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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234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234페이지입니다.

강화 선원사지
역사관광인천광역시

강화 선원사지

강화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 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원사지로 222

하남 동사지
역사관광경기도

하남 동사지

하남 동사지는 경기도 하남에 있는 사적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거대 규모의 절터로서, 금당 규모가 경주 황룡사 금당에 필적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1988년 발굴 작업 시 ‘[桐]동 [寺]사’ 라는 이름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금동불상과 막새기와, 동으로 만든 불기류 및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지름 5.1m의 8각 구조물과 건물터 등 유구의 상태, 건축양식 또한 독특하여 건축사 및 한국불교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 서하남로418번길 122 (춘궁동)

합천 영암사지
역사관광경상남도

합천 영암사지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이 등장하는데 이 비석이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창건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왓조각들이 남아있다.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 데 중요하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 모양이 조각되어 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 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든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남원서천리당산

서천리당산은 당산나무, 돌장승, 솟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장승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마주보고 서 있는 부부장승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장승과 솟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라도 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 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솟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솟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부부장승은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장승으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다. 가슴에 수염이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진서대장군은 여장승으로 머리에는 벙거지 모양의 돌 모자가 씌워져 있고 둥근 눈에 주먹코와 귀가 있다. 다른 여장승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남문안당산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남문안당산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대상물이다. 남문 안 당산은 조선시대 읍성의 남문터로 알려진 취원문루, 일명 건선루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199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성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당산은 2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하나의 기둥처럼 아래위로 세웠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위에 놓인 돌기둥 중간에는 4마리의 거북이가 조각되어 있으며, 아래에 놓인 돌기둥 한 면에는 기둥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2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과 주민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당산제를 지냈으며, 마을 주민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줄다리기도 행하여졌다. 또한 줄다리기 때 사용된 줄은 당산석에 감는 의식인 ‘옷 입히기’ 의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남문안길 10

고창오거리당산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고창오거리당산

고창읍에 조성된 오거리 당산은 동·서·남·북·중앙의 5방위에 당산을 조성한 것으로 자연 입석과 조형 입석으로 세웠다. 고창 오거리 당산은 1803년 3월에 고창현 중심지 세 곳에 동시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오거리가 아니라 삼거리 당산이었다. 삼거리는 상, 중, 하 세 곳을 가리킨 말인데 세 곳에 화표석주의 당산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기존의 삼거리 당산과 천북동과 교촌리의 자연 마을 당산을 포함하여 오거리 당산이라 한다.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당산은 조형 입석으로 당산을 삼았으며, 천북동과 교촌리 당산 은 자연 입석을 당산으로 삼았다. 조형 입석 가운데 하거리 당산은 진서화표의 명문이 있고, 중앙 당산은 미륵 당산으로 불교적 요소가 강하다. 반면에 자연 입석을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의 당산 입석으로 삼은 것은 민간 신앙적 요소가 강하여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합쳐진 오거리 당산인 것이다. 오거리 당산은 화표를 당산 입석으로 삼은 유일한 당산이다.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한 후 당산에 줄을 감아 놓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무안발산마을미륵당산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발산마을미륵당산

무안 지방에서는 대개 당산나무, 선돌, 당집 등을 대상으로 당산제를 지내는데, 발산 마을에서는 장승의 모습을 하는 당산석 2구를 제사의 주체로 삼고 있다. 이 2구의 석인상은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 미륵, 당산, 당산 미륵 등으로 불리는데, 150m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당산 할아버지는 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두툼한 긴 수염이 나 있고, 머리에는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풍화 작용이 심하고 거친 입자의 돌 때문에 세부적인 조각 수법은 알아볼 수가 없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불상과 비슷한 면이 보인다. 신체는 더욱 간결한 선으로만 옷 주름을 표현해 사실성이 떨어진다. 당산 할머니가 초기의 입석 형태를 띠고 있지만, 당산 할아버지는 조각을 지닌 상징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발산마을의 당산석은 입면을 형상화한 신앙 물이란 점과 형태상 성기 바위를 모사하고 있다. 이는 당산석이 상징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적인 당산석의 경우 마을 제사에서 주신의 기능을 갖는 신체는 원래 상태의 암석과 당산나무, 당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통영 문화동 벅수
역사관광경상남도

