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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233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233페이지입니다.

경주 능지탑지
문화관광경상북도

경주 능지탑지

이곳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렸던 능지탑이 있던 자리이다. 무너진 채 버려져 있던 탑을 신라삼산조사단이 1969년부터 수차례 조사하여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능지탑은 원래 기단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을 세워 넣고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탑으로 추정된다. 또한 발굴 중에 소조불상의 파편과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탑의 네 면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부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면은 흙을 덮어 잔디를 심었다. 기단부 둘레에는 십이지신상 중 9구를 방위에 맞게 안기둥처럼 세웠다. 이중 8구는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앞에 있던 미완성된 왕릉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기단부 위쪽의 탑신부는 기단부와 같은 형태로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위쪽에 굄돌을 한 단 더 올린 점이 기단부와는 다르다. 탑의 꼭대기는 사모지붕 모양으로 흙을 쌓아 마감하였다. 현재 탑 주변에는 정비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연꽃 모양을 새긴 돌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내에 왕궁 바깥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 능지탑지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이 능시탑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역사관광경상북도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바위 불상으로 약 높이 3미터의 바위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사면석불이라 부른다. 이 사면불의 서쪽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동쪽은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불, 북쪽은 미륵불, 남쪽은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의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불상조각에 있어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 있게 배치해 매우 특색이 있으며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 4214-76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역사관광경상북도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경주 벽도산의 서쪽을 향한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을 조각한 마애불[磨崖佛]이다. 이 불상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가운데에 새기고,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새겼다. 아미타불의 머리는 아주 큼직하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낮게 있어 모자를 쓴 듯한데, 이는 굴불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 같은 양식이다. 얼굴은 볼에 살이 올라서 매우 풍만하게 보이며 미소가 남아 있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되어 몸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오른손은 내리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민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풍만한 본존상에 비해 날씬한 여성미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발은 역시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에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이러한 손모양을 통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 또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이다. 이 불상들의 머리 뒤에는 모두 둥근 선으로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과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풍만성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의 모양 등으로 보아 제작 시기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두대안길 69 (율동)

경주 금척리 고분군
역사관광경상북도

경주 금척리 고분군

경주 근교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30 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무덤 2기를 조사하였다.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유물은 금귀고리와 굽은 옥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시내의 평지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역사관광경기도

파주 덕은리 주거지와 지석묘군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받침돌 위에 큰 덮개돌이 괴어 있다고 하여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은 모양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뉜다. 경기도 파주시 덕은리에는 20여 기의 탁자식 고인돌과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터가 함께 발견되었다. 낮은 언덕을 따라 집터가 있고 20여 기의 지석묘가 흩어져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덕은리 지석묘는 모두 탁자식 모양이며, 다른 지역의 탁자식 고인돌에 비해 전체 크기와 무덤방이 작은 편이다. 고인돌에서는 민무늬토기, 돌도끼, 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덕은리 주거지와 지석묘군은 청동기시대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파주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단양 금굴 구석기유적지
역사관광충청북도

단양 금굴 구석기유적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嶋潭里) 남한강가에 있는 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동굴유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문화 유적으로 전기구석기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기의 유물층이 발견되어 각 문화층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 실시된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문화가 형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출토된 유물을 통해 구석기시대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구석시유적지의 유물 및 의의 * 동굴의 규모는 입구 높이 8m, 넓이 7∼10m이며 확인된 동굴의 길이 85m이다. 구석기시대 전·중·후기,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문화층들이 덧쌓여, 시기마다 만들어 썼던 석기·뼈연모·토기·조가비연모 등과 사냥했던 짐승뼈 화석과 조가비 및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그들의 먹을거리와 삶 및 자연환경을 살필 수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둔산선사유적지
역사관광대전광역시

둔산선사유적지

둔산선사유적지는 대전 서구 둔산지구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1년 둔산지구 개발 도중 발굴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 곳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한꺼번에 발굴된 곳이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집터 3곳과 신석기시대의 움집터, 구덩이와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구석기 50여 점도 출토되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대전 지역에 인류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려주는데, 특히 이 지역에서 갑천 주변의 얕은 구릉에 넓은 농경지와 풍부한 물을 배경으로 많은 주민이 살았던 사실을 알려준다. 이 유적은 이전 복원 후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10월 28일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둔산선사유적지는 대덕대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 대전 IC 및 신탄진 IC와 호남고속도로 지선 유성 IC가 가깝다. 대중교통은 대전도시철도 1호선 정부청사역을 이용할 수 있다. 주변에는 한밭수목원, 국립중앙과학관, 엑스포과학공원 등이 있다.

