 있으며,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볼 수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 산28

청룡사지
역사관광충청북도

청룡사지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로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절터 내에 국보 제197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보물 제656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충주 청룡사 위전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등의 유물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사찰의 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특히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조선시대의 석조 부도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될 만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남산성

충주 남산성은 충주시 안림동과 목벌동 사이에 있는 산성으로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린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테뫼식 산성이다. 성안에는 우물 자리가 두 개소 있는데 현재 물은 나지 않는다. 동서의 산 능선상에 문터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또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조각 및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충주 남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고군의 이어지는 침입에도 꿋꿋이 막아내어 끝내 지켜졌다고 전해진다.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했다는 설도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충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 유적)
역사관광충청남도

충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 유적)

예산 덕산온천 인근에 위치한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1908~1932)가 태어나 중국으로 가기 전까지 살아온 곳에 조성된 사적지로, 예산 제2경으로 선정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농촌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하이 전투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인 ‘광현당’과 중국으로 갈 때까지 거주하던 집이자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저한당’, 농촌 계몽운동을 펼치던 집 ‘부흥원’이 보존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적비와 동상,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 충의사, 유품 등을 전시한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다. 의거일인 4월 29일에는 매년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솔뫼성지
사찰충청남도

솔뫼성지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셨으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으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 돼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용인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1846년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그리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 때 성인 품위에 오르게 되었다. 솔뫼 성지의 소나무 그늘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을 비롯하여 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개인과 단체 100여 명이 피정을 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이 있다. 또, 최근에 김대건 신부와 솔뫼성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념관과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기념과 성당을 신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청주 흥덕사지
역사관광충청북도

청주 흥덕사지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 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사찰충청남도

홍성 오관리 당간지주

당간지주 화강석재 2개의 기둥으로 된 사찰 당간지주로서 절 앞에 세워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고 나쁜 기운을 내쫓는 깃발을 ‘당’이라 하고 그 깃발을 매다는 깃대를 ‘당간’이라고 한다. 당간 지주란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말한다. 홍성 오관리 당간 지주의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의 중앙부에는 줄무늬 두 개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에는 깃대는 세우도록 한 둥근 구멍이 있고 지주의 윗부분에는 깃대를 고정하는 직사각형의 구멍이 있다. 당간 지주가 있는 주변에는 고려 시대 사찰 ‘미륵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97-17

진천 농다리
역사관광충청북도

진천 농다리

진천 농다리는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다리로, 28칸의 교각이다. 지방유형문화재로서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이며, 교각 사이의 내폭은 80cm 내외이다.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며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다리는 고려 초엽 시대의 권신, 임 장군이 놓았다는 돌다리로 규모도 크고 축조술도 특이하다. 정자, 산책로, 초평저수지까지 연결된 수변데크 등이 조성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신비로운 다리 모양과 주변 풍경이 잘 어우러져 드라마 촬영지로도 등장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역사관광충청남도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정회당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서 수학한 김장생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하여 돈암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내에는 사당인 숭례사와 강당인 응도당, 정회당과 양성당, 산앙루, 장판각 등 다수의 건축물과 돈암서원의 연혁을 밝힌 원정비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그중 응도당은 고대의 가옥제도를 전범으로 하여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다.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개최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돈암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서원 9개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하였다. 당시 한국의 서원은 조선후기 교육 및 사회적 활동으로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증거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았고, 각각의 서원마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계획 등도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
역사관광충청북도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

원호는 세조의 왕위 찬탈 당시 초야에 묻혀 지내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관란재를 짓고 단을 세워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해 단종이 살해되자 영월에 가서 삼년상을 마쳤다. 단종의 능이 동쪽에 있다 하여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동쪽을 향했다고 한다. 원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원호의 충의를 기리고자 헌종 11년(1845)에 비석과 정자를 세웠으며 그의 호에 따라 ‘관란정’이라 이름 지었다.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며 공포는 간결하게 짜여 있다. 이 건물은 1941년에 고쳐서 다시 지었으며, 1970년과 1987년에도 개보수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용두산 산림공원과 의림지, 송학역 등 가볼 만한 곳이 많이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충주 미륵대원지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미륵대원지

미륵사지는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죽향으로 펼쳐져 있다. 미륵리 사지(彌勒里寺址)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하늘재를 넘자마자 지세를 확인하고는 지금의 미륵리에 석불을 세워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충주 미륵사지는 청주대학에서 1977년에서 1978년의 제2차 발굴조사를 통해 절의 명칭이 미륵대원사였음이 밝혀졌고, 1980년에 이화여대에서 3차 발굴을 통해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다가 소실되어 현재의 석조물만 남았다는 것을 밝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156) 기록에 의하면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 교류하게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강을 통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미륵사지는 14,000평 정도의 직사각형 절터에 일탑일금당이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미륵리사지 내에는 5층 석탑(보물)과 석불입상(보물)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3층 석탑이 있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이다. 또한 미륵사지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역사관광충청북도

