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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167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167페이지입니다.

나폴리농원
문화관광경상남도

나폴리농원

통영 한려해상국립공원 내 미륵산 중턱에 위치한 나폴리농원은 편백나무와 피톤치드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 활동이 있는 힐링 여행지로 2005년 개원했다. 피톤치드가 쏟아져 나오는 편백숲길을 맨발로 걷는 맨발치유 자유체험이 대표 프로그램이다.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에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맨발 산책, 단체 숲 해설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편백숲 에어카페, 해먹 쉼터, 잔디밭 침대 등 다양한 코스를 즐기며 여행할 수 있으며, 다육이들이 살고 있는 열대 온실, 족욕 공간 등의 시설을 갖춘 힐링 농원으로 한국관광공사 웰니스여행지로 선정됐다. 나폴리농원에서 직접 연구·개발한 피톤치드 상품과 편백 묘목도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힐링을 경험하고 싶은 여행객들에게 추천하는 장소이다.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길 152

보문산마애여래좌상
역사관광대전광역시

보문산마애여래좌상

보문산 마애여래좌상은 복전암에서 보문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1㎞쯤 올라간 곳에 위치한 높이 약 6m의 바위 남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발바닥을 위로 향한 채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일명 ‘장수부처’라고 불린다. 윤곽은 자연 암반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나타내었으며, 내부는 정으로 쪼아내서 윤곽을 뚜렷하게 하였다. 선에는 부분적으로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옷은 양쪽 어깨에 모두 걸친 통견의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그 위에 얹었으나 마모가 심하여 손의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간략하게 처리하면서도 우수한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 5월 28일, 이러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창계숭절사
역사관광대전광역시

창계숭절사

창계숭절사는 조선 초기 세조 때 단종 복위를 시도한 취금헌 박팽년(1417~1456)과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 박심문(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곳이다. 창계숭절사는 1923년에 세운 사당으로, 숭고한 절의를 기리는 사당이라 하여 숭절사라 이름하였다. 1923년에 박심문의 후손들이 지역 사림들의 여론을 모아 세웠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기와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1989년 3월 18일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인근에는 뿌리공원, 대전오월드, 보문산 등이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 대둔산로137번길 67

역사관광대전광역시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나 8세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곳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북 청주로 이사를 하였다.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 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항일비밀단체인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191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57세 되던 해인 1936년 2월 21일 옥사하였다. 1992년 여름, 선생의 생가를 발굴 조사하고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선생의 생가를 초가집으로 복원하였으며 신채호의 동상도 설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에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무안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자연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무안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에 있는 팽나무와 개서어나무의 줄나무이다. 줄나무는 길가나 도로변에 줄처럼 길게 심어져 가로수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말하는데, 무안읍에서 목포 방향으로 국도변에 울창한 나무가 울타리처럼 마을 앞을 막아 주고 있다. 현재 나무는 노거수로 팽나무 66 그루와 개서어나무 20그루, 느티나무 3그루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이 나무의 정확한 식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500살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략 500년 전에 달성 배씨 입향조인 배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서해의 해풍이 불어와 집은 물론 농사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한 나그네가 지나가는 말로 마을 앞에 팽나무와 개서어나무를 심으면 될 것이라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00여 그루의 나무를 구해다 심었고, 이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바닷바람을 막아주자 자손도 늘고 마을도 번창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청천리의 줄나무는 서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도 하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백용성조사유허비
문화관광전북특별자치도

백용성조사유허비

장수의 5의 ‘五義’로 추앙받고 있는 백용성 조사의 유허비는 조사가 태어난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생가 입구에 있다. 이곳은 백용성 조사의 탄생 성지로 현재는 죽림정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의 유훈 실현과 가르침을 펼치는 국가 현충 시설이자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다. 유허비 옆의 죽림정사 경내에는 용성기념관과 용성교육관이 있다. 죽림정사 주변에는 장수물빛공원과 동화댐, 지지계곡, 봉화산 철쭉단지, 방화동 가족휴가촌, 뜬봉샘 생태공원과 같은 둘러 볼만한 곳도 많아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나 불자들의 성지 순례 코스로도 권장하는 지역이다. 백용성 조사는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이다. 대각회를 조직하고 대각사를 창건하여 실천 도장으로 삼았으며, 함양에 화과원을 만들어 선농일치 사상을 실천하면서 독립자금을 조성했다. 또한 기미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를 대표로 참가했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 31

