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21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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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현 선생은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김택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생전에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구례군 광의면 월곡길 22-3

군위 인각사지
군위 인각사지는 군위군 화산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지대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인각사는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세운 절이라 한다. 그 뒤 고려 때에 크게 고쳐 지었고, 일연이 충렬왕 10년(1284)부터 5년간 이 절에서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각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발굴조사 때 대웅전터로 생각되는 건물이 있던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를 확인하여, 신라 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지금의 인각사에는 법당과 두 채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중요문화유산으로 인각사 보각국사 탑과 비(보물)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대구광역시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

이항복선생묘
이항복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충이며, 호는 백사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이항복 선생은 이조참판‧병조판서‧우의정‧영의정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오성과 한음’의 오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13년(1580)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2년(1589)에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렸다. 그 후 오성군으로 봉해지고 형조판서, 병조판서,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묘는 권율장군의 딸이었던 부인 안동권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역 앞의 비탈 아래에는 이항복을 모신 영당이 있으며 영당 오른쪽에는 효종3년(1652)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옥개방부형(지붕모양의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의 모습인데, 크기가 장대하여 당당한 모습이고, 단정한 처마 뻗침과 화려한 장식의 받침돌이 조화롭다. 이 묘역은 17세기 묘제 석물의 예술성을 유지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이항로선생 생가
양평군 서종면 벽계마을에 위치한 이항로선생 생가는 200여년 전 이항로의 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이항로가 태어나서 일생을 보내며 양헌수·김평묵·유중교·최익현·유인석·홍재학 등 많은 선비들을 길러낸 곳이다. 마을의 명칭이 벽계인 것은 벽진 이씨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항로선생 생가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과 하인들이 거처하던 대문간에 붙어 있는 행랑, 집의 안쪽에 있는 ㄱ자형 안채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같이 지은 것으로 광복 후에 헐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강당은 화서선생의 강당 설립 구상에 따라 화서집을 참고하여 건축하였다. 가옥의 배치는 현재 역 ㄱ자형 안채와 ㄷ자형 사랑채가 가운데 담장을 두고 긴 ㅁ자형 형태를 가진다. 툇마루는 쪽마루가 많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완충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채는 평사량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예전의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지었다. 가옥의 부엌 쪽 뒤뜰에는 4칸 규모의 초가 한 채가 있다. 마을에는 이항로 생가 외에도 노산사가 있어 이항로선생의 높은 학식과 유학을 전승하고 있다. 노산사는 벽진 이씨 집안의 것이라기보다 마을 유림의 영당으로 주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15일 많은 유림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 이항로 선생 이항로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1808년(순종 8) 과거에 합격했으나 포기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며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

심곡서원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심곡서원은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광교상현IC에서 차량으로 약 4분, 신분당선 상현역에서 약 3분 소요되며 역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 문정공 조광조 선생 묘 및 신도비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인근에 에버랜드, 한국민속촌,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과 융건릉, 지산포레스트리조트스키장, 덕평공룡수목원, 한택식물원 등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상현동)

산청 조식 유적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조식 선생의 유적지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이충무공사적비
온양온천역 앞에 세워져 있는 이충무공사적비는 1951년 이충무공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국민의 성금을 모아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각 안에 안치된 이 비는 화강암으로 만든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석이 올려져 있는 형태이다. 비석에 적힌 비문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운 내용을 적어 놓았다. 현판은 이시영(1868~1953) 당시 부통령이 쓰고 비문은 정인보(1893~1950)가 지었는데, 정인보가 6.25 전쟁으로 납북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글이라는 점과 당시 비문치고는 쉽게 국한문 혼용체로 썼다는 특징이 있다. 1984년에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장항선 철도 및 수도권 전철 1호선 온양온천역 앞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주변에는 온양온천, 온양민속박물관, 신정호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96
해남 명량대첩비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명량대첩(1597)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에 해남의 해안지역(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으로 옮겨 세웠다가 2011년 3월 원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석비는 직사각형의 비 받침 위에 비 몸돌을 꽂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 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좁은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적의 대규모 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철천량해전 이후 수습한 10여 척의 배로 왜적함대 500척을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울러 명량대첩이 갖는 의미 및 장군의 충의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였으나 비가 세워진 것은 2년 뒤인 1688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34

