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73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173페이지입니다.

대흥향교
향교는 공자와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대흥향교는 예산 예당저수지, 대흥슬로시티 인근에 위치한 향교이다. 이 향교는 1405년에 지금보다 북쪽에 처음 들어섰다가 1591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 및 보수와 시대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내부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수직사, 전교실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1997년에는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향교 앞에는 수령 500여 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중간 부분에서 느티나무가 자라 한 몸이 되었다. 주변에는 예당저수지, 대흥슬로시티 외에 의좋은형제공원, 봉수산, 봉수산수목원, 임존성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할 수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교촌향교길 88
영동 성장환 고택
영동 성장환 고택은 안채, 사랑채, 광채, 문간채, 일각대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를 포함하여 모두 20세기 초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광채만 18세기 정도로 추정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건물이다. 광채는 목조 초가지붕집으로 오른쪽의 한 칸만을 외부로 개방하여 헛간으로 쓰고 있을 뿐, 나머지 3칸은 판자벽을 두르고 마루를 깔아서 광으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수법과 구성은 대단히 오래된 기법이다. 안채는 광채의 왼쪽에 남북으로 위치하며, 뒤편 동산의 숲과 잘 이루어져 운치가 있다. 왼쪽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배열되었다. 사당은 부엌 오른쪽에 자리했다. 사랑채는 안채의 맞은편에 위치했는데 사랑방 2칸, 부엌, 부엌방으로 되어있다. 사랑방의 뒷벽은 처마 밑으로 내밀어져 벽장으로 사용된다. ※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음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미촌길 67-11

예산향교
예산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순조 9년(1809)에 크게 수리하였으며, 1975년과 1976년에 동재와 서재를 보수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대제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구릉지를 2단으로 정리한 다음 앞쪽에는 명륜당을 두고 뒤로 이어지면서 동서재가 U자형으로 배치되며, 그 뒤에 내 삼문이 있고 대성전 앞에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 1칸 열은 뒷칸이며, 공포는 외1출목 2익공(翼工) 형식이다. 가구는 1고주(高柱) 5량집(樑架) 구조에 정면만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내부는 벽을 두지 않는 통간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가구는 무고주(無高柱)5량집 구조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
음성 공산정 고택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마을에 있는 전통한옥인 음성 공산정 고택은 건축연대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안채의 상량문에 ‘檀君紀元後四二五七年(단군기원후사이오칠년) 甲子年(갑자년) 七月(칠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24년에 중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가 중수될 당시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一’ 자형의 사랑채가 배치되고, 사랑채 우측 끝부분에 행랑채를 덧대어 ‘ㄱ’ 자형을 이루고, 이곳에 대문을 설치하였으며, 안마당에 면해서 ‘ㄱ’ 자형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남향으로 자리하고 전체 구성은 튼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평면은 중부의 서해안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음성 지방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닌다. 안채는 정면의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건넌방이 있고, 왼쪽으로는 윗방 그리고 꺾이면서 안방과 부엌이 배열되어 있다. 건넌방 앞의 툇마루는 내루(內樓)와 같은 멋을 지니기 위해 높게 설치하였다. 이 가옥의 특징은 부엌 위로 함각을 만들어 그곳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까치구멍으로 한 점과 대문간을 사랑채 뒤의 측면으로 낸 점이다. 사랑채는 앞면이 집 밖으로 향하여 안채에서 보면 사랑채의 뒷면이 보인다. 왼쪽부터 부엌, 사랑방, 대청이 보이고, 꺾이면서 마루방과 대문간, 곳간이 있다.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의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음성서정우가옥(陰城徐廷禹家屋)’이었으나, 마을 뒷산이 ‘公’ 자처럼 되어있고 과거 정자와 정자나무가 있어 공산정이 마을로 불린 것을 반영하여 ‘음성 공산정 고가’로 지정명칭을 2007년 1월 29일에 변경하였다. ※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음
충청북도 음성군 영산로55번길 19-4