통영 문화동 벅수

통영 세병관으로 오르는 도로 오른쪽에 서 있는 돌로 만들어진 장승으로, 통영 방언으로 장승을 벅수라고 한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말하며, 마을의 수호신, 경계 표지, 이정표 등의 역할을 했다. 문화동 벅수는 일반적인 장승이 남녀 한 쌍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남장승 하나뿐인 독 벅수로 몸 앞부분에 토지대장군이라 음각되어 있고, 등 뒤에는 1906년 8월에 동락동에서 세웠다는 기록이 음각되어 있다. 장승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라 기를 보강하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통영 벅수는 험상궂으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표정은 민간의 독특한 장승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보기 드문 독 벅수라는 면에서 국가민속문화유산서의 가치가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영인신현리미륵불
역사관광충청남도

영인신현리미륵불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의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있는 미륵불로, 넓고 판판한 화강암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머리에는 둥글고 큰 관(冠)을 쓰고 있는데, 일반적인 갓을 모방한 것 같다. 눈과 눈썹은 귀가 있는 부분까지 길게 조각되어 있으나 입은 이에 비해 작게 표현하여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옷은 양 어깨에 다 걸치고 있다. 목에 길게 걸려 있는 목걸이를 오른손이 가볍게 잡고 있다. 불상이라기보다는 스님의 형태에 가까우며, 민간 신앙의 측면에서 미륵정토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조선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영인산로 511-21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충주 수안보 미륵사지에 있는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대형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이 같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겨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명문 기와를 통해 이곳이 미륵불을 모시는 사찰이며 원(院)을 겸하고 있는 사찰이라는 점, 1192년에 중수하였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현재 불상이 위치한 석굴사원 앞쪽에는 석등을 비롯하여 오 층 석탑, 귀부, 당간지주, 불상 대좌 등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석굴은 평면이 반원형으로 상부를 목조 가구로 결구한 반축조 형식의 석실 사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부구조는 남아있지 않고 하부의 석실만 남아있는데, 감실이 있는 석축 구조를 보이며 이 석실의 중앙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둘러싸고 있는 석실은 웅장한 규모로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다. 석축 위에는 목조 건물이 있었으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실은 목조로 축조되었던 석굴과 목조건축의 복합양식을 보여준다. 석굴암을 모방한 듯하나 규모가 웅장하고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발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석굴사원으로 추정되는 충주 미륵사지의 중심 영역에 있다. 높이가 거대하며 모두 5매의 화강암을 이용해 조성했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상가리미륵불
역사관광충청남도

상가리미륵불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상가리미륵불은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미륵불로 불리지만 형태로 볼 때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초화문장식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중앙에는 변화한 부처님을 상징하는 작은 화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옆의 머리띠 매듭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얼굴은 길쭉하지만 양볼이 두툼한 편이며, 눈은 지그시 감았고 오똑한 코 끝은 훼손되었다. 법의는 우견 편단으로 선간 되었으며, 왼쪽 어깨에는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다. 양팔은 몸에 붙인 채 오른손 가슴까지 돌며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붙이고 있다. 이러한 불상양식은 고려시대 유행한 것으로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역사관광충청남도