함평 기각리 붉가시나무 자생북한지
자연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함평 기각리 붉가시나무 자생북한지

함평 기각리 붉가시나무 자생북한지는 우리나라 난대성 식물 중 붉가시나무의 자생북한계지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자생하는 붉가시나무는 부락 집 뒤에 울타리와 같이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8m, 수관의 너비가 5m 정도이다. 목재의 빛깔이 붉다는 뜻에서 붉가시나무라 불리게 되었으며, 재질이 단단하고 잘 쪼개지지 않아 가구나 선박 등을 만드는데 이용된다. 붉가시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난대성 늘푸른 넓은 잎나무의 난대성식물로 추위에 약해서 주로 산기슭과 계곡의 양지에서 자란다. 제주도와 남쪽 해안지방에 주로 분포하지만, 육지에서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함평군 대동면이 붉가시나무가 자라는 북쪽 한계선이 되기 때문에 식물분포학상 보존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무안향교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향교

무안향교는 1394년 무안읍성의 남쪽에 있는 공수산(현재의 남산)에 세웠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성종 1년(1470)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 파손된 것을 숙종 15년(1689)에 고쳤으며, 그 뒤 정조 13년(1789), 순조 20년(1820), 고종 29년(1892), 광무 6년(1902) 등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무안향교에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점차적으로 지어진 것이며,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과 중국 4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인되어 있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군 무안읍 향교길 20

무열사(나주)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열사(나주)

조선 정조 21년(1797)에 무열공 배현경, 금헌 배정지, 정절공 배극렴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 무열사다. 배현경은 고려 태조 때 무신으로 경주 사람이다. 궁예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했고, 이에 일등공신에 올랐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역할을 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의 시호가 무열이다. 배정지는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10세에 금위에 들어가 도지가 되었다.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원제로부터 용사라는 칭찬을 받고 백금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배극렴은 고려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고려 우왕 2년(1376)에는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1378년 욕지도에서 왜구를 대파하였다. 무열사는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헐렸으나 뒷날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다시면 무숙로 637-31

고흥 무열사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 무열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용강사는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건립되어 진무성 장군 외 3인이 제향 되었으나, 고종 5년(1868) 사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당한 후 복원하여 무열사라 하였다. 4.5㎞ 거리에 운암산이 있으며, 운암산 중턱의 수도암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군 두원면 동신안길 21-6

보산정사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산정사

보산정사는 조선 중종 때부터 선조 대 사이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8분의 선비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과 초동팔문관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한 장소인 보산정사와 동재, 서재, 고직사로 구성되어 있다. 초동은 나주의 대표적인 마을로 초동 8현으로 일컫는 문과 합격자를 잇따라 배출한 곳으로 초동팔문관은 이들 8명을 말한다. 보산정사는 사당보다 크고 오래된 누각 건물로 강당 형식을 하고 있어 그 예가 희귀하다. 사당에는 초동8문관으로 불리는 죽담 이유근, 야우 장이길, 창주 정상, 한천 유주, 삼주 최희열, 금애 이언상, 남호 류은, 사촌 최사물 등이 배향되었다. 이곳에서 남전향약을 본떠 향약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대동계가 이어져 온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다시면 무숙로 647-6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
자연관광울산광역시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

귀신고래는 해안가에 가깝게 사는 고래로, 암초가 많은 곳에서 귀신같이 출몰한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극경 또는 쇠고래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동해안에 나타나는 귀신고래의 무리는 겨울에는 한반도와 일본 앞바다에서 번식하고 여름에는 먹이를 찾아 오호츠크해 북단으로 이동한다.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은 고래 사냥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에 속한다. 귀신고래는 멸종 위기에 처한 국제적 보호 대상 동물로 이를 보호하고자 울산 부근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인근 회유 해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울산 정자항에서 북방파제등대(귀신고래등대)를 만나 볼 수 있고 고래생태체험관에서 귀신고래 회유해면 문화재 표시석 등 역사기록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48 (매암동)

