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6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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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광장
5·18 민주광장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 분수대 광장을 말한다. 1980년 5월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기념하기 ‘5·18 민주광장’으로 명명한 곳이다. 광장에는 당시의 분수대, 상무관, 시계탑이 상징으로 남아있고 2005년에 건립된 민주의 종각이 있으며 5·18 기념일과 광복절에 타종한다. 당시 전남도청으로 사용된 옛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건설되었는데 현재는 복원되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이용되며 5·18 사적지로 1996년부터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980년 5월 14일 전남대에서 전남도청 앞 광장까지 행진한 전남대 학생들이 조선대 학생, 시민들과 합세, 이곳에서 민족민주대성회를 개최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민족민주 대성회는 3일간 계속되면서 시국선언문이 발표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자유발언 등이 진행됐다. 특히 5월 16일에는 경찰의 협조하에 야간횃불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등 광주민주화운동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에는 이곳에서 민주화 투쟁 결의 등 각종 궐기대회와 시민집회가 열렸다. 현재는 5·18 관련 최대 행사인 전야제가 매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도구해수욕장
도구해수욕장은 포스코와 구룡포해수욕장의 중간 지점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 위치한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은 길이 800m, 폭 50m로 1일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고대 설화인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은 신라 사람인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니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고, 그 후 세오가 보낸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 해와 달이 빛을 되찾았다는 설화이다. 명주조개의 서식지로 조개잡이 체험 행사가 자주 열리며 이 외에도 바나나보트, 제트스키 등 해양 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편의 시설로는 샤워장, 식수대, 세족대, 매점 등이 마련되어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로81번길

광주지산동오층석탑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더라도 상징적으로 모셨다고 여겨진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지산동 오층 석탑은 통일 신라 후기 석탑으로 과거에는 광주의 동쪽에 있는 탑이라서 ‘광주 동오층 석탑’으로도 불렸다. 2층 바닥돌(기단부) 위에 몸돌부(탑신부)를 5층으로 쌓고, 그 위에는 머리 장식(상륜부)을 올렸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바닥돌은 여러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부와 지붕돌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층 지붕돌받침만 다섯 단이고, 2층부터는 각 단이 네 단으로 되어 있어서 통일 신라 시대 후기 양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동구 지산동

경주향교
경주향교는 경주교촌한옥마을과 경주최부자댁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교촌, 교리, 교동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향교 때문이다. 이 자리에 신라 최고의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이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 11년(992)에 시설을 정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 성종 23년(1492)에 문묘와 성균관의 배치형식을 따라 다시 지었다. 현재와 같은 건물배치는 향교의 표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해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을 다시 지었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 등과 같은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을 고쳐지었다. 광복 후에는 학교의 임시 교사로 활용되었으며 1999년부터는 사회교육원이 개설되어 강학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향교 앞쪽의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다. 뒤쪽에는 강학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서재가 있다. 교생의 정원은 90인이었으며 경서와 시문을 위주로 가르쳤다.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 문묘와 같이 다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27-20 (교동)
경주 내물왕릉
경주향교 인근 인왕동 고분군에 있는 내물왕릉은 신라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으로 401년에 조성되었다. 밑지름 22m, 높이 5.3m의 봉토분으로 밑면 주변에는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처럼 그 안에 별도의 호석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에 첨성대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 위치와 일치한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내물왕은 김 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 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 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포석로 1065 (황남동)

창석사당
창석사당은 창석 이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56년 창건됐다가 1771년(영조 41)에 월간사당과 함께 체화당이 있는 곳으로 옮겨 세워졌다. 창석사당과 월간사당은 같은 구조로 대문채는 정면 5칸 중 좌측에서부터 문간방, 대문간, 고방, 방, 부엌의 순으로 되어 있었으나, 대문간은 앞쪽을 토벽으로 막고 고방은 앞쪽을 개방하여 마루로 개조하였다. 사당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원형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아서 원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겹처마로 양측 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체화당은 이전의 셋째 아들 신규가 1632년(인조 10)에 지었으며, 이전이 살던 집이다. 건물로는 창덕사당과 이전을 모시는 월간사당 등이 있다. 여기서 체화는 형제가 우애롭게 지낸 것을 상징한다. 이전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동생 이준이 백화산전투에서 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을 무릅쓴 채 동생을 업고 전장을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했으며 이들 형제간의 우애를 그림으로 그린 형제급난도가 전해진다.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가천3길 70

