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21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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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망대
순천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으라고 한다면, 순천만 S자 곡선의 낙조를 꼽을 수 있는데 해 질 무렵 수로가 S자로 흐르는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사진작가들이 순천만을 찾고 있다. 갈대, 갯벌 그리고 곡선 수로를 볼 수가 있으며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순천시 해룡면 농주리에 있는 용산이라는 낮은 야산이다. 순천만 습지를 통해서 가는 방법으로 무진교와 갈대데크를 지나면 산책로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따라 산행을 하고 나면 용산 전망대에 다다른다. 또는 와온해변 일몰 전망대에서 도보 50분 정도 해안 도로를 따라가면 용산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사전에 순천일몰시간을 검색하여 일몰 시간에 맞춰 동선을 결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해룡면 순천만길 513-51

봉화 서동리 동ㆍ서 삼층석탑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같은 규모를 갖고 있으며 양식과 기법이 동일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이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부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2기의 석탑은 각각 동탑 3.9m 서탑 3.97m의 작은 탑으로, 대작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되었다. 석탑 앞 석불 1구 외에는 근처에 절터로 추정할 만한 유적이 없으나,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원촌길 8-14

봉화 청암정
청암정은 1526년(중종 21)에 조선 중기의 문신 권벌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구 유곡마을)에 지은 정자이다. 청암정은 신탄 상류 약 500m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놓았고, 거북 모양의 바위와 조촐한 돌다리가 놓여 있어 옛 풍취를 한층 돋우어 준다. 청암정은 조선 전기의 정원과 함께 연못이 있는 곳이며 따로 별당을 갖추고 네모진 돌담을 둘러쳤다. 초가가 딸려 있는데, 정내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이 쓴 편액이 걸려 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유곡마을을 대표하는 명승지이며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아름다운 돌들과 계곡 등과 함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1963년 3월 28일 사적 및 명승 [내성유곡 권충재 관계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9일 지정 해제됨과 동시에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유곡마을은 1380년 충재 권벌의 선조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서쪽으로 흐르는 석천계곡이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김제 외갓집마을
외갓집마을은 김제시에서 전주 방향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고속도로와 1번 국도가 마을을 감싸 돌고 있는 사통발달의 교통요지로 마을인근에 3곳의 인터체인지(김제 I.C, 서전주 I.C, 남전주 I.C)가 위치하고 있어 타 지역에서의 접근성이 높은 마을이다. 김제시의 금구면에 속하는 낙성리와 산동리 2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갓집마을’이란 이름은 농촌마을의 훈훈한 인정과 정감이 살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광활한 호남평야의 일대에 위치하여 주민 대부분은 농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대단위 시설원예단지에서 재배되는 각종 야채, 친환경 농산물로 지정받은 배 과수원과 친환경적 농법으로 재배되는 쌀 등을 이용한 주말농장과 체험학습장을 마련하여 많은 도시민과 어린아이들이 방문하여 외갓집의 푸근한 정감을 체험하고 있다. 가래떡볶이 만들기, 쌀빵 샌드위치 만들기 등의 체험과 함께 이곳에서는 널뛰기, 굴렁쇠 굴리기, 팽이치기, 투호, 그네뛰기 등 전통놀이 체험도 가능하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사방길 110-5

담양 명옥헌 원림
명옥헌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는 조선시대 오희도가 살던 집의 원림이다. 조선 중기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이다. 계곡 사이로 수량이 풍부했을 때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하여 이름을 얻었다. 위 연못은 인공적인 석축을 쌓지 않고 땅을 파내어 큰 우물같이 보인다. 아래 연못은 자연 암반의 경사지를 골라서 주변에만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명옥헌은 연못 주변에 심어진 백일홍 나무로 유명하며 꽃 이름과 같이 여름철이 되면 석 달 열흘 동안 늘 붉은 꽃나무 열에 연못이 둘러싸이게 된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의 인재를 찾아 호남 지방을 방문할 때 후산에 머무는 오희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명옥헌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하여 이 나무를 일명 ‘인조대왕 계마행’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이라고 부른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 찾아왔다고 하며, 훗날 우암 송시열은 명옥헌의 영롱한 물소리와 경치에 반하여 명옥헌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기기도 하였다. 소쇄원과 같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민간 정원으로 아담한 정자와 네모난 연못, 꽃나무와 소나무 등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호수 주변에 있는 300년 된 배롱나무가 분홍빛 고운 꽃을 피우는 여름이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에서 이영과 라온이 처음 만난 장소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