봉황대(장수)
자연관광전북특별자치도

봉황대(장수)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의 송탄천이 합류하여 물줄기를 따라 가면, 주변에 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자리 잡은 신기마을이 있고, 강 건너편에 수 백길 기암괴석으로 된 암벽이 나란히 하늘로 치솟아 있다. 이곳을 봉황대 형제 바위라 한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겸암 유운룡 선생이 천하의 경승이라고 찬미했다는 곳이다. 아득한 옛날 두 바위 형제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밤에만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그런데 두 바위는 천 길을 먼저 크면 서울의 주봉이 된다고 믿고 다투어 커갔다 한다. 어느 날 앞으로 백일만 더 크면 천 길을 커서 이곳이 서울이 된다는 뿌듯한 희망을 안고 밤으로만 우뚝 솟아올랐다 하며, 백 일째 되는 마지막 날 밤, 이 밤만 새우면 다 큰다는 생각으로 두 바위 형제는 열심히 커 가고 있는데 이 마을에 사는 젊은 아낙이 이른 새벽 우물에 물 길러 나오다가 무럭무럭 크고 있는 바위를 보고 '어머나! 저 바위가 크고 있네!' 하고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두 바위 형제는 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뒤 하늘에서는 조금만 더 크면 이룰 소원을, 막바지에 좌절된 형제바위를 안타까이 여기고 봉황을 날려 보내서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형제 바위를 위로하며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천천면 봉황대길 2

금강사(강진)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금강사(강진)

금강사는 이순신 장군을 추향하고, 강진 출신 증병조판서 김억추 장군을 배향한 사우다. 사우 뒤편으로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등 비교적 경관이 양호하다. 1800년(정조 24년) 도내 유림들의 발의로 강진현 금강촌에 금강사를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공이 많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현무공 김억추(1548∼1618) 장군을 향사하였다. 이 사우에 이순신 장군을 주정으로 모시고 김억추를 배정한 것은 김억추가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영사가 되어 이순신을 도와 명량대첩을 성공하는 등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당과 강당 그리고 재명당, 동재,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구성된 금강사는 사당과 강당이 약 45m의 거리를 두고 동서 쪽에 별도로 위치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이밖에 도유실, 고직사, 내삼문 등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내삼문 앞 마당에는 좌측 충무공 이순신과 우측 현무공 김억추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이순신 동상 앞에는 사적비가 있고 그 옆 원사 건립에 관한 내력비가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강진읍 효자길 38-24

강진향교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향교

강진향교의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윤탁이 대성전에 은행나무를 심도록 권장하였다는 기록과 현재의 은행나무 나이를 짐작하여 조선 전기인 1400년대로 추정된다. 강진향교 역시 다른 건물과 같이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이 지역출신 입방자들이 의금을 내고 군수 정인의 도움을 받아 사마재를 건립하였고, 그 후 1675년에 본격적으로 향교를 건립하였다. 1858년에는 군수 심의찬이 향교를 중수, 1901년과 1919년에는 대성전을 중수, 1935년에 명륜당을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동재, 서재, 명륜당 등이 있다.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공간을 두고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 송조 4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좌측에는 수령 약 400년 된 은행목이 한 그루 있으며, 대성전에 들어가는 협문이 좌우에 있다. 건축 형식을 보면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로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 강진읍 향교로 140

수열비
문화관광전북특별자치도

수열비

수열비는 수열평 마을에 있으며 조선시대 중기 양사무의 부인 해주 오씨의 절개를 기리는 석비이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장수지방에 침입하였던 왜적들이 집집마다 약탈을 하며 불을 지르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잦았다. 화평 마을에 살고 있는 양사무의 부인 해주오씨는 아침에 들이닥친 왜적들에게 가슴을 잡히는 등 모욕을 당하게 되자, 자기 가슴을 칼로 베어 그들의 얼굴에 뿌리면서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들아! 젖이 욕심나거든 이것을 들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크게 외쳤다. 부인의 위엄에 눌린 왜적들은 곧 달아나고, 피를 많이 흘린 부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운명하였다. 훗날 이러한 사연을 나라에 올려 아뢰니, 조정에서는 부인을 위한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비각 안에 서 있는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구조로, 비몸의 윗변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앞면에는 비의 이름을 길게 새기고, 뒷면에는 ‘수열평 樹烈坪’이라 썼는데, 수열은 부인의 열녀(烈女)의 기상을 심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화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수열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의 글씨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광양향교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양향교

태조 7년(1397)에 세운 광양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5년(1613)에 광양현감과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지으면서 점차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없어진 것을 1966년에 출입문인 풍화루를 돌기둥으로 대신하여 세운 것을 시작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풍화루·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 중심의 제사공간을 이루는 일반적인 배치형식과는 달리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양시 광양읍 향교길 67