고하도이충무공유적
고하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이다. 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서 볼 수 있고, 난중일기에는 보화도라고 하였으며,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에는 고화도로 표기되어 있다. 명량대첩 후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이순신 장군은 이듬해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여기에 머물렀다. 이곳은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영산강의 내륙 수로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섬의 서북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어 겨울에 북서풍을 막아주는 구조였기 때문에 배를 감추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장군은 이곳에 돌로 성을 쌓아 적의 배를 구별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오가는 배들에 통행첩을 받아 가도록 하여 열흘 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무기와 배를 만들며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고하도 내의 전망대와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 목화체험전시장과 목화정원 등을 방문할 수 있으며 해상 데크와 둘레 숲길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도 좋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목포시 고하도길 175 (달동)

여수 선소유적
여수 선소유적은 옛부터 ‘선소마을’로 불려진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던 유적이다. 선소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소가 있었으며, 조선 성종때의 고지도에는 선소로도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이 곳이 전라좌수영(여수)에 속하게 되었고, 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 제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순신 장군이 뛰어난 조선 기술을 지닌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북선은 여수지역에 있던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및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난중일기에서는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좌수영 관하 순천부의 수군기지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유적으로는 배를 정박시켰던 굴강을 비롯하여 무기 제작처로 추정되는 대장간(풀뭇간), 세검정, 군기창고 등의 터가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에는 벅수가 세워져 있다. 병사들의 훈련장과 적의 동태를 감시 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인 망마산이 주변에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여수시 시전동

여수 타루비
조선의 명장인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의 타계 후 6년 후인 1603년 장군의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웠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비문은 타루비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다. 타루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동령소갈비가 함께 어딘가로 버려졌는데 해방이 되자 해남의 유지들이 서울로 사람을 보내 비석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찾아와 원래의 위치에 옮겨놓았다고 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함께 보물 제571호로 일괄 지정되었던 타루비는 여수 시민들이 유물의 성격이나 건립 연대 등의 차이점을 들어 분리하여 보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998년 11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統制營)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한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란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의 한산 진영이였다. 지금의 통영시 관내에 통제영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선조 36년(1603) 때의 일이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에 터를 닦고 2년 뒤인 선조 38년(1605)에 세병관,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통영성 일부와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당시 건물 중 남아있는 것은 세병관뿐이나, 최근 관공서와 주택이 있던 통제영터를 일부 정비 복원하였다.
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 (문화동)

장목진객사
거제는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조선 초기에 7개 군진을 설치하였는데 장목진은 그중의 하나이다. 1785년(정조 9)에 중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914년부터 1953년까지는 장목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객사란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숙소이자, 건물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공간이다. 현재 장목 객사는 담장과 출입문으로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부속건물도 없이 본채만 남아있다. 기둥도 외곽만 둥근 배흘림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진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막돌로 쌓은 석축만 남아있다. 장목진은 거제의 북쪽 끝에 위치한 관계로, 진해만 일대를 방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목5길 9
대곡리암각화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대곡리암각화는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유일한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 마모가 심하여 자세하지는 않지만, 사람이나 짐승의 얼굴을 묘사한 듯하다. 이 암각화는 1991년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전북지방의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고령안화리암각화
고령안화리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암벽에 새긴 바위그림으로, 가로 115㎝, 세로 90㎝의 바위 면에 쪼기 수법으로 3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먼저 U자형 반원을 기본으로, 좌우에 활모양의 선을 대칭되도록 그렸으며, 오른쪽 그림에는 작은 구멍을 팠다. 그림의 위쪽 절벽의 바위 면에도 같은 종류의 그림이 2∼3개 더 있는데, 영일 칠포리 암각화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해안에 살았던 사람과 내륙에 살았던 사람이 같은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경주석장동암각화
경주석장동암각화는 경주 평야를 가로지르는 서천과 북천, 두 하천이 만나는 금장대 북쪽 바위벽에 그려진 것이다.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그림은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 되는 범위에 새겨졌으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두 27점이 확인됐는데, 기하문 8점,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성기 3점, 배 1점, 그외 동물 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등이 있다.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색이다. 특히 검과 결합된 여성기의 그림 등은 칠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94년 3월에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이 발견한 것으로 쪼아파기와 쪼고 갈아파기 같은 제작기법이 절충되어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물상암각화에서 기하학문 암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금장대는 경주의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풍경의 아름다움 때문에 기러기도 쉬어간다는 금장낙안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며, 하천 주변은 금장대 습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