단양 온달산성

온달 산성은 남한강변의 해발 427m의 성산에 축성된 길이 682m(외측), 532m(내측), 높이 6m 내지 8m로 축성되어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현존한다. 동 ·남 ·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물이 조금 나올 정도이며, 곳곳에서 삼국시대 및 고려 때의 토기 조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현재 중국의 양자강과 황하강 주변이 우리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회고와 바보 온달이 자기 수련의 노력을 통한 명장으로의 변신과 홀어머니에 대한 효행심 그리고 평강공주의 내조의 힘 등을 통하여 현대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의미를 주는 유서 깊은 곳으로 온달동굴과 더불어 학생들의 고적 답사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온달 산성의 지명과 전설에 의하면, 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바보온달 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공주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삼국사기 열전 제45에 기록되어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단양 신라 적성비
문화관광충청북도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는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높이 93cm, 폭 107cm, 두께 25cm로 1979년 5월 22일 국보로 지정됐다. 정확한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삼국사기의 내용을 토대로, 진흥왕 6~11년(545~550) 경으로 추정된다. 단양 신라 적성비의 경우 진흥왕이 세운 다른 순수비와는 다르게 영토 편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비의 윗부분 일부가 잘려나갔으나 대체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국왕의 교시를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사부, 비치부, 무력 등 진흥왕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 주목되며, 새로운 관직 명인 대상등하간지(大象等下干支) 등은 학계의 관심거리이다. 글자 수는 총 430자에서 440자 내외로 보이며, 이 중 완전히 해석한 것이 288자이다. 음각으로 파낸 이 적성비는 예서체와 해서체 중간의 글씨로 서예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비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영토 확장과 신라의 유력 인물, 정복지 포섭 정책, 당시의 관직, 관등, 율령 반포에 대한 중요한 사실 등을 알 수 있어 학술적인 자료로 중요시되고 적성 위에서 남한강이 잘 전망되므로 이곳이 삼국 시대에는 요새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서산동문동오층석탑 및 당간지주
사찰충청남도

서산동문동오층석탑 및 당간지주

이 유물들은 고려 말에 큰 사찰이 있어서 대사동이란 동명까지 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일명 대사동탑이라는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다. 현재 석탑의 총높이는 5m이며, 이중기단과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각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옥개석은 4단 받침에 전각의 반전이 있는 개석이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또한 이 탑과 같은 장소에 있는 당간지주는 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지주가 마주 서 있으나, 기단석의 매몰과 유실로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두 지주의 높이가 각기 달라, 한쪽은 3.96m이고 다른 한쪽은 3.81m이다. 정상부가 파손돼 없어져, 총높이가 동일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서산시 탑동2로 15

운주산성
역사관광세종특별자치시

운주산성

일명 고산산성으로 불리는 운주산성은 백제 시대의 유적으로, 전동면 미곡리·청송리와 전의면 동교리·신정리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운주산(해발 459.7m)을 중심으로 조성된 산성이다. 운주산성은 운주산의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성곽으로 둘레 약 3,210m, 폭 2m, 높이 2~8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분지형의 산세와 수려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치를 자랑하는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쌓았으며 북벽과 동벽은 운주산 정상에서 서쪽과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이어졌고 남벽은 산봉우리를 감싸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서벽은 서쪽 능선을 가로지르며 형성되어 전체적으로 북쪽은 해발 고도가 높고 서남쪽은 낮은 지형적 특성을 보인다. 서문, 남문, 북문에서 문지(門址)가 확인되지만, 대부분 붕괴되어 원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운주산성은 내성과 외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고대 산성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 안에는 성문 터, 건물 터, 우물 터 등이 남아 있으며, 정상 부근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원형 대지가 존재한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백제 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 고려·조선 시대의 자기편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어 오랜 세월에 걸친 역사적 흔적을 보여준다. 이 산성은 백제가 660년에 멸망한 이후, 풍왕, 복신, 도침 장군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항전지로 알려져 있다. 산성 입구에는 고산사라는 사찰이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8일이 낀 토요일에는 백제 멸망기의 의자왕과 부흥기의 풍왕, 그리고 백제 부흥운동 중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고산제가 열린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

배론성지
사찰충청북도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위치한 조선 후기 천주교 성지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신자촌을 형성한 이곳은 한국 천주교 성립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이 토굴에 숨어 ‘백서’를 집필한 곳이며, 1855년부터 1866년까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론 신학교가 자리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묘소와 병인박해 순교자 남종삼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성지 경내에는 성요셉 성당, 황사영 순교 현양탑,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 등 다양한 종교 시설과 수녀원, 사회복지 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이 들어서 있다. 역사적 가치와 신앙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곳은 오늘날에도 전국의 성지순례객들이 끊임없이 찾는 장소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으로는 가장 높은 석탑으로 크게 높은 토단과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홍수 등으로 인한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높은 토단을 조성한 후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다. 기단은 각부를 몇 장의 돌로 조립하였는데 아래위층 기단이 모두 면석에 탱주 네 개씩을 세워 놓았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몇 장의 돌로 구성하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들면서 중첩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되어있다. 상륜부는 2층으로 구성된 노반이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가운데가 볼록한 원주형 석재가 있고, 앙화석이 꼭대기에 올려져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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