대전광역시 서구 대덕대로317번길 9 (월평동)

영암 장천리 선사주거지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 장천리 선사주거지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유적으로, 서호면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장천리 괴음마을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이곳 사람들은 지름이 4∼5m 크기의 원형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은 땅을 30∼50m정도 파고 내부바닥은 진흙으로 다졌으며 벽을 따라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갈대로 지붕을 만들었다. 집의 면적은 약 12∼20㎡로 4명에서 5명 정도의 가족이 모여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원형 내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 얕은 구덩이가 있고, 바닥면 가장자리에 기둥구멍이 마련되어 있는데, 화로터나 출입구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항아리형·사발형의 무늬없는토기, 화살촉·가락바퀴·삼각형 돌칼 등 석기류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원형 움집 1채와 사각형의 움집 1채를 복원해 놓았다. 원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형태의 것이고 사각형은 중부나 북부지방에서 발견되는 움집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유적지 옆에는 발굴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있는데 집안의 생활모습, 돌칼, 돌화살촉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인돌이나 토기 만드는 방법이 그림으로 소개되어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1984년 목포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것으로,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권의 유적이다. (출처 : 영암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군 서호면 선사주거로 308

경주 인왕동 사지
역사관광경상북도

경주 인왕동 사지

경주 인왕동 사지는 인용사의 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용사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629~694)의 안녕을 비는 절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신라까지 정벌하려 하면서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을 감옥에 가두었다. 신라 사람들은 그의 귀국을 기원하며 관음도량을 열었으나, 효소왕 3년(694)에 김인문이 귀국하던 중에 죽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며 미타도량으로 바꾸었다. 인용사는 신라에서 승려나 왕이 아닌 개인을 위해 세운 최초의 사찰로서 당시 신앙의 형태를 보여준다. 2002년~2011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신라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로, 유례가 드문 亞자형 건물 터를 비롯하여 탑지,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 연지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만석보지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만석보지

이곳은 만석대교와 제방 사이에 위치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은 만석보의 터다.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목적으로 둑을 쌓고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한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는 보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넓고 비옥한 배들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너른 평야에서 1만 석이나 되는 많은 쌀을 거둬들일 수 있다 하여 만석보라 이름하였지만, 굶주리고 착취당해야 했던 농민들의 분노가 서려있기도 하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1893년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민보 아래에 만석보를 쌓으며 농민들을 강제로 일하게 하였고, 주인의 허락도 없이 큰 나무를 베어 사용하였다. 또한 보를 쌓은 뒤에는 수세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결국 1894년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와 과중한 세금으로 힘들어하던 농민들은 만석보를 헐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으며, 1973년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비를 세웠다. 주변 관광지로 만석보 혁파비, 정토사, 정읍 신태인시장, 말목장터와 감나무가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말목장터와 감나무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말목장터와 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180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이 감나무의 감은 따지 않는다고 한다. (출처: 국가유산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두자리

장성 황룡 전적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 황룡 전적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시달리던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봉건의 압제와 외세의 핍박을 깨치고자 들고 일어섰다. 마침내 4월 초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이끈 수천의 농민군은 백산에 모여 반봉건의 제폭구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관군과의 전쟁에 나섰다. 4월 6일 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도 감영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이 싸움은 농민군이 관군과 접전을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어서 4월 22일 장성의 황룡강 유역으로 진군한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전주에 주둔하던 홍계훈의 경군을 황룡 지역으로 유인하여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이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경군과 한 차례 접전을 벌였던 전투로써, 동학농민군이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의미있는 전투였다.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게 되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한 전주화약이 맺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까치능선이라고 불리던 이곳 동학격전지가 바로 황룡전적지이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동학사상을 일깨우고, 후세에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전국에서 헌수운동을 통해 이곳에 동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황룡면 물뫼길 25

