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7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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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이상급 신도비
충주 이상급 신도비는 충주시 주덕읍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강공 이상급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이다. 이상급은 선조 39년(1606년)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 좌랑, 평안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인조반정 후 다시 단천 군수, 연안부사 등을 역임하고 병조 참지가 되어 군비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왕을 모시다가 강화도로 가던 중 적병에게 피살되었다. 사후에 이조판서의 벼슬로 추증되었고 순조 때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8각 석주형의 이 신도비는 숙종 40년(1714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비의 받침돌은 8면인데 6개 면에는 꽃무늬를, 마주 보는 두 면에는 동물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받침돌 윗면에는 큼직한 꽃잎을 새겼고 그 위에 8각 기둥형의 비신을 세웠다. 이 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비 몸체와 머리 부분인 이수는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이수의 앞, 뒷면으로는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비신이 8각형인 점에서 형태가 특이하고 조각 수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안음골길 53
충주 이수일 묘소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무공 이수일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6년(1583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선전관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밀양 목사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성주목사로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가 되어 반란군을 대파하였다. 그의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한 것으로 화강암으로 봉분의 아랫부분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동자석 한 쌍이 있고 오른쪽에는 김집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의 아래쪽에는 현종 8년(1667년)에 대리석으로 세운 신도비가 있으며 50m 떨어진 곳에 사당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충주시립박물관에 이수일 장군의 영정 및 정사 공신녹권을 소장하고 있다. 근처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충주호와 충주 박물관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충주 이수일 신도비
충주 이수일 신도비는 충주시 금가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수일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로 이수일의 묘소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이수일(1554∼1632)은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후 밀양부사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 격퇴에 공을 세웠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당시 반란군을 크게 무찔러 이겨 큰 공을 세웠다. 이 비의 받침과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만들고 몸체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받침은 웅장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거북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4,100여 자의 글자를 새긴 비를 만들어 올렸다. 머릿돌의 앞뒷면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새겼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420㎝, 비신 높이 243㎝, 비의 폭 97㎝, 비의 두께 27㎝이다.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이 비는 이경여가 글을 짓고 김좌명이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비문을 새겼다.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거북 받침돌의 형태가 미술사적 자료와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주변에는 이수일의 묘소와 사당인 충훈사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석교길 19
충주 고불선원 소조여래좌상
충주 고불선원 소조여래좌상은 충주시 신니면 선당리 고불 선원에 단독으로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양손을 일부 보수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특이하게 얼굴에 철분이 덮였으며, 몸체보다 큰 머리는 각이 있고 살이 찐 편이다. 머리카락은 구멍이 나 있는 정수리로 말려 올라간 모습이다. 미간 사이에 백호라는 부처님의 털을 상징하는 보석을 최근 삽입하였으며 부처의 손가락 부분은 최근에 보수되어 원래의 손 모양을 추정하기 어려우나, 왼손은 왼 무릎 위에 하늘을 향해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 무릎을 감싸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으며 U자형 깃으로 정면을 장식하고 있다. 불상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작은 불상 양식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충청도 북부지역에서 유행한 목조불상의 양식과 유사한 머리 부분의 모양, 입가의 엷은 미소, 법의의 주름 표현 양식은 불상의 제작 시기와 제작 장소를 알려준다. 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과 원래 장식물은 유실되었지만 고려 시대의 유행을 유추할 수 있는 불교 양식과 희귀한 자료만으로도 불상 연구에 미치는 가치가 크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그맣고 아담한 선원에 모셔져 있으며 불상 뒤쪽의 탱화가 인상적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선당길 192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은 충주시의 사찰 단호사 대웅전 앞뜰에 자리한 석탑이다. 