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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2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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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사(세종)
역사관광세종특별자치시

연화사(세종)

연화사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88년에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으며, 1897년 보호각을 건립하고 1999년에 오층 석탑과 석등을 조성했다. 가람 배치는 무량수전, 삼성각,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법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구조로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우측 무인명석불상부대좌, 좌측으로 칠존석불상 등이 있다. 현 위치는 고대 사원지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와즙 1동의 법당이 있었으나 보물로 지정된 무인명석불상부대좌가 발견됨에 따라 관리국의 지원을 받아 한식와즙으로 개량하였다. 무인명석불상부대좌는 장방형인 돌로 측면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형태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보물 칠존석불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이 불상은 비암사 석상, 정안면 석상과 함께 고대 미술의 판도를 새롭게 정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연화사의 창건자인 홍문섭씨의 꿈에 현몽이 있어 그곳을 파보니 두 개의 석불이 나와 석불을 모셔다가 사찰을 건립하였다 한다.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연화사길 28-1

쌍계사(논산)
역사관광충청남도

쌍계사(논산)

쌍계사(논산)는 대둔산 줄기의 불명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다. 역사에는 고려 초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을 건립한 혜명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옥황상제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절터를 잡아 건립했다는 말이 있다. 이곳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품고 있으며, 대웅전은 꽃무늬 창살로 유명하다.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했는데, 이를 통해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사찰에는 보물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의 좌측에 나한전과 칠성각이 있으며 대웅전의 전면 좌측에 명부전과 우측에 요사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입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부도군과 중건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쌍계사는 고려 시대에 작은 암자였다가 고려 후기에 크게 중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길 192

관촉사(논산)
역사관광충청남도

관촉사(논산)

관촉사(논산)은 논산 시내 남부 반야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찰로 논산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명승지다. 관촉사에는 독특한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 으뜸은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높이 18m의 석불이 온화하고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어 ‘백제의 미소’로 표현되곤 한다. 은진미륵 앞에 선 석등과 오층석탑, 석문 등도 귀중한 유물이다. 불경을 넣어둔 윤장대의 축을 잡고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관촉사에 있는 유물 중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석등은 보물, 석문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석조비로자나불입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관촉사 앞마당에 서면 풍요로운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보은 법주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찰충청북도

보은 법주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의 법주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성덕왕과 혜공왕이 중창하였는데 이때부터 대찰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고려 홍건적의 침입 때는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환궁하는 길에 들르기도 하였고 조선 태조는 즉위하기 전 백일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병에 걸렸던 세조는 복천암에서 사흘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로서 위용을 떨치게 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찰의 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어 1624년 인조 2년에 이르러 벽암스님에 의해 다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후 오늘에 이른다. 예전 법주사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축이 팔상전에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으나, 1990년 높이가 33미터에 이르는 청동 미륵불을 조성하면서 그 배치가 흩어져 버렸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전각과 종무소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다. 이곳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 일대에는 보은의 지정 문화재 절반 이상이 몰려 있는데 그중 법주사에는 국보가 3점이나 된다. 또, 천왕문과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의 위패를 모셨던 선희궁 원단, 16 나한을 모시고 있는 능인전,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한 희견보살상, 그리고 쌀 80 가마는 너끈히 들어가는 석조와 쇠솥 등이 그것이다. 법주사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통한 미륵신앙이 전해져 내려왔던 곳으로써 기도와 예불 수행 등 기초적인 불교문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템플스테이를 진행하고 있다. 팔상전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 목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 진흥왕 때에 의신이 세웠고 776년 병진이 중창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전은 1984년에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3층 목조탑이 소실됨으로써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전체높이가 상륜까지 22.7m이며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 제일 높은 것이다. 또한 석연지는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을 조식한 걸작품으로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쌍사자 석등은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그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등의 간주석을 석사자로 대치한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대 방석을 모두 하나의 돌에 조각한 것으로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천태산
자연관광충청북도

