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20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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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곡서원
효곡서원은 김충(1513~1572), 송량(1534~1618), 고인계(1594~1647), 김광두(1562~1608)를 제향 한 서원이다. 김충은 1515년(명종 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주관,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송량은 성운(1497~1579)의 문인으로 헌릉참봉, 한성참군 등을 역임하였으며,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을 창건하고 학규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고인계는 북인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였다가 영서도찰방으로 좌천된 이후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김광두는 임진왜란 때 정경세, 이전, 이준 등과 함께 창의 하여 왜군을 격퇴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을 설립하는 데 동참하였다. 효곡서원은 1685년(숙종 11) 송량을 배향한 세덕사로 출발하였다. 1724년(경종 4) 세덕사의 지세가 좁고 불편하여 공성면 각회산 아래로 이건 하였다. 1735년(영조 11) 김충과 고인계를 추배 하여 서원으로 승원 하였다. 1780년(정조 4) 각회산 아래에 있던 서원을 절동으로 이건 하였고, 1786년(정조 10) 김광두를 추배 하였다. 1870년(고종 7) 효곡서원은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1902년 유림의 공의로 단소를 설치하여 단향을 봉행하였다. 이후 1931년 효곡서원을 복원하자는 상주 유림의 공론이 취합되어 본래 자리에서 서북쪽로 약간 옮겨서 강당을 건립하였다. 1968년 비로소 묘우를 중건하여 단향을 폐지하고 복원 고유제를 봉행하였다.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2길 51-23
후산정사
후산정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이황의 제자인 김사원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1749년에 지어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강당과 대문을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후산정사는 대문채, 사당, 주사, 문간채 등을 갖추고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점곡길 15-8

훈령서원
훈령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고려 시대 문신 박양무의 절의와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계은, 박맹문, 박란 등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으나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서당으로 보존되다가 1998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산형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이 자리 잡고 있고 강당의 우측 전면에는 4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동재와 3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인 숭절사를 배치하였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길 110-27

가호서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함북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하였다가 1970년에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와 후손들의 협찬에 의해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그 후에 서원 내에 정문부 장군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었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1590년 사헌부 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장덕산 전투, 쌍포 전투, 백탑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 지방을 수복하였다. 시화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했으나 후에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서원에는 가호서원, 충의사, 유물전시관, 보조묘, 장판각, 북관대첩비, 농포정문부사적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갈천서원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인 문정공 행촌 이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이암 선생(1297~1364)은 고려 충선왕 5년(1313)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워졌으며,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고, 사우에는 행촌 이암, 묵제 여필, 관포 어득강, 도촌 이숭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3량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가운데 1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 1칸을 두고 우측 방 앞에 누마루가 있다. 정문인 불사문은 앞면 5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대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갈천로 620

경백사
경백사는 1926년 신숭겸의 후손인 신상, 신항, 신건 등 3명이 협력해서 세운 사당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과 그의 후손이자 고려 후기 학자인 신현, 성리학자인 문정공 이색, 그리고 벼슬을 탐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 원천석 등 4명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당 안에는 경백서원, 이양재, 영수정, 내삼문, 경백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경백사에는 신숭겸의 영정을 모시고 있고, 해마다 3월에 평산 신씨 문중과 지방의 유학자들이 제사를 지낸다.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온정2길 42
관산서당
창녕 관산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로 전면의 반칸을 퇴칸으로 한 축조한 형식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우측방의 전면 툇마루는 한단 올려 대청과 높이가 다르게 시설하였다. 방의 창호는 모두 세살문을 사용하고 있다. 좌측방에는 두 짝, 우측방에는 외짝의 세살문을 달았고 대청의 뒷벽에는 판장문을 달아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소박한 형태이다. 3량 가구 형식으로 중앙부에 대들보를 걸고 전면의 퇴칸에는 퇴보를 걸어 연결하였으며 큰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박공지붕 형식이다. 건립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19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칸의 사용이나 간결한 가구기법 및 장식적 기법 등 조선후기 건축양식과 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무엇보다 창녕지역에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월미상월길 115