단호사는 달래 강정원길 인근의 민가에 자리한 곳으로 산속이 아닌 평지에 자리한 사찰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약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며 1954년 단호사로 개칭하였다. 이곳에 있는 삼층 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인다. 1층 기단 위에 탑신부가 놓여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일부가 부서져 있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으며 4층 몸돌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5층 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부분 산 위에 놓여 있는데 이 탑은 평지에 놓여 있어 색다르다.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갖춘 안정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단호사에는 삼층석탑 외에도 불상 등 다양한 불교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충원대로 201
충주 문주리 석조여래좌상
충주 문주리 석조 여래 좌상은 충주시 대소원면의 탑동마을에 있는 석불 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주민들이 흙벽돌로 보호각을 만들어 봉안하고 관리도 하고 있다. 충주 문주리 석조 여래 좌상은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불상으로, 팔각 연화대좌와 광배가 함께 전한다. 그러나 석불과 광배는 대좌의 석질이 다르고, 조각 솜씨도 달라서 석불과 광배는 대략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으며, 얼굴에 비해 코는 크고 입은 작으며 눈은 반개한 모습이다. 양쪽 귀는 짧고 어깨는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인다. 법의는 편단우견인데 옷 주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게 처리하였으며 등 뒤에까지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는 하대석과 중대석만 남아 있고, 상대석은 깨어져서 스님이 기거하는 집에 방치되어 있다. 상대석의 연화문은 불상과 달리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기단석에는 안상이 조각되고 하대석에는 복련을 돌려서 표현하였다. 광배는 불상 뒤편에 따로 떨어져 있으며, 원형의 석조 광배로 두광에는 중심 원좌가 있고 주변에 연화문을 두른 원광이 있다. 신광에는 2줄의 선을 융기시켰는데 주변에 화염문의 흔적이 보인다. 불신의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고 조각이 소략하지만 대좌의 조각은 뛰어나다.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매현리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충주 봉황리 마애 불상군은 아름다운 비경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는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불상이다. 산비탈 두 곳의 커다란 암벽에 시기를 약간 달리하여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총 9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있다. 햇골산 기슭에 중턱 바위면 상부에는 불좌상 1구가 동쪽을 향해 양각되어 있고, 하부에는 넓은 바위에 한 줄로 불좌상 1구와 공양상, 반가상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삼국 시대의 불상으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부분에 걸쳐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마애 불상군을 보려면 철제로 만든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가파른 편이니 주의해서 올라야 하며 계단 위에서 보는 풍경 역시 아찔하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특히 더욱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보이며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역사적 바탕으로 조성되었다.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 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충주 석보군 묘소
석보군 이복생은 조선시대 정종의 9남으로 어머니는 해평 윤 씨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으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이라 일컬었다. 석보군은 형 수도군과 함께 부왕을 정성껏 봉양했다. 그는 검묵(儉默)을 생활신조로 삼았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검묵공자’라고 일컬었다. 석보군 묘소는 1447년 경기도 양주군 미아리에 조성하였으나 시가지 확장으로 인하여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로 이장하였다. 마을 인근의 낮은 언덕을 올라 산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묘역 입구에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인 신도비가 있다. 묘비 1점은 가첨석을 갖추었고, 1964년에 건립한 것이며, 장명등 1점을 제외한 기타 석물은 1990년경 묘소 정화사업을 시행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봉분은 높이 약 160㎝에 지름 450㎝이며 호석 12매를 둘렀는데 그 안에 12 지상을 양각하였다. 이장하여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왕실의 매장 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다래월2길 20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숭선사지 입구에 서 있는 당간지주이다. 숭선사는 954년에 건립되어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시대 국찰이다. 충주 신덕 저수지를 지나 문숭리로 들어서면 숭선마을회관 앞에 높다란 돌이 서 있는데 이것이 숭선사지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불화를 그린 깃발을 꽂은 장대를 지지하는 구조물로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원래는 동서로 나란히 섰던 당간지주로 2기였으나 현재 서쪽의 것만 남아있다. 동쪽 지주는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에 의해 마을 앞 교각의 자재로 사용되었다가 신덕저수지를 조성할 때 수몰되었다고 전해진다. 동쪽 지주를 자른 사람이 화를 입었기에 그나마 서쪽 지주가 보존되었다고 전한다. 지주의 높이는 420m로 숭선사의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지주가 위치한 곳부터 사찰의 초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당간지주의 한쪽은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지주는 당시 숭선사지의 규모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숭선길 56