천태산

천태산은 충청북도 영동군의 양산면 누교리와 충남 금산군 제원면 화원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714.3m의 천태산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잘 정돈된 등산로 그리고 주변에 많은 명소가 산재되어 있어 등산 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가족 단위 등산지로 주목을 받는 곳이다. 특히 양산팔경이 이곳 천태산 영국사를 제1경으로 시작되고 많은 문화유적이 그 신비함을 더해주는 곳이다. 천태산은 4개의 등산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태산 산행의 맛은 단연 아찔한 바위 능선을 타는 짜릿함이다. 특히 75m의 암벽 코스를 밧줄로 오르는 맛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천태산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높이가 그리 높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지만 기암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어 거친 바위를 타는 스릴을 톡톡히 즐길 수 있다. 또한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한 바위와 수많은 나무가 조화를 이뤄 빚어낸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충북의 설악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 산행 초보자라도 힘들지 않게 설악산을 타는 듯한 산행의 즐거움을 기대해 볼 만하다. 천태산 입구 천태동천의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진주폭포와 삼단폭포(옛 용추폭포)를 지나면 영국사 입구가 나온다. 조금 더 길을 걸으면 1,000여 년 동안이나 이산을 지키고 있는 영국사 은행나무의 뛰어난 자태를 엿볼 수 있다. 높이 31m 둘레가 11m 정도 되고 가지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등산로가 갈리고 영국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서쪽으로 서대산이, 남쪽으로는 성주산과 그 너머 덕유산이 보인다. 영국사는 신라 문무왕 8년 원각대사가 창건하였고 그 후 효소왕이 육궁백관을 인솔하고 피난했다는 전설이 있는 옥새봉과 육조골이 있고,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한 것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였다 하여 영국사라 개칭한 곳으로 지금은 청소년들의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개심사(서산)
사찰충청남도

개심사(서산)

개심사는 운산면 신창리에 위치한 충남 4대 사찰 중의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만개하는 벚꽃은 주위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사찰 주변이 온통 벚꽃으로 만발해 마치 속세의 시름을 잊은 선경에 와 있는 듯한 감동마저 느끼게 한다. 출처 : 서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청주향교
역사관광충청북도

청주향교

청주향교(淸州鄕校)는 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청주 지방의 국립학교이다. 조선 태조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종 26년(1444)에 세종이 초정(椒井)에 행차했을 때 청주향교에 서적(書籍)을 하사한 일이 있고, 또 세조 10년(1464)에 세조가 청주에 행차했을 때 문묘(文廟)에 친히 제향(祭享) 한 일이 있는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제일(第一)의 향교였다. 그 후 숙종 9년(1683) 현령(縣令) 이언기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122번길 81

신항서원
역사관광충청북도

신항서원

신항서원은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1570년 창건한 이후 여러 차례 추향과 사액, 위차 시비를 거쳐 아홉 분의 성현을 모신 서원으로 훼철과 복원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항서원이라 편액 된 삼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묘정비가 있다. 묘정비 뒤로 앞면 5칸, 측면 2칸 크기의 강당인 계개당이 있다. 강당 뒤로 다시 삼문을 지나 앞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사당인 구현사가 위계를 이루며 자리한다. 처음 지역의 사림과 명망가를 모신 서원으로 출발하여 점차 노론계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추향과 위차 시비를 통해 노론계 서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이정골로 115-8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역사관광충청북도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962년(고려 광종 13)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962년(고려 광종 13)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유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48-19

청주 탑동 양관
사찰충청북도

청주 탑동 양관

탑동 양관은 20세기 초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로 선교사 주택, 성경학교, 병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주에 서양식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선교사 밀러가 청주에 온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땅을 사기 시작해서 각각 다른 시기에 여섯 동의 건물을 지었다. 지하실은 주로 돌을 사용해 외벽을 쌓았으며 여섯 동의 건물 중 한 건물의 주춧돌은 개신교 선교자들이 있던 청주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양관 부지 내에서 기와와 벽돌을 굽기 위한 질 좋은 점토가 발견됐고, 이를 채취해 벽돌을 굽는 데에 50명 이상의 인원을 고용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못했던 유리,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 철물류와 같은 수입자재가 많이 사용된 건물이다. 한식과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지어진 연대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며, 전통건축에서 근대건축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과도기적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동로32번길 17-6 (탑동)