광제서원
남양 홍씨 홍의와 홍관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홍의(?~1356)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무신이고, 홍관(?~1126)은 문신이며, 서예가로 예부상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세울 당시에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던 홍복사로 세웠다가, 영조 23년(1747) 홍지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홍지암 상량문에 의하면 1891년 중수한 기록과 함께 모원재로 개칭되면서, 남양 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1976년 영남 유림에서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매년 음력 3월 10일 고려 은청광록대부상서 홍의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사공상서보문각태학사 홍관, 양위에게 춘향을 올리고 있다. 건물 6동 모두가 각각 특색 있는 건축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려 초기 건축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로 보여 보존 가치가 높다. 광제서원은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고, 경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광제서원에 들어서는 진입로의 입구에는 남양 홍씨 인물 중 이 지역에 임관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비가 세워져 있어 광제서원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로685번길 116
광천서원
광천서원은 안명하 선생(1682~1752)의 제향을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안명하 선생은 본관이 광주이고, 자가 국화이며, 호가 송와로 조선 단종 때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밀양 삽포리(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전거 한 안억수의 9 세손이다. 안명하 선생은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 연구하여 성리학과 예학의 경지가 높았으며, 대학자 이상정(1711~1781), 정만양(1664~1730)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송와집』, 『배운록』 등이 있다. 강당은 5칸이고 ‘광천서원(廣川書院)’이라는 편액이 있다. 사우는 ‘숭효사(崇孝祠)’로 3칸이다. 내삼문은 ‘상례문(尙禮門)’이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사포중앙1안길 7

구계서원(사천)
구계서원은 사천읍 구암리 만죽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학자인 구암 이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구암 이정은 중종 31년(1536) 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신이자 학자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후진양성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 서원은 선조 39년(1606)에 세웠으며, 광해군 3년(1611) 사당인 구산사를 세웠다. 숙종 2년(1676)에 ‘구계’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경종 3년(1723)에는 성옹 김덕함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며,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31년에 다시 세웠다. 서원 안에는 대관대, 사당,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으며,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두문로 361-17
구니서당
구니서당은 300여 년 전 김굉필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봉선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뒤 묘각이나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고종 3년(1866)에는 김굉필의 둘째인 김찰휘 언상공을 비롯한 4명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1916년 규모를 넓혀 지금의 정당을 중수하였고, 사현사는 1943년에 창건한 건물을 1986년부터 9년에 걸쳐 동·서재 및 문루와 함께 중창하였다. 경내에는 정당을 비롯하여 사당, 동재, 서재, 문루, 관리사 등이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창밀로 506-30

구암서원(창원)
구암서원은 1858년(철종 9)에 구연사라는 사당으로 창건되어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968년에 문중의 사업의 하나로 복원되었고 2004년에 서원의 재정비가 이루어져 추모재와 신여당이 새로 지어지며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구암서원의 배향 인물은 세종 때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한 문정공 정이오 선생(1347~1434)과 아들인 충장공 정분 선생(?~1454) 두 부자이다. 시설은 강당 4칸, 사우 3칸, 추모재 2칸, 유사실, 관리사, 정문 3칸 등이 있고 강당 전 면에는 구암 서원, 안쪽에는 구암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동재는 신여당, 서재는 추모재이고 강당을 중심으로 사우는 서쪽에 배치되어 서묘동학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북4길 7-10 (구암동)
구천서원(김해)
김해시 상동면에 있는 구천서원은 조선 중기 때 학자였던 가락국 시조왕의 후예 죽암 허경윤(1573~1646)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1822년(순조 22)에 지금의 외동인 거인리에 창건하였으나, 습지로 인하여 다음 해 왕후릉동편에 이건하여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례를 올리던 중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898년 유림과 후손들이 중산학계를 창설하여 이곳 애춘재에서 덕행을 기리며 학맥을 이어오다 1996년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상동로 274-12
구천서원(함양)
함양군 수동면 효리에 위치한 구천서원은 1701년(숙종 27년)에 창건하여 춘당 박맹지(朴孟智), 남계 표연말(表沿沫), 일로당 양관(梁灌), 금재 강한(姜漢), 구졸암 양희(梁喜), 우계 하맹보(河孟寶)를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으나, 후손들이 계를 모아 불망계라 하고 유허에 비를 세웠다. 1919년 구천재(현 서원의 우측 동산)를 지어 매년 작헌례를 행하여 오다가 1984년에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두 번째 정일에 지낸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효리길 30-17