홍천 풍암리 동학혁명군전적지
역사관광강원특별자치도

홍천 풍암리 동학혁명군전적지

홍천 풍암리 동학혁명군전적지는 조선 후기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웠던 전적지이다. 고종 31년(1894)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가 원인이 되어 동학접주인 전봉준이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홍천 지방에서도 농민 운동이 크게 일어나 농민군의 일부가 관아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장야촌까지 진군하였으나, 관군 총사령관 맹영재와 싸워 동학군 30여 명이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군은 풍암리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지인 자작고개에서 김숙현을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으나 끝내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유해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망자를 800여 명으로 추정하지만 부상자를 함께 묻었다고 하니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금도 풍암리 주민들은 전투에 동학교도로서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제사를 음력 10월 20일부터 수일간 많은 집이 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동학군전적기념비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영월 청령포 관음송
자연관광강원특별자치도

영월 청령포 관음송

영월 청령포 관음송은 한강 상류지역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있는 수령 600년 된 소나무로,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0m, 가슴 높이 둘레가 5m이다. 줄기가 1.2m 되는 높이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있는데,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단종과 관련된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세조로부터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단종은 눈물과 비애, 그리움, 외로움 속에서 처소 바로 옆에 있는 소나무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한다. 관음송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觀(볼 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音(소리 음)’ 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이 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재난을 알려 주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자규루 및 관풍헌
역사관광강원특별자치도

자규루 및 관풍헌

관풍헌은 조선시대 지방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렸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

민충사
역사관광강원특별자치도

민충사

민충사는 강원도 영월읍에 있는 사당으로 단종의 비운과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는 역사적 유적지이다. 이곳은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낙화암에서 투신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를 모시던 시녀 6명은 낙화암에서 금강에 몸을 던졌고, 그 넋을 위로하고자 1742년 영조가 사당을 세우고 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민충사는 금강정 뒤편에 위치하며 사우, 정전,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에는 단종과 시녀들의 초상화, 육신창절서원의 비석 등이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단종과 시녀들의 신주와 제기가 봉안되어 있다. 민충사에서 위로 올라가면 낙화암 절벽이 있으며,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민충사 앞 금강정에서는 동강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인근에는 라디오스타 박물관과 영월향교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

영모전
역사관광강원특별자치도

영모전

단종(재위 1452~1455)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영월의 주산인 매봉산 자락 남쪽 언덕에 있다. 이곳에 유배된 단종이 살해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군민의 성금을 모아서 1517년(중종 12) 영월부사 이용하(李龍夏)가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려고 성황당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이용하의 후손 이계진이 개수하여 ‘영모전’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또한 영정은 추익한(秋益漢)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영모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가운데 칸의 뒷부분에 초상을 모셔둔 방을 두고 그 양 측면과 뒷면은 벽을 설치하였으며, 앞면은 장지문을 달아 밝게 처리하였다. 그 외의 부분에는 마루를 놓았는데 앞면 3칸은 모두 문 없이 개방되어 있고, 뒷면과 옆면은 벽에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설치하였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려고 영월로 오던 중 연하리에 이르렀을 때,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에 백마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은 황망히 읍하고 땅에 꿇어앉아 “대왕마마께서는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고 여쭈니 단종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 그것은 처소에 갖다두시오” 하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추익한은 기이하게 생각하고 급히 단종 처소에 가보니 단종은 이미 승하한 뒤였다. 추익한은 방금 전 만났던 것이 단종의 혼령이었음이 분명하다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종과 함께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단종을 숭상하는 일종의 신앙으로 발전하여 영모전 외에 녹전 성황당, 정선각, 보덕사의 칠성각 등에서도 단종의 위패 또는 영정을 모시고 있다. 또한 그 뒤로도 군민들은 마치 단종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공경하여 해마다 단종문화제가 열리는 시기와 음력 10월 24일(단종 승하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영모전길 148