김용학가옥
김용학가옥은 매곡동 하백(荷白) 마을의 언덕진 곳에 자리 잡은 민간 가옥이다. 이 가옥은 살림집과 정자가 조화롭게 배치된 전통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정자, 연못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당시 유지였던 하은 김희수(荷隱 金喜洙)가 1900년대 초에 지은 집으로 아들인 김용학이 고쳐지었다. 지대가 높은 서쪽 언덕에는 정자인 연파정(蓮坡亭)과 하은정(荷隱亭)이 있고, 평지인 동쪽과 남쪽에는 살림집과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청풍헌(淸風軒)은 김희수가 1917년에 지었는데, 백암 정사(白菴 精舍)라고도 한다. 정면 7칸, 측면 3칸 구조로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건물 뒤쪽으로 마루와 부엌을 증축하였다. 안채는 원래 2층의 초가집이었는데, 김용학이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연파정은 김희수가 아버지 김영덕(金永德)을 위해 1918년에 지었으나 화재로 타 버려서 1934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비바람을 막기 위해 정자 네 면에 판자 덧문을 달아 놓았고, 내부는 벽이 없는 마루로 터져 있다. 하은정은 김용학이 아버지 김희수를 위해 1933년에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구조인데, 정자 바깥에는 유리 덧문이 있고, 내부는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한 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연파정과 하은정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지역 선비들이 교류하던 문화 공간이었다. 교류하던 학자들이 남긴 시문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용학 가옥은 하백 마을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김희수, 김용학 일가가 조성한 누정원림(樓亭園林)이자 주거 공간으로 민속·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은 청동기 시대 무덤 떼이다.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 고인돌 떼는 솔밭과 경작지 등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나, 이곳 범곡리에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로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어 청도천 주변에 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쪽에 22기, 서쪽에 12기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청도천 주변에 정착해 큰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던 사람들의 묘로 보이며 기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큰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주변의 농경지와 묘지 조성 등으로 일부 손상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고인돌 떼 중 하나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청도읍성
청도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있는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 북저의 석축성이다. 지방에 읍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곽으로 고려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2km, 높이가 1.7m이다. 산성과 평지성과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네모꼴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협축벽이다. 임진왜란 때 동, 서, 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으로 인해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어 성터 하부의 축조 형태도 알 수 없다. 청도군에서는 매년 3월 [청도읍성 밟기] 행사를 개최한다. 청도읍성 밟기는 부녀자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산성의 능선을 따라 밟으며 열을 지어 도는 풍속으로,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예부터 청도읍성을 한 바퀴 돌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돌면 소원 성취한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청도 합천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아미타여래는 서쪽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뜻한다. 청도군 합천리에는 통일신라시대 천로사 또는 대로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현재는 그 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아미타여래입상만 남아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1.6m 정도이며, 광배와 부처님을 하나의 돌로 조각한 모습이다. 불상의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어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마모되었지만 둥근 얼굴, 두툼한 나발, 큼직한 육계, 어깨에 닿는 큰 귀, 상체보다 긴 하체 등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사이에 만든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합천리