조병옥박사 생가지
이곳은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초가였던 생가가 이후 와가로 변형된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대지 550평에 안채 15평, 부속사 7평, 일자형 초가로 원형 복원하였다. 조병옥 박사는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한국 전쟁 때 내무부 장관, 이어 제3·4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960년 2월 15일 불의의 신병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그 공적을 길이 선양하고 후세에 본받을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249
운곡서원(음성)
운곡서원은 조선 선조 35년에 충주목사 정구(鄭逑)가 이미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를 모시고 백운서원(白雲書院)이라 하였으며 현종 2년에 정구를 배향하고 운곡서원이라 하였다. 숙종 2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이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원되었다가 고종 31년에 서원을 다시 지었다. 1963년 중수하였으며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동재와 서재를 재건하였다. 운곡서원의 공간 배치는 지세에 따라 남동향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교육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크게 나뉘는데 앞쪽 교육공간에는 강당과 동·서재를 두고 뒤편의 제사 공간에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전체적으로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당이 뒤쪽에 위치하는 전당후묘식(前堂後廟式)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청용로365번길 22
지천서원
지천서원은 생극평야를 바라보며 ‘부마팔현지(扶馬八賢址)’라 지칭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종 때 이조 참판을 지낸 십청헌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팔성산 아래 초옥을 짓고 산수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지천서원의 시초이다. 지천서원은 운곡서원과 함께 이지방 유림의 대표적 전당이 되어 왔다. 이 서원은 대원군 당시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단을 만들고 1906년 재건되었으며, 1963년 중수하였다. 팔성산을 배경으로 남동향을 하고 있는 이 서원은 배치기법상 산중턱의 높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3단으로 정지하고 있으며, 정지된 그 첫째 단에는 강당인 공자당(工字堂)이 위치하고, 그 좌측으로 정지된 둘째 단에는 솟을삼문을 배치하였다. 또 이 삼문을 지나면 높게 축조된 기단상에 사당을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사당을 중심으로 강당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좌묘우당식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1칸은 툇간이다. 공자당(工字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앞의 1칸은 툇간인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모현당(慕賢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마루방 천장 벽에는 중수기가 걸려 있다. 솟을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경모문(景慕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삼문 옆에는 ‘지천당묘정비(知川堂廟庭碑)’가 있다. 지천서원 입구에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가 있으며, 홍살문 서쪽 편으로 광해군 13년(1621년)에 세운 ‘현감김공의청백선정비(縣監金公疑淸白善政碑)’가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길 90-16
천안향교
천안향교는 태조 7년(1398)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그 뒤 선조 39년(1606)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전사고, 삼문, 풍화루 등이다. 명륜당은 효종 7년(1656) 지었는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천안향교의 담장 밖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탱자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탱자나무는 천안향교와 함께 오랜 세월을 함께한 고목으로, 천안향교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향교1길 89
직산향교
향교는 공자와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조선 전기 1588년(선조 21)에 세운 이 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다시 세워졌으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 성과 중국·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서적·노비를 지급받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로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1길 35-6

백리포해수욕장
서해안의 절경 중 바닷물이 맑고 모래가 제일 으뜸이다. 해변은 짧은 편으로, 인근 만리포와 천리포와 연결되어 있어 이곳을 백리포해수욕장으로 부른다. 만리포처럼 드넓음은 없고, 그렇다고 천리포와 같은 쓸쓸함도 없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해수욕장이 바로 백리포이다. 해변 양쪽에 절벽이 있는데 괌이나 사이판에 있는 유명한 절벽만큼 아름답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과 깨끗한 바다, 그리고 고운 모래가 일품인 이곳은 조용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다녀가기 좋다. 병풍처럼 펼쳐진 주변의 소나무 숲이 아름다우며, 인적이 드문 바닷가 해변에는 껍질이 예쁜 꽃 조개가 많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박약재
제천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진주 강 씨 문중에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건립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강 씨 후손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제천 지역의 유력 사족으로 성장했다. 제천 상풍마을 초입에 제천 박약재 안내판과 진주 강 씨 유허비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좌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박약재가 나온다. 전면에 일각문을 세우고 주위로 막돌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고 앞에는 가운데 섬을 둔 작은 연못을 조성하였다. 중앙은 대청마루가 있고 왼쪽에 방 2개, 오른쪽에 방 1개, 그리고 툇마루를 두고 있다. 현판문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인석의 친필이다. 1907년 강순조, 박정수, 이화중 등이 호서 의병장 운강 이강년의 전투사인 『운강창의일록』을 이곳에서 편찬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이지만 진주 강 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정묘호란 때 척화를 상소한 강유가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충청북도 제천시 중말16길 5-4