국산서원
행촌 이암(1297∼1364)의 8세손인 방촌 이당(1567∼1644)을 제향하기 위해 1980년에 고성이씨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이당은 원래 청주 구계서원에 동고 이준경, 낙재 서사원, 수암 박지화, 서계 이득윤 등과 함께 제향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고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해면 외곡리에 국일사를 창건하여 제향하였다. 후에 건물이 낡고 기울어져 후손 이경철과 이원수가 주관하여 1980년에 새로 중건하였는데, 이전에 비하여 규모가 더욱 커졌다. 서원의 규모는 강당 4칸, 사당 3칸, 문랑 3칸과 포사 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사당인 경의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외곡1길 151-44
기강서원
기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 이운용(1562~1610)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장군의 묘소는 원래 고향인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으나, 인조 8년(1630년) 장자인 이엄(평택 현감)이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산 30-1로 이장하였다. 이에 경남지역 유림에서는 장군의 묘소 앞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합의하고 정재를 모아 1950년 4월 통영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열사 앞에 이운용의 기적비를 세웠다. 서원 건립은 6.25 전쟁으로 지연되었다가 1959년 방후손, 이기환이 유림과 상의하여 식성군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기강서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백낙준 참의원의장, 장면 국무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 등 삼부 요인을 비롯한 저명인사의 거국적인 의연금이 답지하였고, 경남지사 이중헌과 교육감 이윤근 등의 주도하에 원활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져 서원이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기양서원
기양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주세곤, 주선원, 주각, 주재성, 주도복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 창건되었다. 기양서원 인근 주재성의 생가에는 무기연당이라는 조선후기 연못이 아직 남아 있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로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기양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현재의 무기연당 내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풍욕루, 창정각, 충효사, 하환정이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1길 33
남강서원(양산)
남강서원은 죽재 이겸수공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관민의 염원으로 1783년(정조 7년)에 남강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1868년(고종 5년)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남강서원으로 승호 되어 후학양성이 활발하고, 사림유생들의 강학논경이 빈번하였던 곳이다. 1871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2005년에 복원을 발의하고, 2006년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균관으로부터 남강서원 복원에 대한 승인과 문헌적 고증을 받아 2008년에 좋은 날을 잡아 기공하여, 2009년에 완공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매월 15일에 분향례와 매년 봄 향례가 서원에 있는 충열사에서 향도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봉행하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용주로 300
남강서원(함안)
고려시대 함안 출신의 장군인 충열공 이방실(1298~1362) 장군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이방실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1842년(헌종 8) 후손들이 남강사를 건립하여 매년 제를 지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후손들이 1944년 옛터에 복원하였다. 그 후 1998년 정부 보조금으로 충렬사와 남강서원을 중건하여 현재까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남강 서원은 사우인 충렬사, 강당, 동·서재(경모당·영덕당), 외삼문인 숭의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 와가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서원 뒤편에는 이방실 장군을 배향하는 충렬사가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장군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 밖에는 ‘고려 대원수 중서평장사 충렬 이공 유허비’가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5일에 향사하고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5길 82