영천보성리암각화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영천보성리암각화는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한쪽 옆면에 7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그림을 새긴 면의 넓이는 최대 길이 337㎝, 최대 폭 130㎝이다. 암각은 상하로 긴 장방형에 양측면을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호형으로 처리하고 중간허리에 직선을 그어 아래위로 양분한 후 각각의 칸에 두 개씩의 점을 찍은 고령 양전동식과 같은 형식이 많으며 쪼기 수법을 새겨져 있다. 포항 칠전리와 고령 양전동, 영주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유형으로 추정되나, 각 그림의 세부형식이 조금씩 달라, 서로 시대가 달랐거나 혹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 후기나 철기시대 초기 단계의 것으로 보이며, 선사시대 경북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보성리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은 칠포리 201번지와 334번지 해안도로변 그리고 749번지 등 곤륜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바위그림이다. 1989년 처음 발견되어 1994까지 조사되었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 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이다. 주로 농사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모두 세 군데 나누어져 있다. 원위치에 하나, 거기서 6m 떨어진 계곡에 하나 그리고 20m 떨어진 곳에 또 하나가 있다. 원위치에 있는 암각화는 돌출부 앞쪽을 거칠게 쪼아서 평탄한 면을 만든 후 서쪽면 전체에 6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을 꽉 차게 새겨 넣었다. 계곡에 떨어진 바위는 원위치 있던 것이 갈라져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서쪽면에 2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이 보인다. 모두 오랜 세월 탓에 그림이 많이 닳아 있다. 마지막으로 20m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그림은 작고 완성이 덜된 상태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해안로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뉴와 음통이, 몸에는 위로부터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문양띠, 그 아래는 4개의 유곽, 4구의 비천상, 2곳의 당좌, 맨 아래에는 보상당초와 연꽃 문양띠가 양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논산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은 윤증선생고택이라고도 하며 마을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뒤로는 노성산 산줄기를 병풍으로 두르고, 앞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을 두었다. 연못 안에는 자그마한 원형 섬이 있고, 그 안에 고택과 함께 300년의 세월을 보낸 배롱나무가 멋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운치를 더한다. 연못을 지나 앞마당의 섬돌을 오르면, 기단 위의 기품 있는 사랑채가 손님을 반긴다. 1984년에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택에서는 한옥스테이가 가능하며 다례, 천연염색, 전통음악공연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인근 관광지로는 노성산성, 노성향교, 노성권리사, 노성면 소재지 등이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탁청정종가
1541년(중종 36) 탁청정 김수가 건립하고 조선 후기에 화재가 나서 중건한 탁청정종가는 가옥에 딸린 정자로 개인 정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명필 한석봉의 현판이 걸려 있다. 김수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조리서 『수운잡방』을 저술하였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곳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인 군자마을 ‘오천리유적지’로 이건 되었다. 군자마을은 500~600년 전 광산김씨 농수 김효로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의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 전기부터 끊임없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에는 탁청정을 포함한 광산김씨 종중의 종가인 후조당, 수운잡방의 저자인 김유의 고택 등 20여 채의 고택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와 함께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고문서(보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전적(보물), 후조당 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등이 있으며 유물 전시관인 숭원각에는 선대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후조당에서는 고택체험-한옥스테이도 운영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군자리길 21
경주 양동 무첨당
경주 양동마을 내에 위치한 무첨당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 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무첨당이란 이언적의 손자 이의윤(1564~1597)의 호로 조상이 남긴 유산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조상을 욕보이지 않겠다는 후손의 결의를 담은 것이다. 양동마을은 5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역사마을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가득한 마을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이며 1일 6회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마을을 탐방할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32-19

맹산반딧불이자연학교
맹산반딧불이자연학교는 경기 성남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 속에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자연체험을 통해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우고 지역 환경의 소중함과 건전한 가족공동체 형성을 기반으로 생활, 문화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다. 수심이 얕은 연못에서 다양한 물속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습지, 건강한 생태계 회복을 위해 조성된 반딧불이 보전 복원지역, 자연소재를 이용한 다양한 환경교육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학습장, 등산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37 (야탑동)

영천 숭렬당
조선 세종 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순몽 장군(1386~1449)이 살던 집으로 1433년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영천 숭렬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인데 그 양쪽 끝 칸에 날개를 단 듯 지붕을 덧달았다. 이 같은 모양은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지붕 형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왔다. 평면은 가운데 3칸보다 양쪽 끝 칸이 한 자씩 좁으며 건물 안쪽의 천장은 가구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미고 있다. 영천 숭렬당은 구조가 조선 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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