태안 목애당
태안 목애당은 조선 시대 태안군 관아의 동헌 건물로 고을의 수령이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 공적인 일을 하던 곳이다. 조선조 고종 8년(1904) 오병선 군수가 목애당이란 서문을 썼다. 백성을 잘 다스리고 사랑한다는 뜻의 목애당은 2벌대로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뿔형 주초석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워 평면을 구성하였다. 공포는 무출목 초익공계로 익공은 주두와 덧물려 외부로 돌출되었고 주초의 급단면은 직선으로 사절되어 있으며 내부는 량봉으로 되어 대량의 단부를 받치고 있는데 익공 끝을 길게 돌출시키지 않고 둥글게 마감하여 놓았다. 가구는 전방 토주와 후방 평주사이에 내고주를 세운 후 퇴량과 대량으로 결구한 일고주 오량집이며 홑처마 팔짝지붕으로 태안군 관아의 동헌 건물로 보인다. 오랫동안 태안군청의 민원실로 사용되면서 뒤편으로 건물을 새로 지었고, 내부도 많이 변경되었던 것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백화로 54

태안향교
1407년에 대장군 김중구가 사양동에 모옥으로 향교를 세우고 덕산에서 생원 최상운을 학사로 맞은 것이 향교의 시초이다. 처음에 초가이던 것을 세종 때 기와로 증·개축하였고, 1901년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삼문 등이 있다. 태안향교는 지금도 충효 교실을 개설하고 하계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사회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오늘의 향교가 사회교육 기관으로서의 각광을 받고 있다. 580여 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태안향교는 태안 교육사의 측면에서 볼 때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교육기관임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백화1길 7

망제동석불입상
망제동석불입상은 전라북도 정읍시 두승산의 지맥인 만제봉 중턱에 있는 석불로 대암석불이라고도 한다. 머리에는 마치 갓과 같은 테가 큰 모자를 쓰고 있어 유교적인 성격이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모습이며, 턱 밑에는 옷 주름이 있다. 손목 아래에는 세 줄의 평행선이 내려지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손끝은 위를 향하고 있다. 왼손은 마찬가지로 손바닥을 보이는데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얼굴 표현과 손 표현에 노력이 집중된 불상으로 민속적인 특색을 띠고 있다. 큰 부처로 한 덩이 돌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주변 관광지로 창동서원, 백운암 석불입상, 말목정과 감나무, 전봉준 선생 고택, 말목장터 유지비가 있어 연계 관광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망제동
도덕폭포
도덕폭포는 정읍 내장산에 있는 높이 20M의 폭포로 층층폭포라고도 부른다. 내장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로 들어가는 입구 추령에서 장군봉에 이르는 약 350m쯤 올라간 지점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물줄기는 가늘고 긴 편이며, 폭포 아래에 소가 형성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중종 34년(1539년) 내장산의 영은사 승려들이 도둑으로 돌변하여 민가를 다니며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분묘를 발굴하며 탁란을 자행하는 등 승적들의 행패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중 몇 사람이 이를 후회하고 폭포 아래에서 목욕재계하며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다가 도를 깨치고 도인이 된 사람이 있었다 하여 도덕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변에 도덕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폭포 주변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장마철에 물이 불으면 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다. 도덕폭포 상단으로 올라가면 5단 폭포가 있고 상단 폭포는 높이 45m로 내장산에서 제일 큰 폭포인데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노성궐리사
노성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궐리사라는 이름은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궐리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숙종 13년(1687) 우암 송시열이 궐리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숙종 42년(1716) 권상하, 김만준, 이건명 등의 제자가 현 위치에서 서쪽방향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궐리사를 세우고 다음 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정조 15년(1791)에는 송조 5현을 봉안하였고 순조 5년(1805)에 관찰사 박윤수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지금 있는 영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곳 외에도 강릉, 제천, 화성에도 궐리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과 화성에만 남아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길 35

