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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21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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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송호서원

조선 전기 학자 고은 이지활(1434∼)을 기리기 위해 경상도 유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이지활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남은 여생을 산속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떠난 분이다. 죽은 뒤인 고종 28년(1891) 나라에서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순조 30년(1830)에 세운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6년(1869)에 해체되었으나 1947년 다시 복원하였다. 후일 세종대왕의 아들로 이곳 함양에서 돌아가신 이어(李瘀)와 이지활의 손자인 송계 이지번을 추가로 모셔 현재 이곳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내에는 대표적인 건물로 경앙사, 대문 격인 승사문, 서원이 있다. 경앙사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강당인 서원은 학문을 교육하던 장소로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이 외에 제사준비와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건물, 서원 관리인이 살고 있는 건물 등이 있다.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현재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호서원길 8

역사관광경상남도

송호서원(합천)

송호서원은 충숙공 문극겸(1122∼1189)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문극겸은 고려시대 무신들이 집권한 시기의 문신으로,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을 겸하고 무신들의 자문에 응하는 등 문무를 겸비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송호서원은 정조 1년(1777) 대병면 역평리에 세웠다. 그 뒤 고종 7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을 복원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합천댐 건설로 1985년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신성동2길 22-3

수림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수림서원

수림서원은 1856년(철종 7년) 무열공 배현경, 배정지, 배인경 선생 등 여섯 분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배현경 선생은 고려 태조 때의 무신이며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수림서원은 지방교육과 선현 배향을 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림서원의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왼편에 방 2칸, 가운데에 대청 2칸, 오른편에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문인 조제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당 전면 오른편에는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의 삼량구조의 팔작지붕으로 된 산해정이 자리 잡고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화산4길 201-54

신계서원(산청)
역사관광경상남도

신계서원(산청)

신계서원은 이학두가 고려시대 문신인 송은 박익 선생(1332~1398)을 기려 부지 3만 3,000㎡에 서원을 조성하였다. 신계서원 경내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서원 건물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덕산정, 팔각정 등이 있다. 신계서원에는 조선 헌종 5년(1839년) 경에 박익 선생의 제사에 사용하였던 제기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 당시에는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술잔 6개, 술통 2개, 사각형 밥그릇 4개, 원형 밥그릇 2개, 촛대 2개,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 1개 등 18점이 남아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매년 3월 신계서원에서 박익 선생의 제사에 사용하고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지리산대로3833번길 3-16

신계서원(의령)
역사관광경상남도

신계서원(의령)

의령군에 있는 신계서원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인 정준 선생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61년(철종 12)에 지역 향토 사람들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956년에 중수하였지만, 그 또한 풍파에 의해 손상되어 1994년 본원의 건물을 세우고, 2000년 6월 현재의 상태로 복원하였다. 신계서원에 배향된 정준 선생은 본관은 초계이며, 어릴 때부터 지조가 굳고 무예가 뛰어났다. 1460년(세조 6) 신숙주의 모련위 정벌에 공이 있어 훈도로서 원종공신 3등에 책훈되었고, 1466년 8월 영흥부사로 있으면서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였다고 추국을 당하였다.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미타로 26-5

신남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신남서원

무안면 정곡리에 있는 신남서원은 고려 말기 대마도정벌과,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정국군 박위와 조선 초기 문신인 소총재 박기 부자를 향사하는 서원이다. 밀성 박 씨 정국군파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한다. 신남서원은 1822년에 후손인 박성기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의 공론을 모아 창건하였다. 서원 내 사당을 상모사, 강당을 경보당이라 하며, 당시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응교 강세백이 지었다. 1994년 우리 손으로 네 번째 건조된 잠수함에 이 박위장군의 이름을 빌어 ‘박위함’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1868년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후손들은 서원 강당의 당호를 경보당으로 바꾸고 재실로 삼아 이곳에서 박위 장군을 주향, 박기를 배향으로 향사를 올렸다. 1981년에는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상모사를 이전대로 중건하였다. 서원의 배치는 사당인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을 설치하여 신역을 구분하였으며, 사당 밖에는 강당인 경보당이 있다. 경보당은 견치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삼 칸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형식이며, 대청 앞은 개방하고, 온돌 앞에는 두 짝의 띠살창이 달려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판정로 125-13