김제평야
김제평야는 김제시를 중심으로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호남평야의 중심이 되는 평야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김제시 일대의 평야를 “대평, 속칭 김제만경평야라고 한다(大坪俗稱金堤萬頃坪)”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큰들’을 표현한 것이다. 김제시의 큰들로는 만경강과 그 지류의 주변이나 하구에 분포한 용지들, 부용들, 동계들, 백구들, 저산들, 청하들, 만경들과 같은 넓은 들을 비롯하여 봉산들, 봉남들, 월촌들, 남포들, 돔배들 등이 있다. 이들을 통칭하여 김제평야라고 부른다. 김제평야는 호남평야의 중심이 되는 지역에 위치해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주요한 수탈지가 되기도 하였다.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김제 지역은 우리나라가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갖고 있던 1950년대까지는 잘 사는 고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가 공업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업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어지면서 더디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소토리,청하면 동지산리 일대

씨라이프부산아쿠아리움
씨라이프부산아쿠아리움은 아쿠아리움 브랜드인 SEA LIFE사에서 운영하는 아쿠아리움으로, 부산아쿠아리움만 누적 1,500만 명 이상 방문객이 다녀간 부산의 관광명소이다. SEA LIFE 부산은 다양한 종의 해양 생물들을 비롯해 총 8개의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상어투명보트, VR 체험존 등을 통해 생생한 해양 생태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하 1층에서 지하 3층까지 이루어져 있으며, 테마별로 특성을 살린 수조와 해저터널, 수중 생태계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4년 리브랜딩을 위한 내부 수리를 시행하여 친화적인 환경 조성으로 재구성하였으며, 가오리해안, 해마유치원, 샤크워크 등 관람시설이 신설되었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66

삼척 맹방 유채밭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는 국도 제7호선을 따라 이어지는 벚꽃길과 그 옆에 펼쳐진 넓은 유채꽃밭이 어우러져 봄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오래된 벚나무 아래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과 노랗게 물든 유채밭은 조화를 이루며,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유채꽃은 매년 4월 중순경 절정을 이루며, 벚꽃길은 한재밑에서 교가리까지 약 4km, 유채밭은 약 7.2ha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바다와 꽃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은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특히 일몰 무렵 석양과 유채꽃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봄날의 추억을 선사한다. 인근에는 맹방해수욕장, 레일바이크, 해신당공원, 이사부사자공원 등 다양한 관광지가 있으며, 유채꽃마을에서는 계절에 맞춘 딸기 수확 등 농촌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매년 4월에는 이곳에서 ‘맹방 유채꽃 축제’가 열려 봄의 정취를 더한다.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전주 이강주
이강주는 조선시대 3대 명주의 하나로 전통 소주에 배와 생강이 들어간다고 해서 이강주라 불리게 되었으며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25도의 약소주이다. 이강주를 ‘고아내려 만든다’라는 의미로 이강고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미와 누룩으로 빚은 약주를 증류한 뒤 배, 생강, 울금, 계피와 꿀을 넣어 숙성시킨다. 배의 청량한 맛과 톡 쏘는 향, 달콤하면서도 매운 계피의 독특한 향취가 어우러져 알싸하면서도 부드럽다. 조선 시대부터 상류층에서 즐겨 마셨던 고급술로 다양한 문헌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순조 때 문신 이해응은 에서 조선 최고의 술 중 하나로 이강주를 추천했고, 와 등에도 우리나라 5대 명주로 이강주가 등장한다. 조선 3대 명주로 꼽힐 만큼 유명했던 이강주는 일제강점기 가양주 말살 정책으로 밀주로 전락하고 해방 이후에도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순곡주 생산이 금지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그러던 중에 정부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을 대표할 술 제조자를 발굴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강주, 문배술, 안동소주 제조자 세 명을 향토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이강주는 조정형 명인(전라북도 무형문화재)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강주는 2022년 6월 세계 3대 주류 품평회인 에서 금상을 받으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영국과 네덜란드에 직판장이 있고 한류 열풍을 타고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매암길 28 (원동)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 특수한 형태의 석조 불탑이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 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 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가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이 남아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동 의성김씨 종택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은 청계 김진의 종갓집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 김성일이 다시 지은 것이다. 16세기말 김성일이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온 후 북경의 상류층 주택을 본떠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매우 독특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1.6m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바깥채보다 높이 자리한다. 다른 주택과 달리 안채의 안방이 사랑채보다 바깥쪽에 있고, 사랑채는 별채처럼 외진 곳에 있어 손님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채에 딸린 부속채는 2층으로 되어 있어 위층은 서고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였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1-11