박달재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고개를 박달재라 한다. 그 옛날 박달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개로 천등산뿐만 아니라 인근에 인등산과 지등산도 함께 있어 천지인이 모두 갖추어진 곳이다. 박달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박은 밝다, 크다, 하얗다, 높다, 성스럽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박달재와 다릿재를 넘으려면 걸어서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정이 그리워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슬픔에 시집가는 새색시가 눈물을 쏟는다고 해서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곳에는 박달재목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구경하며 산책을 즐기기 좋다. 공원 한쪽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목굴암과 오백나한상 전시관이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봉양읍 원박리

논산 노성산성
논산 노성산성은 백제 때 산 정상 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 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강경미내다리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미내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이 강을 ‘미내(渼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여 ‘미내다리’라고 부른다. 강경미내다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삼남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30m, 너비 2.8m, 높이 4.5m이다. 긴 돌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 모양을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다리의 강둑 쪽 중간쯤에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눈은 마치 장승의 눈과 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 모양과 갈기가 있다.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비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7년(1731) 주민의 필요에 따라 강경촌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하여 이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

전견훤묘(견훤왕릉)
전견훤묘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 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 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영괴대
영조가 온양의 온궁에 행차하였을 때, 함께 따라온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세자는 이를 기념하고자 온양군수 윤염에게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도록 하였고, 이후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지 19년만인 1795년에 온양군수 변위진과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에게 명하여 이곳에 대를 만들도록 하였다. 대의 옆에 공사가 끝난 후 그 간의 과정을 기록한 비를 함께 세웠는데, 앞면에 새긴 ‘영괴대비’라는 비의 명칭은 정조가 친히 써서 내려준 글씨이다. 1984년에는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

아산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헌정 사상 최초의 의원 내각제 하 대통령이다.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 호는 해위(海葦), 기독교 집안인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 씨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 이 씨 이재룡 씨의 장녀인 이범숙 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윤보선은 이후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약관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영국에서 옥스퍼드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다. 해방 후 서울시장 및 상공부장관을 맡으며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사사오입 등의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도모하자 야당들을 통합하여 민주당을 탄생시켰고, 야당인 민주당 소속으로 3, 4,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윤보선은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합동회의에서 내각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74년 정계를 은퇴하여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재야지도자가 되었다. 윤보선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는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84년 12월에 국가민속문화유산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3138㎡의 생가 터에 사랑채, 안채, 문간채, 행랑채 등의 구조로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었다고 하며, 주변은 해평 윤 씨 집성촌으로 현재는 전통가옥(윤일선가옥, 윤승구가옥, 윤제형가옥)들과 함께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다. 평생을 나라사랑과 민주화된 조국을 염원했던 윤보선 대통령의 일생은 불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에 대한 책임 등 그 정신적 바탕에는 아산이라는 지역정서가 크게 담겨 있으며, 둔포면 신항리는 우리나라 개화기 시대의 선각자들인 윤 씨 가문의 전통이 녹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
은행나무 두 그루의 나이는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숭모각 입구 우측에 위치한 은행나무는 높이 20m, 뿌리목 둘레 6.9m이며, 입구 좌측의 은행나무는 높이 19m, 뿌리목 둘레 5.4m이다. 임난수 은행나무에 관한 기록은 1674년 간행된 『부안임씨세보』의 부조사우도에 은행나무 한 쌍과 행정[杏亭]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충청도 공주목의 『공산지(1859)』 부조사우[不祧祠宇]와 『연기지(1934)』에도 은행나무에 관한 내용이 전해진다.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는 여러 문헌에 기록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암수 한 쌍으로 이루어진 노거수로, 기존에 단목으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구별된다. 유교 문화와 관련된 행단[杏壇]의 좌우 대칭으로 심는 전통 재식 방식과 전월산 자락의 숭모각과 조화를 이루는 경관도 뛰어나다. 현재까지도 부안 임씨 후손들이 매년 은행나무 목신제를 지내고 있어 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크며, 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

예산 용궁리 백송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인근에 위치한 예산 용궁리 백송은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주신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백송은 나이가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예산의 백송은 희귀하고 오래된 소나무로써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당시 사람들이 백송을 귀하게 여겼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 73-28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