충주 숭선사지
숭선사는 고려 광종 5년(954)에 광종이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마을 어귀에서 낮은 언덕을 오르면 산속에 숭선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절터 부근에서 숭선사라고 쓴 기와가 발견된 곳이다. 사원 배치는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양식으로 남문지, 탑지, 금당지, 영당지, 회랑지, 동문지 등의 건물지가 확연하며, 건물의 세부적인 유구는 건물 기단부의 화강암 석축 기단, 주초석, 적심석, 석축 배수로, 전돌 포장, 답도, 탑의 적심, 우물, 온돌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고려 시대의 건축 유적으로서의 보존이 필요하다. 출토된 유물은 숭선사(崇善寺)라고 쓴 기와, 금동 보살두, 동탁, 모정(기와 고정못), 분청사기장군, 청자완, 백자완, 귀면와, 치미, 용두, 와당 등으로 이들 유물은 대부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사지와 유물이 일치된다. 사지의 입구에는 당간지주(1기)가 있으며 민가도 몇 동 있어 마을 이름도 숭선마을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 시대의 사찰 유적으로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사료적 가치가 큰 곳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충주 신청리 지석묘
충주 신청리 지석묘(고인돌)는 충주의 신의실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다. 이 고인돌은 신의실마을에서는 거북바위라 부른다. 마을에는 2기의 거북바위가 있었는데, 여성을 상징하는 거북바위는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의 제방 공사 때 파괴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남성을 상징하는 거북바위라고 한다. 이 지석묘는 개석식 지석묘로 본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덮개돌 크기는 가로 4.82m, 세로 3.70m, 높이 1.25m이고 무게는 약 20t에 이른다. 덮개돌 윗면에 지름 약 3.5~10cm, 높이 약 1~3cm의 크고 작은 굼(性穴)이 141개 분포하고 있고 곱게 간 것이 확인되어 선사시대 큰돌문화와 매장 행위의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고인돌의 구멍에 물을 대어 보면서 물의 흐름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또한 구멍은 동네의 가구 수 또는 가족 수를 표현한 것이다. 지석묘 인근에는 철기시대에 쌓은 토성인 견학리 토성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겠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억정사지(億政寺址)에 전해오는 비(碑)로, 고려의 승려인 대지국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로, 몸돌 위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비몸돌의 네 면에는 해서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작품으로, 조형상으로는 간략한 형식이다. 비문에는 대지국사가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14세에 출가하고 공양왕 2년(1390)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대사의 인품과 학력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비문은 박의중이 짓고, 승려인 선진이 글씨를 썼으며, 혜공이 새겼다. 힘차고 굳센 필체로 짜임도 우수하다.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비석2길 35-21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은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마을 가운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원평리 석조 여래입상과 나란히 놓여 있다. 6세기 전반기인 신라 법흥왕 때 창건한 선조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곳 마을 이름은 미륵댕이로, 예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석탑에 네모꼴의 자연석 위에 기단을 조성하였고 기단의 남북 면석에 우주를 표현하였다. 기단 면에는 세발 향로와 우주가 표현되었고 1층 탑신에는 네 면에 사자상으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3단이며 추녀의 모습이 단아하고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3층 옥개석은 현재 없다. 1층 탑신 가운데에는 뒷발을 딛고 선 사자 모양이 양각되어 있고 기단부의 남북면 중앙에는 높이 60cm 크기의 세 발 향로를 양각하였다.이 석탑은 옥개석의 낙수면 전각의 경쾌함과 탑신의 단아함 등에서 볼 때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른 고려 시대의 뛰어난 석탑으로 기단 면석에 부조한 향로와 탑신에 사자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조식은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양식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충주 이시진 묘소
충주 이시진 묘소는 충주시 동량면에 있으며 그의 신도비 뒤쪽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시진(1578∼1633)은 조선 시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효자로서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이다. 이시진 묘소는 17세기 전반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주 이씨 임영대군 효자공파 6세손인 이시진 묘부터 13세손인 이명규 묘까지 조성되어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시진의 무덤은 평면 사다리꼴 형태이다. 부인 전주 황씨와 풍산 심씨를 합장하였다. 