구례 석주관성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구례 석주관성

노고단에서 왕시루봉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에 위치하며, 칠봉산 남쪽 봉우리 20m 아래에서부터 칠의사 아래 후면까지 이어져 있는 고려 시대 성곽이다. 삼한시대에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고, 고려 때에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켜내기만 하면 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왜적을 방어할 수 있는 호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함에 따라 진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화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성을 쌓고 구례 현감인 이원춘에게 석주관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석주관에 고려 말 때처럼 만호진을 설치하여 왜구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황폐해지고 현재에 이른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750m이며, 높이 50∼120㎝로 대부분은 무너졌다. 13세기와 16세기 성을 쌓는 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차량으로 약 3분, 2.8㎞ 거리에 간전교를 지나 왼쪽으로 섬진강어류생태관이 있으며, 섬진강 대로를 따라 약 5.7㎞를 더 가면 운조루 고택을 방문할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구례군 토지면 섬진강대로 4638-8

구암사(진도)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구암사(진도)

구암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하여 여귀산 자락에 여러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중방골이나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여러 암자로부터 유래된 산의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에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 후기나 고려 초기에 지어진 탑으로 보고 있으며, 해체 보수 때 사리를 넣었던 흠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웅전의 실내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선조의 얼이 담긴 문화 유적지가 폐허인 채 내버려져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뜻있는 주민들이 구암사 복원불사 후원회를 조직하여 1988년에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1991년 복원불사를 착수하여 현재에도 불사에 계속 임하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진도군 임회면 상만길 58

김남주 생가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김남주 생가

김남주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1945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해남군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삼화초등학교, 해남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 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진혼가’등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 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0년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남긴 470 여 편의 시 가운데 300 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1988년 1월 가석방 되어 출소한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 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등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해남군 삼산면 봉학길 98

용암사(장수)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용암사(장수)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천천면 춘송리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초기 문신 안성 등 5인의 위패를 모신다. 용암사는 용암서원이라고도 한다. 순조 18년(1818) 창건되었으며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 같은 자리에 복설 되었다. 수덕문이라는 현판이 달린 외삼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강당인 경현재, 중지문이라는 현판이 달린 내삼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사당인 용암사, 수직사, 구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용암사묘정비 1기가 서 있다. 사당에는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인 천곡 안성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의 학자 계은 양석하, 조선 후기의 학자 양심헌 양성린, 서예가 화음 김영갑, 효자 수우당 한인기 등 5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성은 조선 태종 때에 강원도관찰사, 좌찬성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된 인물로 본관은 광주, 자는 일삼, 호는 천곡, 시호는 사간이다. 양성린은 장수군 계남면 출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장수향교에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던 학자이다. 본관은 남원, 자는 시징, 호는 양심헌이다. 장수향교에 양사재와 사마재를 건립하고,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유천마을에 흥학당을 중수하여 문과급제 4인을 배출했다고 한다. 용암사의 향사일은 음력 9월 12일이다. 주위에 침령산성,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 금남군정충신영정각 등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천천면 춘송리

구고사 및 김완장군부조묘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구고사 및 김완장군부조묘

김완(1577~1635)은 영암 출신의 조선 후기 무신으로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인물이다. 구고사는 김완 장군의 위훈을 기리는 사당으로 김완 장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부조묘는 보물로 지정된 김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구고사는 김완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18년(1640)에 처음 창건되었다. 이후 문중 선조이자 고려 말 대제학인 김진문과 조카 김여준, 김여옥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1889년 불에 탄 뒤 1946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중건되었고, 1979년과 1983년에 보수되었다. 부조묘는 국가에서 사당을 짓도록 허락하고 전답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고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었다. 김완 장군 부조묘는 장군 사후 왕명으로 창건되었으며, 한때 소실된 것을 1979년에 복원되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암군 서호면 화소길 20

박상진의사 생가
역사관광울산광역시

박상진의사 생가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박상진 의사는 1902년 허위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참여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8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21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국권 회복과 항일투쟁에 앞장선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박상진의사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밀양박씨 송정문중의 소유였던 서당건물 봉산정사, 송애정사, 양정재를 이전 복원하였으며 박상진의사생가전시관을 세웠다. 독립투사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기에 뜻깊은 곳이다.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5로 10 (송정동)

낙안향교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낙안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낙안향교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효종 9년(1658년)에 군 동쪽 농암등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몇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양사재, 고직사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향교 입구에 하마비와 22기의 비석군이 있다. 명륜당 뒤편에 있는 낙안 교촌리 은행나무는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수령이 360여 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낙안읍성민속마을과는 불과 3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함께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낙안면 교촌길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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