도담삼봉
자연관광충청북도

도담삼봉

남한강 한가운데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솟아있는 단양팔경의 으뜸 명소다. 물에 잘 녹지 않는 지질 성분으로 인해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깎이고 남아 현재의 독특한 지형을 형성했으며, 국가 명승 및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 단원 김홍도 등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이곳의 풍경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을 만큼 예로부터 뛰어난 경관을 뽐내온 장소다. 가운데 가장 큰 봉우리에는 '삼도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어 고풍스러운 멋을 더하며, 계절과 시간에 따라 피어오르는 물안개나 장엄한 일출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단양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하는 필수 코스이다. 유원지 내에 위치한 삼봉스토리관은 단양의 명소를 자료 보관소로 전시하고 있다. 강 건너편에 도담정원이 조성되어 다채로운 계절 꽃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기 좋다.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삼봉로 644

진천향교
역사관광충청북도

진천향교

진천향교는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것으로 순조 4년(180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고치고 풍화루를 지었다. 1816년에는 대성전을 고쳤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풍화루 등과 부속건물들이 남아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제사공간을 형성한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으로 이것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이 이루어진다. 풍화루는 학생들의 휴식공간이면서 누문의 기능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화5길 30

진천 이시발 신도비
문화관광충청북도

진천 이시발 신도비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시발(1569∼1626)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다. 이시발은 오촌 대건의 아들로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현 청주시 오근장)에서 선조 2년(1569년)에 태어났다. 선조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임진왜란(1592), 이봉학의 난(1596), 이괄의 난(1624) 당시 큰 공을 세웠다. 생을 마친 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친 세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의 생활안정과 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조선 효종 9년에 세운 비로, 비문은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이정영이 새겼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만뢰사
역사관광충청북도

만뢰사

만뢰사는 조감의 위패를 모셔 놓고 그 공적을 후손이 기리도록 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인 조감은 만노성에서 유창국과 더불어 통솔자가 없어 방황하는 수천 명의 피난민을 이끌고 만노성에 침입한 외적을 물리친 공을 세웠다. 조감은 사후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1851년(철종 2)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를 세워 김유신과 함께 조감을 배향하였다가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되면서 배향을 하지 못하였다. 해방 후인 1949년 진천 길상사에서 다시 조감을 배향하였다가, 1961년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백곡면 갈월리 강당마을에 새로 만뢰사를 건립하여 조감을 배향하게 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강당길 50-6

진천 연곡리 석비
문화관광충청북도

진천 연곡리 석비

연곡리 사지는 진천읍 연곡리 비립 마을 바로 뒤에 있으며, 삼층 석탑이 남아 있고, 인근의 연곡리 석비를 통하여 고려 때 절터로 추측된다. 현재 이곳에는 삼선 포교원의 보탑사가 있다. 진천 연곡리 석비는 발견 당시 비석에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라고도 하며, 원래는 비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지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형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 또는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진천 연곡리 석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좌대는 거북 모양이고 이수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인데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석비 옆에는 석불 좌상과 사리탑으로 추측되는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앞에는 전통적인 공법으로 목탑을 재현하는 등 현대의 불교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보탑사가 건립되어 많은 참배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서한순 효자문
역사관광충청북도

서한순 효자문

서한순 효자문은 진천군 사석리 민가의 낮은 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다. 이 효자문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일생을 마친 서한순의 효행을 길이 후세에 기리기 위해 1971년 6월 6일에 건립한 효자 정문이다. 서한순 효자문은 목재를 이용한 기와집 형태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방의 유림의 건의로 효자문을 세우도록 건의하였으나 조선조 말엽의 혼란과 외세 침략으로 정려(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되지 못하다가 1971년에서야 지방 유림이 당시의 감사, 현감 등의 표창장을 자료로 효자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영수사(진천)
역사관광충청북도