오리요리의 거리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오리요리의 거리는 오리를 적당히 잘라서 익힌 다음에 들깨가루를 섞은 초장에 고기와 미나리를 찍어 먹는 음식점이 밀집된 거리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유동과 신안동 일대에서 특화된 오리탕의 시초는 1970년대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에서 오리농장을 운영하던 한 청년이 보급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오리로스를 권장하다가 유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 주인을 만났다. 청년은 식당 주인에게 자연산 청둥오리 요리법을 전해 듣고 미나리와 들깨가루를 넣어 끓여내는 오리탕을 개발하였다. 저렴한 가격에 오리가 공급되었고, 예측대로 담백한 오리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에 오리탕 전문점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의 오리요리 거리가 형성되었다. 북구 유동과 신안동 일대에서 오리탕 전문점이 많아질 수 있었던 것은 원재료인 오리 생산지가 인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70~1980년대 당시 유동과 신안동은 광주고속터미널과 중앙고속터미널, 광주역이 가까워 시민들과 외지인들의 이동량이 매우 많았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을 기반으로 유동 일대에만 30여 개의 오리탕 전문점이 생겨났다. 현재 유동오거리 주변에는 아직도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광주광역시는 북구 경양로 일대를 음식특화거리로 지정하고 ‘광주오리요리의 거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메뉴는 오리탕, 오리로스, 오리주물럭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오리탕의 인기가 가장 좋은데, 다른 지역과 달리 국물 맛이 고소하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질그릇으로 만든 냄비나 솥에 된장과 간 고추, 들깻가루, 마늘, 생강 등을 넣고 토막 내 살짝 데친 오리고기를 넣어 4시간 이상 끓인다. 여기에 다시 된장으로 간을 하고 미나리와 대파를 얹어 내놓기 때문에 맛이 담백하다 광주 오리요리의 거리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유동과 신안동의 경계지역에 자리하며,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관광코스에 넣어 찾아올 만큼 이름이 있는 곳이다. 단일 음식이 특정 지역에 군집해 있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오리탕 메뉴로 특화거리를 형성하고 수십 년에 걸쳐 명성을 유지하는 사례는 드물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오리요리의 거리는 음식점 군락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경양로 125
화기리인동장씨종택
영주 화기리인동장씨종택은 조선 전기 전통가옥으로 장언상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하였다. 장언사의 본관은 인동, 자는 대휴로 할아버지는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인 장응신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행 충좌위 대호군을 지낸 장윤희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각각 독립된 건물이다. 안채 뒤로 사당이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오른쪽에 영정각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오른쪽 2칸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왼쪽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전면에는 별주의 두리기둥에 계자각 난간을 세운 누마루를 두었다. 안채는 사랑채 오른쪽으로 난 중문을 통해 출입한다. 정면 5칸 중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상방, 상방 부엌,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을 두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건축 당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당시 양반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연구 자료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계길 71