남계서원(밀양)
청도면 두곡리 쌍수당 경내에 있는 남계서원은 1704년(숙종 30)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지낸 김지대의 충효쌍수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김지대(1190∼1266)는 고려 고종 때 문신으로 청도 김씨의 시조이다.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침입하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가 싸워 충과 효를 동시에 이루기도 하였다. 처음에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헌공이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면서 지은 시에 ‘국충신지환 친우자소우 충효가쌍수[國忠臣之患 親憂子所憂 忠孝可雙修]’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그 후 남계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나, 자손들이 강당을 보수하며 내려오다가 1907년(순종 1)에 와서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강당을 지었다. 1954년도에 후손들이 다시 대대적으로 출연하여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하였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하는 남계서원은 사당인 충효사 우측에 강당이 놓인 좌묘우학의 배치형태로, 제향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후기의 사우형 서원에 속한다. 강당 앞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며 배치되고, 그 앞쪽에 소슬대문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상부구조는 5량가이며, 정면만 소로를 사용하여 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3칸의 작은 건물이다. 충효사는 영헌공 김지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쌍수당 우측에 위치한다. 1987년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익공계 건물로 익공 위에 봉두를 조각했다. 기둥에는 주칠을 했으며 기둥 상부와 창방․도리․보 등에 모로단청을 베풀었다. 충효사는 내삼문인 대보문을 통해 출입한다.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3길 43-16

대각서원
대각서원은 1610년(광해군 2) 지방 유림의 공의로 하항, 손천우, 김대명, 하응도, 이정, 유종지, 하수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47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각서원은 본당 건물과 동재, 서재, 그리고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고 본당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후 툇집 형식이며 정면의 기둥은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으로 단면의 크기도 크고 훤칠하다. 가구는 5량 구조로 장식이 잘되어 있다. 양 툇간에는 퇴보를 걸었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다. 서원으로서 전체적인 배치가 무난하며 부재의 사용이나 적절한 비례의 적용, 그리고 동재의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법 등 조선 후기 건축의 여러 기법을 볼 수가 있어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서원 담장도 흙 돌담으로 축조기법이 돋보이며 일반 한옥의 담장보다 높이가 높다. 처음에는 각재 하항을 모시기 위한 대각사를 지었다가 그 뒤에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등 6분의 선현을 추가로 배향하여 현재 7위를 배향하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각길 104-21
대포서원
고려의 충신인 민안부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대포서원은 1693년(숙종 19)에 유림들이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뒤 1874년(고종 11) 유림과 후손들이 숭절사, 숭의재, 동재 · 서재 등을 고쳐 세웠다. 민안부는 고려 공양왕(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를 지냈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후에 산음현의 대포리로 내려와 은둔하여 살며 고려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켰다. 대포서원 인근에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으며, 한의학의 고장 산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산청 동의보감촌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명지대포로236번길 183
덕곡서원
의령읍 하리에 위치하고 있는 덕곡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백운동서원을 ‘소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여 퇴계 학파를 형성해 왔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덕곡서원은 효종 5년(1654)에 세웠고, 현종 원년(1660) 나라에서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그 후 고종 39년(1902)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다시 1992년 사우각을 다시 지었다.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퇴계 선생이 의령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선생의 장인인 허찬 진사가 30여 년간 경북 영천군 초곡동(영주시 문정동)에서 우거 하다가 출생고향인 가례촌으로 낙향하면서 이곳 처가댁을 방문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생은 가례촌을 비롯한 인근의 함안, 진주 등지를 수차례 방문하고 지역 유림들과 학문적 교류와 강론을 하여 지방의 유학교육을 융성케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벽화로 629-12

덕산서원(고성)
덕산서원은 고성 IC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원으로 1979년 이학도 선생이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부지 3만 3,000㎡에 조성하였다. 덕산서원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서원 건물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덕산정, 팔각정, 관리사 등이 있다. 봄철 벚꽃 놀이를 비롯하여 사철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덕산서원 인근에는 고성마동호습지, 당항포만, 예진벌레잡이식물원 등 많은 관광지가 있는 곳이다.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두호2길 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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