홍성상하리미륵불

홍성군 홍북읍 상하리의 용봉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거대한 미륵불이다. 절벽 아래 수직으로 솟구친 거대한 자연 암석을 조각하였으며, 고려시대의 토속적인 지방 양식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민머리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비교적 작은 입이 평면적으로 표현되었고, 입가의 희미한 미소가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신체 역시 입체감 없이 평면적인데, 두 손을 아래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 것만 표현했을 뿐 다른 것은 거의 생략되었다. 지방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등 충청도 지방에 남아있는 거대한 불상들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상하리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야산 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이다.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백제 최남단에 조성된 화강암 석불이라는 점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着衣法)을 보여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光背)가 깨지고 대좌(臺座)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대체로 완전한 모습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육계가 솟아 있는데, 이는 백제시대의 불상인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흡사하다. 불상의 조각양식은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이나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같은 계열의 백제시대의 불상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불상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고 있는 불의(佛衣)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대의(大衣)를 입고 있으며 승각기(僧脚岐)와 아래치마(下裙)도 보인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큰 불상과 같은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불상의 조각양식이나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고 있는 불의(佛衣) 등에서 백제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삼국시대 말기부터 말기부터 등장하는 편단우견의 착의법은 신라 지역의 삼곡(三曲) 자세 금동제여래입상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했던 형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석불상의 발견으로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그 착의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불상의 제작시기는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6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역사관광경상남도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7m이다.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육계)이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지만 볼륨이 약화되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떨어지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로 55-12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사관광울산광역시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간월사는 신라시대 진덕여왕 때 자장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절터에서 나온 유물은 거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쳐지었으나 조선 말기에 폐사되었다. 후에 사람들이 암자를 세워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여래 좌상을 봉안하였다. 발견 당시 광배는 결손 된 상태로 대좌 역시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불상에서 보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 듯한 얼굴과 신체적 비례는 8세기말에서 9세기에 즐겨 사용된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자리 잡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단정한 입과 긴 눈, 짧은 귀 등의 표현에서 온화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어깨는 좁아지고, 몸은 양감이 없이 펑퍼짐한 모습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얇으며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과 신체의 풍만함과 좁아진 어깨 등에서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역사적 기록과 남아 있는 유구가 거의 없는 간월사지의 창건 연대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알프스온천4길 15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역사관광경상북도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경상북도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은 불상의 신체 굴곡도 약하지만 처진 어깨나 딱딱한 양손에서 정지된 위축감이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증촌2길 10-13

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찰서울특별시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시공하여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해 대교당 건축이란 명분을 앞세워 1918년 4월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천도교가 3·1운동의 중심단체로 활동하면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공사가 늦어졌다.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종교의식 외에 각종 정치집회, 예술공연, 강연회 등 일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은 비교적 높고 웅장하여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서울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3·1운동 전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기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화강석을 섞어 써 색과 재질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한국의 근대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젯세션(Secession, 분리파) 양식의 건축이다. 이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독일인 건축가 안톤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독일의 건축사조를 접한 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층과 2층의 날개 부분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의 몸체는 내부기둥이 없는 강당 형식의 대집회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폭의 공간을 덮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구조적 해결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수운교도솔천
역사관광대전광역시

수운교도솔천

수운교 천단은 대전 유성구 추목동에 위치한 목조건물로, 1929년 4월 15일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천단(도솔천), 출입문인 광덕문, 육각형의 종각 등 총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단은 단정한 정원 위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원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으로 문이 나 있다. 정면의 광덕문이 가장 크고 상징적인 출입구다. 건물 내부에는 12마리의 큰 용과 44마리의 작은 용, 88개의 봉화산이 조각되어 있으며, 금강탑, 무량수탑, 불보살·선관·사천왕 조각, 동진보살 탱화 등이 장식되어 있다. 문살의 도깨비 문양과 오색 단청은 사찰 건축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붕에는 원래 궁궐 및 왕실 건축에만 쓰이던 12지신상이 배치되어 건물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한때 이 지역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6.20 사업으로 모두 이전되었으며, 천단 역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를 유지하게 되었다. 천단은 건축미뿐만 아니라 주변의 자연경관도 뛰어나, 금병산과 소나무숲 사이로 부는 산들바람과 은은한 풍경 소리가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더한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자운로245번길 80

서울 정동교회
사찰서울특별시

서울 정동교회

정동교회는 개신교가 이 땅에 보급된 후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이다.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종교 활동을 하였으나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하여 베델(Bethel) 예배당이라 하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립이 필요하게 되자 18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2월 26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정동교회의 구조는 단층이지만 층고가 높아 2층으로 보이고 남측 종각은 3층 높이로 지어졌다. 미국식의 단순화된 고딕양식으로 건립 당시의 사진을 보면 이웃한 기와집이나 덕수궁과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론회와 음악회 등이 열려 신문화 수용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380.16m²(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 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578.5m²(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 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 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

강화 서도 중앙교회
역사관광인천광역시

강화 서도 중앙교회

강화도는 19세기 말 조선이 문호를 개방할 때 지리적 여건으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탓에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세 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 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7월에 완공된 한옥 예배당이다.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건물 내부는 중세 전기의 서양 교회 양식을 하고 있지만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과 측랑, 중앙의 강단으로만 구성돼 있다. 전면에는 강단 위에 설교대를 두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이 건축물은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 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종교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길 256-1