김해 산해정
역사관광경상남도

김해 산해정

김해 산해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다. 남명 조식의 경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해정의 ‘산해’는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광해군 1년(1609)에 강당과 사당을 갖춘 ‘신산서원’이 이곳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 철폐 정책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890년에 산해정이 다시 세워졌고, 1999년에는 사당인 숭도사가 복원되었다. 숭도사에는 남명 조식의 위패와 더불어 그와 교류했던 송계 신계성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산해정은 동부 경남의 유적 중 남명 조식과 관련한 유일한 유적이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정립되던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6

신암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신암서원

안군 가야읍 신음리에 있는 신암서원은 1780년(정조 4)에 안관(1491~1553) 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안관은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크게 통탄하고 벼슬길을 멀리하였다.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와 1521년(중종 16)의 신사무옥이 발생하자 1523년(중종 18)에 함안의 여항산에 은거하였다. 학문 탐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780년(정조 4)에 영남 사림에 의해 사와 서원 강당이 건립되었고, 1784년(정조 8)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23년(순조 23)에 강당을 이건 하고, 1850년(철종 원년) 중건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한동안 복원하지 못하다가 1990년 신암 서원 복원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어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유림과 후손의 지원으로 1993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서원은 신암재로 편액을 바꾸었다. 중앙은 마루 2칸이고, 동편 2칸과 서편 1칸은 방이다. 신암재 좌측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목조 와가 팔작지붕으로 신축한 신암서원이 있다. 경내에는 사우 및 별묘를 비롯하여 동재, 서재, 장판각, 외삼문 등이 있다. 신암서원 내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인 고려 후기 안축 근재집 목판 93매가 소장되어 있다. 향사일은 매년 3월 상정과 9월 상정이며, 순흥 안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암로 209

역사관광경상남도

예강서원

예강서원은 조선 후기의 부농주택으로 약 700평의 대지에 대문채, 사랑채, 안채, 가묘, 고방채와 기타 3동의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염수당은 예강서원이라는 편액이 달려있으며 정면 5칸, 측면 1칸에 전후퇴가 있고 우측부터 큰 사랑방, 작은 사랑방, 안마루, 중 문간, 중 사랑방으로 짜여 있다. 전퇴에는 툇마루, 후퇴에는 벽장 등의 수장 공간이 부설되어 있다. 작은 사랑방과 안마루 사이에는 세 짝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안마루 뒷벽은 판벽으로 하여 수장시설을 더했다. 큰 사랑방에도 중방위에 벽장을 시설 하였으며 배면에 안채로 통하는 외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사랑채 지붕은 초창기 낙동강변의 억새를 엮어 지붕을 잇는 샛집이었으나 1971년 봄에 평기와집으로 고쳤다고 한다. 창호의 형식과 가구수법, 부재규격에 근대 한옥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가묘는 단칸의 맞배집으로 별도의 4대 선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진례로311번길 107

예동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예동서원

오랫동안 남계서원(藍溪書院)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에 예동서원으로 바꾸었다. 학덕높고 절의의 큰 선비 표연말(表沿沫)을 추모향사하는 서원이다. 서원에는 경모당(景慕堂), 숭보사(崇報祠)와 기적비가 있다. 남계 표연말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가 남계(濫溪)로 1431년에 출생했고, 1498년 서거했다. 성종때 문과에 급제한 뒤 부제학, 이조참판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고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때 신원됨과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된 학덕높은 큰 선비였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 정여창등과 함께 문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묘소는 경북 상주에 있다.함양의 구천서원(龜川書院), 남계서원(濫溪書院)과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서 표연말을 향사하였고 마장리에는 경모당과 숭보사와 기적비가 세워졌으며 예동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다.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마장로 226-14

예림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예림서원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에 위치한 예림서원은 조선 전기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지은 서원으로 1567년 조선 명종 때 짓고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06년에 다시 지었다. 본래는 명종 1567년 당시 부사 이 경우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 아래 영원사 옛터인 덕성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이라고 했다. 1635년에는 상남면 예림리로 옮겼으며, 이름을 예림서원으로 바꾸고, 박한주와 신계성을 더하여 모셨으며, 16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건물의 구조는 교육공간은 앞에, 제사 공간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사당인 육덕사와 유생들의 모임 및 학문을 닦는 곳인 강당, 생활공간인 돈선재와 직방재, 그리고 전사청, 독서루 등이 남아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예림서원로 128