영수사(진천)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영수사 경내에는 조선 후기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관음보전과 관음보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그리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영수사 괘불(靈水寺掛佛)」과 조선 말기에 그려진 「후불탱화」와 「칠성탱화」 등이 남아 있다. 이 밖에 근래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 좌우측에 콘크리트조의 승방 건물과 삼성각이 있다. 영수사는 두타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길 60-125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역사관광충청북도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은 단양읍에서 동쪽으로 16㎞ 떨어진 산골짜기의 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탑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는 향산사라는 절을 세웠는데, 그 후 그가 열반하자 그 자리에 제자들이 석탑을 세우고 묵호자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찰이 소실된 이후 그 터는 40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고, 향산리 삼층석탑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주변에 자기 조각들과 기와가 널려 있어서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935년경 탑 속의 사리를 도둑맞으면서 허물어졌던 탑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삼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9세기 경의 3층 탑 양식을 계승한 아담한 소탑으로, 불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의 일부도 현재까지 보전되어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향산1길 24 향산리삼층석탑

단양 적성
역사관광충청북도

단양 적성

단양적성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단양적성은 석축성으로 성의 길이가 923m이지만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부분의 안쪽 벽 높이 2~3m, 폭 1m의 석축이 일부만 남아 있다. 성재산 봉우리와 남쪽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며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 등 세 곳에서 발견되었다. 산성의 주변에는 남한강의 상류 방면과 하류 방면으로 각각 고대 교통로가 나 있으며, 동서쪽으로도 길이 트여 있다. 남한강 수로를 다라 영월과 충주 방면으로 진출이 용이하고, 강 건너 제천 방면으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한 교통의 요충지에 있는 산성이다. 적성에서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비는 적성의 성격이나 목적,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비의 건립 연대는 늦어도 551년 이전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성은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가 남한강 상류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쌓은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성으로 평가된다. 단양적성은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보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축성 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 있어, 신라의 축성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보령 충청수영성
역사관광충청남도

보령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역사관광충청남도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아산시가지 남부 용담사 경내에 보존된 불상이다. 이 거구의 석불입상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장륙불상(1장 6척)으로 통일신라 양식과 고려 양식이 섞여 있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이지만 얼굴과 옷 주름의 뛰어난 조각 솜씨 덕분에 미적으로 우수하다. 특히 단아한 얼굴, 맵시 있는 이목구비, 잔잔한 미소 등은 이 시기 독특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상의 체구가 직사각형이면서 평면적이지만 손과 팔, 어깨와 다리의 형태를 능숙하게 표현한 점, 옷 주름을 묘사한 유려한 솜씨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선이 구불거리면서도 기하학적인 좌우대칭을 잘 지키고 있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은 중생들이 앓고 있는 심신의 온갖 병마를 없애주는 자비로운 약사여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길50번길 147-20

아산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
역사관광충청남도

아산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수백 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가옥의 형태는 ‘ㄷ’자형의 맛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다. 사적으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 한다.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역사관광충청남도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9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 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영정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금이성
역사관광세종특별자치시

금이성

금이성은 금성산 정상에 축조된 테뫼식산성(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성)이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구축된 형태가 철옹성 같다 하여 쇠성 또는 금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금현성이 바로 금이성을 이르는 것이다. 북으로는 전의·천안 방면, 남으로 금강 일대를 굽어보고 있으며 산성의 동북방에는 운주산성이 있고 북으로는 고려산성·증산성·전의읍내리산성·이성산성이 거의 일직선으로 보인다. 산성 아래에는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큰 길이 통과하고 있어 이곳이 과거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성의 축조 양식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에 일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남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성의 북단과 동남·서남단에 망루 지의 형태가 남아있고 동·북·서쪽에서 문 터가 확인된다. 성내에서 백제 시대부터 고려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항아리, 대접, 사발 등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축조되어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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