묘역은 5대에 걸친 직계 장손들의 묘소가 차례로 조성되어 있고 방계 후손들의 묘도 함께 있는데 능선부에서 약간 비켜 조성되어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1길 149-11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 탑비는 정토사 터에 있는 비석으로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법경대사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살았던 고승으로 가야산에서 입산수도하였으며 효공왕 10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각 사원을 순회 수도한 후 효공왕 16년에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와서 포교에 힘썼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국사로 추대하였고 63세의 나이에 입적하였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 탑비는 거대한 비석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귀부와 쌍룡을 조각한 이수를 얹어 놓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 초기의 석조미술 정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비는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비 받침에 새겨진 거북 조각이나 머릿돌의 용 조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앞면의 중앙에는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몸돌에는 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태조 26년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고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가 짓고 유명 서예가인 구족달이 글씨를 썼다. 함께 있어야 하는 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 법경대사 탑비는 수몰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84년도에 옮겨 세웠다. 길가 버스 정류장 앞에 자리하고 있고 벤치 등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충주 조동리 지석묘
충주 조동리 고인돌은 선사 시대 유적지가 있는 조동리의 지석묘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작은 돌이 큰 돌을 고이고 있다고 하여 괸 돌로 불리다 고인돌로 불리게 되었다.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 마을 중간에 작은 공터에 자리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동량면 조동리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대규모의 생활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선사유적박물관이 세워진 곳이다. 충주 조동리 고인돌도 이 유적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의 주변에 굄돌의 흔적이 더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이 일대에 고인돌이 여러 개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고 탑 모양의 고인돌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방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매우 특이한 구조이다. 덮개돌 위의 2층은 원래의 고인돌 축조 시기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보이며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특이한 외부 구조의 바둑판식 고인돌로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청동기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고인돌을 볼 수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일 정도로 오래된 선사유적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니 근처의 선사유적 박물관과 함께 둘러보면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충주 창룡사 다층 청석탑
충주 창룡사 다층 청석탑은 충주시 창룡사에 있는 석탑이다. 짙은 청색을 띤 청석으로 만들어서 청석탑이라고도 하며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청석탑은 우리나라에도 희귀한 탑으로 충주 지역에서는 창룡사 외에 찾아볼 수 없다. 넓은 잔디마당의 화강암 탑신석 위에 9층의 점판암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평면 정사각형이며 초층 및 2층 옥개석 하면에는 연판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그 이상은 각형 층급받침을 새기고 있다. 전체 높이가 115㎝로 작은 규모지만 공예품 같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지닌 탑이다. 창룡사는 금봉산 중턱에 있으며 임도가 잘 되어 있어 사찰 초입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산 남쪽 기슭에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창룡사가 있고 산 정상 부근에는 충주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창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어 역사를 알려주는데 그중 하나가 창룡사 다층 청석탑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고든골길 63-89
충주 청룡사 위전비
충주 청룡사 위전비는 충주시 소태면에 있는 청룡사 옛 절터에 있는 비석이다. 청룡사지 입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사찰 중창과 경영에 필요한 전답을 누가 기증했는지 알리는 공시문 같은 비석으로 조선시대 숙종 18년(1692)에 제작된 위전비이다. 위전이란 사찰이나 관청, 학교 등의 경영에 필요한 토지를 말한다. 조선 초 보각국사 이후의 사실을 이 비의 내용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운 대표자는 통정대부 숭휘라고 되어 있다. 또한 몇 차례 걸쳐 추가로 기록된 부분도 있어 청룡사가 몇 차례에 걸쳐 보수,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는 전체 높이가 2m가 넘는 대형 사면비로, 받침돌은 거북 모양이고 머리 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된 점이 특이하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지붕돌을 올린 형태인데 지붕돌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사원 경제 분야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비석으로, 당시의 사찰 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근처에 여러 가지 불교 문화재가 남아있으며 새로 지은 청룡사가 불사를 이어가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
충주 강천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강천리 석조여래입상은 조선 시대의 석조 여래 입상이다. 이 석불은 불신이 네모난 평판석에 가까우며 옷 주름의 조각이 소략한 상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둥근 눈과 작은 코를 볼 수 있다. 원래는 인근의 산 중턱에 2기가 있었다고 하나 1기는 보이지 않고 1기만 잡초가 많은 수풀 속에 방치되어 있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돌로 쌓은 나지막한 축대 위에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두었다. 2기가 있었다면 사찰에 모신 불상이 아니라 당 신앙이나 풍수 비보 목적 또는 민간에서 미륵으로 모신 민불일 것이다. 강천리 서음마을 뒤쪽의 깊숙한 곳에 있으며 나무로 둘러싸인 길가에 있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곳이다. 서음마을 주변에는 기왓조각이 산재해 있으며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지만 고려 시대의 지방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강천리