안동 체화정
체화정은 조선 후기 때 학자인 이민적이 1761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 이름에서 체화는 상체지화의 줄인 말로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의미하는데, 『시경』에서 그 의미를 따왔다고 한다. 이민적은 만년에 큰형 이민정과 함께 이곳에서 지내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다졌다. 온돌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마루방이 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내고 난간을 둘렀다. 온돌방과 양쪽 마루방 사이에는 들문을 설치해서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가운데 온돌방의 문을 들어 올리면 전체를 완전히 개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그리고 온돌방 문 가운데에는 눈꼽째기창이라는 작은 창을 더 내서 문을 열지 않아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앞쪽에 걸린 현판은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안동 출신의 학자 유정원이 썼다. 정자 안에는 담락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선 최고의 서화가 중 한 명인 김홍도가 썼다.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야 부모에게 참된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체화정 앞에는 네모난 연못을 팠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세 개의 둥근 섬을 조성하였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 섬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상진한다. 체화정의 평면 형식과 독특한 창호 구성은 연못과 잘 어우러져 전통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태사로 1123-10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은 지면에서 약 7㎞높이의 암벽에 조각된 높이 2.4㎞의 입상으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으로 봐서 조성 당시에는 나지막한 야산의 중턱에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도로 개설과 확장으로 인해 암반이 많이 절개되어 불상이 있는 곳은 가파른 절벽이 되었다.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중앙을 감실 형태로 만들었고 그 안에 불상과 광배(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 대좌를 조각하였다. 감실 위에는 넓은 판석으로 처마를 만들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했다. 불상의 얼굴은 네모졌고, 머리에는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목에는 삼도(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줄기 주름으로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나타냄)가 표현되었다. 가는 눈과 좁은 미간, 넓은 코, 얇은 입술과 튀어나온 입 등에서 부자연스러운 점을 느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하였고 발끝은 팔자 모양으로 좌우로 향하도록 하였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전평제
전평제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 매월동에 있는 저수시설이다. 전평제(前坪堤)라는 이름은 회재 박광옥 (1526~1593)의 유허비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에 등장한다. 회재가 나이 43세 때 농사를 짓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전평제라고 알려져 있다. 1943년에 매월동, 벽진동 농경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재해 방지를 위해 축조해서 도심 근교에 방치된 저수지를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으로 체육시설 및 쉼터를 조성하였다. 저수지 가운데 인공섬을 사이에 두고 목교가 설치되어 있어 수변경관 및 자연탐방과 함께 나들이 하기 좋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 전평길 1
경주 경덕왕릉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전제왕권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행정구역과 관직제도를 개편했다. 봉분은 둥근 모양이며 무덤 주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을 둘렀다. 둘레돌은 목조건축물의 돌기단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면석을 둘렀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든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덮개돌이 놓여 있다. 이 둘레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돌기둥 40개를 세워 난간을 둘렀다. 무덤 앞에는 안상문을 새긴 높은 석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돌사자·문인석·무인석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와 에 기록되어 있는 무덤의 자리가 이곳인지 확실치 않고, 둘레돌을 다듬는 수법이나 12지신상의 조각수법이 신라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 이 무덤이 경덕왕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학산사
서창동 불임마을 팔학산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임진왜란(1592)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삽봉 김세근의 위업을 기려 제사 지내는 사우이다. 선조 25년(1592년)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에 침입하는 선조(조선 14대 임금)가 환난을 피하여 의주로 몽진하였을 때 김공은 왜구의 침공을 예상하여 미리 사복시주부(정 6품) 벼슬을 사임하고 서창, 관래 세동 백마산 수련곡(속칭 수원골)에서 장정들을 모아 무술을 연마한 후 이들 3백여 명을 이끌고 영동과 화간의 적을 격파하고 금산의 중간지점에서 수일을 유진 하다가 왜의 대군과 만나 구전중, 와평들에게 중과부적으로 주장 고경명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광주 유림들이 그의 거룩한 넋을 주모하는 사우건립을 발의하여 1958년 본 학산사를 지어 매년 춘향(음 3월 22일)을 행하고 있다. (출처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문화관광)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 불암길 82-100
충의당
조선 중기의 무신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이 살았던 곳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한다.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이끌었고, 정유재란 때 권율 장군을 도와 공을 세웠다. 충의당은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경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정침과 고방채가 있고 오른쪽에 제향공간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배치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가 지냈던 충의당은 경주 최부자집의 시작이라 볼 수 있으며, 현재 일부는 고택체험이 가능한 한옥스테이 객실과 다실로 운영된다. 숙박 시 충의당 휴게실, 정무공 최진립 장군 동상이 있는 충의공원, 충의당 유물관과 사당, 잔디마당 등을 둘러볼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운천저수지
운천저수지는 1951년 마륵동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길이 420m의 제방을 쌓았고 금호, 상무지구의 대규모 택지개발 후 악취와 해충 문제로 매립될 위기에 처했으나 1995년부터 오, 폐수를 차단하고 맑은 물을 공급하여 저수지와 주변 공간을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저수지를 두른 산책로와 조형물, 분수, 지압로, 정자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현재 시민들의 산책 명소로 알려져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 운천로 165
용산서원(경주)
조선 중기의 무신 정무공 최진립을 제사 지내기 위한 곳으로 숙종 25년(1699)에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세웠다. 숙종 37년(1711)에 임금으로부터 [숭렬사우]라는 편액을 내려받았으며 후에 서원으로 승격됐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24년 다시 건립됐다. 용산서원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최진립은 지금의 경주시 현곡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동생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때는 권율과 함께 울산 서생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용인 험천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포석로 110-34

운천사마애여래좌상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운천사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다. 크기는 높이 2.1m, 무릎 폭 2.1m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불상이다. 자연 암벽을 다듬어 불상을 양각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전각의 형태를 갖추어 놓았다. 전체적인 형태와 몸체 부분은 입체감 있게 조성하였으나 광배와 대좌 부분은 선으로 그 형태를 조각하였다. 육계(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뚜렷하게 솟아 있는데, 머리카락은 나발이었으나 많이 마모되어 소발처럼 보인다. 양미간에는 백호(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으로 이 광명이 무량세계를 비춘다)가 자리한 구멍이 희미하게 보이고, 눈은 명상을 하고 있는 듯 반쯤 감은 형태이다. 양쪽 귀는 매우 커서 어깨 위까지 늘어져 있으며, 귓바퀴와 귓불이 뚜렷한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가사를 입고 있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노천불로 알려져 왔지만, 고려시대 기와가 발굴됨에 따라 조성 당시 마애불을 보호하는 전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불상을 크게 조성하다 보니 신체적 균형이 맞지 않고, 경직된 얼굴과 도식화된 옷자락 등을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 금호운천길 85-15

경주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는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왕릉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고분의 모양은 모두 원형이며 주위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렀던 둘레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모두 깬돌을 사용했다. 대부분 냇돌을 쓴 대릉원 일원의 고분들과 차이를 보인다.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들보다 작은 고분들이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경주 법흥왕릉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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