숙모전
역사관광충청남도

숙모전

숙모전은 계룡산 동학사 안에 있는 사당으로 비운의 왕인 조선 단종과 정순왕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숙모전 앞에는 계유정난에 원통하게 죽은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의 세 재상과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종실,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발각돼 참형당한 사육신, 생육신, 그 외 죽음을 당한 많은 원혼과 의인들의 충의절신위패가 모셔져 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매월당 김시습이 머리를 깎고 동학사를 찾아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해 사육신이 참수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서울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아와 단을 만들고 제사 지냈다. 현재 숙모전 내부에는 단종과 단종의 비 정순왕후, 동무에는 엄홍도를 비롯한 47위, 서무에는 사육신을 비롯한 47위를 모시고 있다. 사단법인 숙모회에서 봄과 겨울에 지내는 전통제향인 숙모전 대제로도 유명하다. 숙모전 대제는 조선 초기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동학사 서쪽에서 고려의 왕과 스승을 위해 지낸 초혼제로부터 시작됐다. 1399년(정종 1) 금헌 유 선생이 단을 만들어 고려의 왕과 포은, 목은을 초혼했으며 1400년에는 이정간이 수령으로 부임해 각을 세우고 야은 길재를 추가로 배향하여 삼은각이라 이름 지었다. 1456년(세조 2) 김시습이 삼은각 옆에 사육신 초혼단을 만들었는데, 1457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해 팔 폭 비단에 억울하게 죽은 100여 명의 신하와 고려의 왕들을 제나 지내게 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단종과 안평대군, 그 밖에 100여 명의 신하의 명단을 추가로 내려보내 모두 200여 명을 제사하게 했다. 후대에 오면서 제향이 중단되었다가 1963년 숙모회가 발족하며 봉안 대상과 의례 절차를 정비하고 매년 김시습이 최초로 제사한 음력 3월 15일 춘향제를, 단종이 사사된 음력 10월 24일 동향제를 거행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

충절사·상의재
역사관광경상북도

충절사·상의재

충절사와 상의재는 엄흥도의 충성심을 기리는 건물들이다. 엄흥도는 조선의 지조 있는 선비로 조선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이 영월에서 시해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17세기 중반 이후 충신과 사육신에게 표창을 하는 정책이 생기게 되고, 엄흥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해 그의 후손을 관리로 등용하였고 엄흥도를 육신사에 모시게 되었다. 영조 26년(1750)에는 엄흥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로 묘를 마련했는데 영조 31년(1755)에 상절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순조 33년(1833) 상절사는 의산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900년에 의산서원 강당에 해당하는 상의재를 세웠고 위패를 별도로 모셔 충절사라 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위만사당길 20-4

환구단
사찰서울특별시

환구단

환구단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제단으로 환단이라고도 한다. 유교적인 정치 이념을 수용해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을 가리킨다. 환구단의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것이고 한글 표기는 독립신문을 따라 정하였다. 고종 34년(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당시 황궁인 경운궁 맞은편 옛 남별궁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췄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3년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환구단 본단은 없어지고 상징물 격인 황궁우와 석고각 안에 있던 돌북만 남아 있다.

서울 중구 소공동 97-3

아산 이충무공 유허
역사관광충청남도

아산 이충무공 유허

아산 이충무공 유허는 아산 현충사 일대의 성역을 말한다. 현충사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 1706년(숙종 32)에 처음 세워졌다. 1932년에는 이충무공 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다시 지은 후,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정부 차원에서 성역화하고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일생 기록화인 십경도가 보존되어 있으며, 난중일기(국보) 등과 장검(보물) 등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 및 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인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함께 있다. 그 외에도 이순신 장군이 살던 옛집, 활터, 정려 등이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

표충사(해남)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표충사(해남)

대흥사 경내에 있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과 제자인 사명대사 유정, 뇌묵당 처영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는 사우이다. 서산대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 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 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 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대흥사와 인접해 있는 이 건물은 조선 정조 12년(1788)에 세웠으며 앞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 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초창 당시는 대웅전을 바라보는 곳에 있었는데, 헌종 2년(1836) 잠시 동남쪽의 주산으로 옮겼으나 철종 11년(1860) 현재 자리로 돌아왔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역사관광충청북도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민공 임경업(1594∼1646)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 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 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충열1길 6 임충민공충렬사

고령박씨종중재실
역사관광충청남도

고령박씨종중재실

암행어사로 많은 일화를 남긴 박문수(1691∼1756)의 제사를 모신 곳이다. 박문수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에까지 올랐다가 1724년 노론이 집권할 때 파면되었다. 1727년 소론이 집권하면서 다시 기용되어 영남암행어사, 충청도암행어사 등을 거치며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와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이 건물은 1932년에 세웠으며 안채는 ㄱ자형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5칸 규모이며 一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재실 안에는 박문수 공이 사용하던 유품과 영정을 모시고 있고 박문수의 손자인 박영보가 쓴 수부정기와 박문수 일대기 등의 전적을 보관하고 있다. 1990년에는 원래 재실이 있었던 자리에 새로 재실을 지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박문수길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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