김제 벽골제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8 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1420년(세종 2년)에 큰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 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 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반계선생유적지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 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 반계로 97-68
서울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송파구청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학사로 136 (잠실동)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기둥머리에서 보와 도리가 직교하여 직접 결구되는 민도리양식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만동묘정비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사당에 자리 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7년 일제가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에서는 춘추계를 조직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1937년에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더니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렸다. 1942년 이후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 찾아 다시 세웠다. 묘정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신과 옥개석을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1999년 우암 송시열 관련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만동묘, 성공문, 묘정비각, 외삼문, 증반청, 존사청을 복원하였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원풍리 마애불병좌상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넓적하면서도 힘 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세한 것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대전사지 출토 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기 범어사의 고승인 여상조사가 조성, 또는 고려 때 나옹대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하나 고려 중기인 12C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화순대리석불입상
화순 대리 석불입상은 조선 후기의 석불이다. 석불은 예로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불교가 유입된 삼국 시대 이후 통일 신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어수선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지방마다 특색 있는 석불이 조성되었다. 조선 시대는 억불 정책으로 불교 미술품의 조성이 활발하지 못하나 민간 신앙의 대상 중 하나로 이어져 왔다. 화순 대리 석불입상은 높이가 350cm 달하는 석불로, 돌기둥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은 뒤 앞쪽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평평한 면에 글자가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을 하고 나머지 신체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불로, 넓적한 코와 부라린 눈 등 장승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 보이며 턱과 구분되지 않고 바로 어깨로 연결되는 기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석장승에서 흔히 보이는 기법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화순읍 대리
장성원덕리미륵석불
장성 원덕사 경내에 있는 원덕리미륵석불은 돌기둥 모양으로 가슴 아래의 몸체를 먼저 만든 뒤, 그 위로 가슴부터 머리까지는 다른 돌을 얹어 조각하였으며 얼굴, 손, 옷 주름 등을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옥개석과 같은 8각의 넓은 보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큼직한 사각형 모양이며, 큰 눈과 뭉툭한 코 그리고 두터운 입술 등의 표현이 석장승과 같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짓고 있다. 석불이 있는 원덕마을은 갈재 남쪽 계곡의 수구에 해당하므로 장성의 북쪽에서 악귀를 막던 비보장승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입체감 없는 신체는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내린 모습으로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면에만 주름이 표현되었는데, 가슴 아래부터는 반복적인 선으로 돋을새김했다. 근엄한 인상보다는 토속미 넘치는 친근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모양이나 기법 등에서 볼 때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말 또는 조선초로 추정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총지사지석장승