충주 견학리 토성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철기시대의 작은 토성이다. 이 토성은 낮은 구릉 지역의 끝자락에 축조된 토축성으로 규모가 작은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현재 서쪽 성벽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이고 남벽과 북벽도 일부 무너졌다. 전체 둘레는 200미터가 약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의 높이는 대략 5미터 정도로 보인다. 발굴조사 시 출토된 유물로는 목 부분에 물결무늬가 시문된 것과 편병, 어골문 기와 등이며 출토유물 대부분은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고, 10세기를 중심으로 한 신라 후기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곳은 후삼국시대에 호적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가 고려 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현재 토성 내부는 농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견학리 토성은 규모가 크지 않아 일부러 찾아오기보다는 근처를 여행하는 길에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토성의 성벽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길가에서 1분이면 올 수 있어 접근성이 좋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
충주 김생사지
김생사지는 신라의 명필인 김생(711∼791)이 만년에 창건한 사찰터이다. 김생은 성덕왕 10년(711)에 가난하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였고 원성왕 7년(791) 80세까지 붓잡기를 쉬지 않았다. 이 사지는 주변에 장대석이 많고 석탑재와 기와조각, 도자기조각이 산재해 있어 이곳을 ‘와당밭’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와전류(瓦塼類)가 많이 출토되었다. 김생사지는 『수산집』의 김생사중수기(金生寺重修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북진애(北津崖)-예성(蘂城)의 북쪽나루- 즉 현 위치의 김생사에서 두타행(頭陀行)을 닦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수년 전까지 있었던 고와가(古瓦家)의 본체 용마루에서 ‘건륭을미(乾隆乙未-1775)’ 망와 4점과 ‘성상오십일년을미 충청도 충주’의 암기와가 발견되었다. 수습된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래까지 조선시대 고가터가 남아 있으며 1979년 당시 두 채의 건물이 ‘ㄷ’ 형태로 있었다. 절터의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쌓았다는 김생제방(金生堤防)이 있는데 이 제방은 강물에 의한 토량 침식을 예방, 사지의 평탄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쌓았던 것으로 40∼50cm 정도의 길이에 높이 3∼4m 규모로 남아 있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겨 자취를 찾기 힘들다.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김생로 325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충주시 수안보면의 고려 시대 석굴사원인 미륵대원지 내에 있는 석등이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기단부, 화사석,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기둥꼴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합각부는 약간 돌출시켜 치석함으로써 마루부처럼 보이도록 했다.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미륵대원지 사각 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 수법을 보인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며, 고려 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 수도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에 이런 양식의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는 소백산맥 계립령(하늘재) 북서쪽 자락 충주 미륵대원지 내에 보존된 석재 귀부이다. 귀부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이다. 이곳의 귀부는 현재 미륵리 사각 석등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옮기기 힘든 만큼 크기 때문에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 암반을 이용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외형상 거북의 머리와 몸을 하고 있고, 윗부분에 비석을 끼워 고정하는 홈이 있어서 이 절터의 사적비를 받치는 데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뒷부분 일부가 조각이 덜 된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전체적인 외형과 돌 다듬는 기법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지금도 귀부 외에 석등, 석불, 삼층석탑 등이 남아있다. 인근에 위치한 고갯길 계립령은 조령, 이화령보다 앞선 삼국시대에 개척되어 미륵대원지 등 이 고갯길을 이용한 고대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주변에는 계립령 외에 충주 미륵리 요지, 문경새재(조령), 미륵사지 오토캠핑장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충주 미륵리 오 층 석탑은 수안보 미륵사지 안에 있는 석탑이다. 이곳에는 고려 시대의 석불입상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석불을 위해서 석굴이 만들어졌던 자취가 있어 주목되고 있으며 그 앞면에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현재 기단 아랫부분이 파묻혀있어 그 구조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탑신부는 4 각형 중층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 윗돌이 올려져 있다. 덕이 높은 승려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세운 철제 찰간이 꼭대기에 남아있는 것이 희귀한 유례이다. 5단의 지붕돌 밑면 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이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 새김을 보아 고려 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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