오례사
역사관광경상남도

오례사

백촌 김문기(1399∼1456)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이를 계승하고자 세운 곳이다. 김문기 선생은 세종 8년(1426)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한 사건으로 희생당하였다. 그 뒤 영조 7년(1731) 복관 되고, 영조 33년(1757)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오례사는 선생의 후손이 1870년에 세웠으며, 1994년에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외삼문, 추원재, 내삼문, 사당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추원재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출처: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오례길 127-3

오봉서원(밀양)
역사관광경상남도

오봉서원(밀양)

오봉서원은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이다. 조광익과 조치우를 제향하며, 지역 유자를 양성하고 수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780년 조광익의 후손들이 조광익을 독향 하기 위하여 오봉사로 창건하였다. 1790년 취원당의 증조할아버지 조치우의 병향이 윤허되어 청효사로 개칭하였고, 1796년 경상남도 밀양의 사림이 춘추 사향을 청원하여 오봉서원으로 승호 하였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편액을 오봉서당으로 고쳤다.

경남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옥계서원(합천)
역사관광경상남도

옥계서원(합천)

옥계서원은 율곡 이이의 유물인 「격몽요결」과 「해동연원록」 등을 소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다. 옥계서원은 영조 3년(1725)에 지금 있는 자리에서 4㎞ 정도 떨어진 향옥동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고종 6년(1867)에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 소원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등이 있다. 강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소원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서부로 3078-13

옥산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옥산서원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715년(숙종 41) 연일정씨 후손들이 시조인 정습명과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6명의 선조에게 향사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세덕사를 지었다. 그 후 1830년(순조 30)에 서원으로 바꾸면서 정몽주의 위패만 모시고 봄·가을에 향사를 올렸다. 정몽주가 1374년(공민왕 23)에 이곳 비봉루에서 하루를 묵은 인연으로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 사림들과 그 자손들이 예조에 주청하여 옥산서원을 진주 비봉산 비봉루에 세웠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 자리에 영당을 지어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서원을 복원하고, 사당을 신축하여 문충사라 이름 짓고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옥산서원길 61-7

옥전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옥전서원

초계 정씨의 시조인 정배걸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배걸은 고려 전기의 학자로 고려 현종 8년(1017)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던 분이다. 옥전서원을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철종 12년(1861)과 1981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로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두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양 옆 지붕 아래에는 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을 달았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황강옥전로 1510-60

완계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완계서원

완계서원은 1614년(광해군 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선 중기 문신인 동계 권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세운 서원이다. 1788년(정조 12)에 완계서원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권극량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6년(고종3년)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가 1874년(고종11년) 강당을 중건하였고 이후 대문과 동재, 서재 내삼문, 사당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원의 건물배치 형태가 잘 살아있어 교육적, 역사적 자료로 활용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신등가회로114번길 61

용산서원(밀양)
역사관광경상남도

용산서원(밀양)

밀양 용산서원은 조선 선조 시기에 나주와 광주목사, 그리고 영흥과 밀양의 도호부사를 지낸 경북 성주 출신의 이계 김우홍 선생의 충절과 애민사상을 기리고 제향 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이 서원은 원래 1950년경 의성김씨 이계공파 소유의 토지 위에 창건된 서당에서 비롯되었으며, 후손들과 고을 백성 자제들에게 사설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화기를 맞아 서당은 점차 그 기능을 잃고 폐당되었다. 이후 용산서원은 의성김씨 이계공파 문중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바뀌었고 마을 주민들이 모여 중요한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용안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용안서원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에 자리 잡고 있는 용안서원은 조선 순조 13년(1813)에 별사를 창건하여 문안공 산화 이견간(李堅幹)과 성산군 이식(李軾)을 봉안한 서원이다. 순조 18년(1818)에 장소와 건물이 협소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용안사라고 편액 하였다. 1870년에 훼철된 후 용안재(龍安齋)로 개액(改額)하였으며, 1922년부터 설단(設壇)하여 여은 이사지(李思之)와 대호군 이중림(李中林)을 추가로 봉안하고 향사하였다. 1983년에 용안사 옛터에 사우를 중건하고 재사를 중수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용안서원은 강당과 시습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5량가이다. 시습재는 강당 오른편에 직각으로 꺾여 배치되어 있으며, 동재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면 1칸이며 북측 2칸은 방, 남측 2칸은 대청으로 누마루형식이며 맞배지붕이다. 사당인 용안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계 3량가 맞배지붕이다. 용안서원 내 강당과 시습재, 용안사에는 모두 툇칸이 없고, 기둥은 강한 민흘림이 보이고 있어 고식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강단 전면 기단이 견치석 쌓기로 개변되어 있었는데, 이후 강당의 전면 기단 및 좌우 측면 및 배면의 기단을 모두 헐어내고, 자연스럽게 방형으로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막힌 줄눈 형태로 쌓았다. 용안서원은 조선시대 후기 건축사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된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내진1길 39-18