총지사터 입구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돌장승으로, 절의 영역표시 기능과 더불어 경내에서의 수렵·어로 등의 금지를 알리며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상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화강석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려 아무런 조각이 없는 민둥머리와 이마, 커다란 왕방울 눈, 우뚝 솟은 주먹코와 작은 입이 조각되어 있다. 두 장승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나, 남장승은 외수염을 하나 더 조각해 두었다. 장승의 앞에는 각각 널찍한 판돌의 제단이 놓여 있으나, 장승과 관련된 의례는 전하지 않고, 다만 할머니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소원을 비는 곳이라 한다. 조선 현종 7년(1666) 지금의 총지사를 중건하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해평리석장승
장승은 마을입구나 길가에 자리하여 그 마을의 수문신·수호신 등의 구실을 하는 민간 신앙의 한 형태이다. 해평리 석장승은 남·여 한 쌍의 모습으로, 보성의 오봉산 동쪽 산자락 마을 입구 길 양쪽에 1구씩 놓여 있다. 마을 방향으로 우측 편에 돌담을 뒤에 두고 서 있는 것이 ‘상원당장군’이고, 바로 길 건너 좌측에 조금 낮게 서 있는 것이 ‘하원주장군’이다. 상원당장군은 여자의 형상으로, 민머리에 얼굴은 거의 평면이다. 생김새는 주름진 이마에 갈매기 모양의 눈썹을 가지고 있으며 동그란 눈, 방망이 모양 코, 뚜렷한 콧구멍 등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약간 벌린 입술 사이로 치아를 희미하게 새겨 넣었으며 턱에는 덩굴 모양 비슷한 무늬를 조각하였다. 하원주장군은 남자의 형상으로, 역시 민머리이며 몸통 전체는 사각기둥 모양이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있고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눈은 튀어나와 있다. 코는 주먹코이고 콧구멍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긴 입은 지그시 다물고 있다. 또한 양쪽 귀도 정교하게 새겼고 수염도 굵게 조각하였다. 원래 개흥사 입구에 놓여 사찰을 수호하던 역할을 담당하였다가, 이 마을로 옮겨진 뒤 당시 바닷길로 운송되었던 조세의 원만한 수송과 주민들의 평안·안정 등을 기원하는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정읍 김명관 고택
조선 중기 주택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는 이 집은 흔히 아흔아홉 칸 집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으로,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에 건립하였다. 한양에서 내려온 김명관이 청하산 아래 명당을 골라 10여 년에 걸쳐 이 집을 완공한 것이라 하며, 대문 앞쪽으로 30여 평의 연못을 파놓았다. 이 집은 창하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동진강 상류의 맑은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터전에 동남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한데 부엌이 독립되어 특이하다. 안쪽 행랑채의 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구조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온 이 집은 마당의 크기와 위치, 대문간에서 안채에 이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나다. 특히 안마당은 ㄷ자집 형태의 안채 내부 마당과 안 행랑채 사이의 긴 가로마당이 만나서 아늑함이 느껴진다. 후세에 보수 또는 개조되지 않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위 환경이 잘 정돈되어 있어 가옥과 조화를 이룬다.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대체로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어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좋은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민속문화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공동길 72-10
부안 동문안 당산
부안 동문안 당산은 돌기둥(당산)과 돌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진 당산이다. 마을 밖으로부터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운 돌기둥을 중심으로 동쪽 50여 m 지점에 당산나무가 있고, 그 사잇길 양쪽에 한 쌍의 돌장승이 마주 보고 서있다. 돌기둥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으로 그 꼭대기에 돌로 조각한 오리가 올려져 있다. 돌기둥 주변은 당산제에서 쓰인 동아줄로 칭칭 감아놓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정상 부분의 오리와 그 밑의 기둥이 약간만 보일 뿐이다. 당산나무 서쪽에는 몸체에 ‘상원주장군’이라고 새겨진 남장승이 머리에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서 있고, 동쪽으로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새겨진 여장승이 서 있다. 여장승은 남장승보다 키가 크지만 모자는 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새끼를 꼬아 만든 동아줄로 줄다리기를 한 다음 그 줄을 돌기둥에 감아 놓은 후 제를 올린다. 동아줄을 돌기둥에 감는 것을 ‘옷 입힌다’고 하는데, 마을 전체의 복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의미로 신앙물을 인격화 함으로써 돌기둥을 동제의 주신으로 받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돌기둥과 돌장승 모두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신앙을 보여주는 민속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이 집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변형도 되었으나 나직한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풍산평야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상류주택과는 달리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이 강하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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