금산교회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금산교회

1908년 전주선 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남북방향 5칸과 동쪽방향 2칸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으로 남자석, 동쪽으로 여자석을 분리하여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 초기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구분이라는 큰 문제를 ㄱ자형 건물을 지어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보게 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각 구조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대구기독교역사관(대구제일교회)
사찰대구광역시

대구기독교역사관(대구제일교회)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에 설립된 교회로 경상북도, 대구시 최초의 교회이며, 약령시 약전골목 한복판 약령시 한방박물관, 대구교남 YMCA회관과 같이 있다. 대구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계산주교좌성당과는 서성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예전에는 성안에 있다 해서 성내교회 혹은 남문안에 위치하여 남문안예배당, 남문내교회로도 불리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서유럽의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의 층수는 2층이며, 종탑은 5층이고 높이는 33m이다. 위치의 특성상 약령시 한방문화페스티벌이나 대구시 주요 축제 때 주 관광지가 되며 대구 시내 투어나 대구 근대 골목길 코스에도 포함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다. 최초의 예배당은 기존의 한옥집을 1896년에 매입해 사용하여 남성정 교회로 이름하다가, 1908년에 두 번째 예배당을 지었다. 두 번째 예배당은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전통 목수들이 함께 지은, 단층의 건물로 교회의 정면 한가운데 출입구를 겸한 종탑을 세우고 그 양쪽에 세로로 긴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다. 이 건물의 양철지붕, 창문, 종탑 등은 당시 대구 부민들에게는 매우 이색적이고 경이로운 것으로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1년 철거했고 새로 1933년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2층으로 건물을 준공하였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6년에 고딕 양식의 종탑을 추가적으로 세워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종탑부는 1층에서 5층까지 창문이 제각기 다르게 설계됐고 윗부분에는 팔각형의 뾰족탑을 세웠다. 이 같은 특성과 역사성에 기인하여 1992년 본당과 종탑이 대구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는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 건물이다.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의 수많은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4년 동산동으로 본당을 건축하여 갔으며 이곳은 100여년간 대구제일교회로 사용된 곳이다. 이후 약령시한의학박물관 옆에서 기독교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독교역사관에는 개화기 시절 사용했던 성경, 찬송가, 헌금함 등 다양한 물품과 당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구제일교회의 연혁, 역사, 선교사들의 활동 이야기가 기록, 전시되어 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교회로서 독립선언문의 탁본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23 (남성로)

서울 약현성당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서울 약현성당

약현(藥峴) 성당은 소규모 성당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886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명동 성당 아래 공소(公所)로 설립되었다. 1891년 당시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 신부가 합동 (蛤洞)에 대지를 마련하고, 부주교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시공감독을 맡아 그 다음해인 1892년에 약현 성당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약초 밭이 있는 고개’ 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약현’이라고 했는데,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약현성당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이 성당은 우리 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주목된다. 또한 고딕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반원형의 둔중한 아치 형태 지붕과 창의 면적을 좁게 나타내는 등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는 벽돌조 건물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성당으로 옆면 창은 처마 높이가 낮아 뾰족아치가 아닌 원형아치로 되어 있으나, 앞면의 출입구와 옆면 좌우로 돌출한 출입구 창 부분이 각기 뾰족아치를 이루어 고딕 모양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47-1

전주전동성당
사찰전북특별자치도

전주전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은 사적으로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 터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했던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 풍남문 밖에 지어진 성당이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히 순교지의 하나가 됐다.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순조 원년(1801)에 호남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이곳에서 유항검과 유관검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 김유산, 이우집 등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의 순교의 뜻을 기리고자 1891년(고종 28)에 프랑스 보두네(Baudenet) 신부가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성당 건립에 착수해 1914년에 완공했다. 이 성당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으며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맡겨 23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지은 건물은 겉모습이 서울의 명동성당과 비슷하며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국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처음 이 성당은 천주교 순교지인 풍남문 밖에 세웠으나 후에 현재의 자리에 확장해 지은 것이다.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장방형의 평면에 외부는 벽돌로 쌓았으며 중앙과 좌우에 비잔틴 양식의 종탑이 있다. 내부 천장은 아치형이며 양옆의 통로 위 천장은 십자 형태로 교차된 아치형이다. 성당 건축에 사용된 일부 벽돌은 당시 일본 통감부가 전주 읍성을 헐면서 나온 흙을 벽돌로 구웠으며 전주 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에서 나온 돌로 성당의 주춧돌을 삼았다고 한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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