용암서원(합천)
역사관광경상남도

용암서원(합천)

용강서원은 합천 삼가 인근의 유림이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을 존모 하여 향사하면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남명 선생은 경과 의를 학문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힘써 익혀 아는 것은 반드시 실천하기를 강조하였으며, 현실 정치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는 눈을 가졌다. 출처를 선비의 가장 큰 절개라고 생각하였던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었다. 용강서원의 전신은 1576년에 노흠, 송희창 등이 의논하여 삼가현의 서쪽 회현 아래 가회면 장대리에 세원 회산서원이다. 이 서원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에 향강, 즉 황강 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어 1605년 8월에 남명 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었다. 용강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2000년에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서원의 건물로는 사당 숭도사와 전사청, 강당 거경단, 동재 한사재, 서재 존성재, 내외의 삼문으로 지숙문과 집의문이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 72-5

용원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용원서원

용원서원은 임진왜란 때 향토 의병장이자 문인인 모계 문위 선생(1554~1631)을 제향 하는 사당이며, 그 뒤 변창후 선생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서원이 복원되고 이어서 1991년에 사당을 복원하였다. 문위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거창에서 의병 활동에 나섰으며, 선무 원종공신 3등의 서훈을 받았다. 유성룡 선생 등의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문위 선생이 타계하자, 마을 사림들이 1686년(숙종 12)에 용원서원을 세워 제향해 왔다. 용원서원은 대문채와 강당, 사당, 아래채 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와 강당, 사당을 동일 축 선상에 배치하고, 강당의 우측으로 아래채를 두었다. 강당의 좌측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어인길 41

우계당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우계당서원

조선 전기 유림들이 학문 교육을 위한 서원으로 세웠으나 지금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쓰고 있다. 앞면 6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과 좌우 옆면에 툇마루를 놓고 난간을 두어 누각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대들보를 통째로 사용하여 견고하고, 좌우의 온돌방에는 아궁이를 두어 굴뚝을 기단면으로 나오게 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친환경로3612번길 108

운강서원
역사관광경상남도

운강서원

고려의 문신인 하공진 선생과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윤 선생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산이 평지와 만나는 끝자락의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경인사, 강당, 외삼문을 남북 축 선상에 일렬로 배치하고, 강당 오른쪽 뒤편에 경충문을 배치하였다. 앞은 교육시설인 강당을 뒤에는 제향 시설인 사당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하였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에만 퇴를 둔 전퇴집이다. 실의 배열은 전면 반 칸을 뒤로 물려 내루를 마련한 방-방-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외벌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전면에만 원형 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방형 기둥을 사용한 홑처마 팔작 민도리집으로 슬레이트로 지붕을 마감하였다. 경인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측면으로 보아 앞쪽 한 칸은 개방된 툇간을 이루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금곡로 197-24

운구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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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서원

운구서원은 1786년(정조 10)에 주변 유림의 건의에 의하여 고려말에 소윤을 역임한 홍재 선생의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은둔한 곳인 운구대 곁에 운구서원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에 홍재, 이오, 조열 선생을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3년에 홍재의 후손인 홍승부 등이 중심이 되어 문중의 뜻을 모아 선조가 은거하였던 두심동에 건물을 지어 운구서당이라 하였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두심1길 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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