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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160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160페이지입니다.

장선천
자연관광전북특별자치도

장선천

장선천은 지류들이 완주군 운주면 장선리에서 모두 모이기 때문에 장선리의 지명을 따라 장선천이라고 했다. 동국여지지에는 인천, 다른 이름으로는 율령천으로 탄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산현에서는 백계 또는 거사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고 고산현에서는 용계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선천을 따라서 운주계곡 캠핑장, 칼바위 유원지, 성바위 유원지, 병풍바위 휴게소 등의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유원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역사 관련 유적으로는 쑥재의 봉화대, 용계성 등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들안길먹거리타운
문화관광대구광역시

들안길먹거리타운

1980년대 후반부터 시내 중심가의 대형식당들이 도심의 교통체증 주차난 등으로 들안길로 하나 둘 모여들어 먹거리타운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대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으로 발돋움하면서 수성구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수준 높은 요리와 독특한 인테리어, 넓은 주차장을 갖춘 식당 150여 개가 들안길을 중심으로 대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식, 양식, 일식 등 다양한 메뉴와 쾌적한 시설로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들안로 109-1

추수경장군묘역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추수경장군묘역

추수경 장군은 명나라 신종 때의 사람으로 자는 청하, 호는 세심당이다. 명나라 귀주성 성덕산하 오현군 칠성동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해 1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명나라의 무강자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의 신종에게 청원하여 이여송의 원군을 출병케 하였고, 자신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총병아장으로 다섯 아들과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함께 참전하였다. 1593년 2월 곽산 대첩을 시작으로 평양성 탈환, 개성ㆍ한양 수복 작전에 참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남원 전투에 참전하였고, 전주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전주사고를 끝까지 지켰다. 명나라 군사들의 환국 시 조상의 나라에 남기로 하고 전투에 참여한 5명의 아들과 함께 완주군 봉동읍 추동에 남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추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추수경 장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죽은 뒤에 충장공의 시호를 내리고 호성공신·완산부원군으로 봉하였다. 무덤 앞에 있는 비는 1973년에 새로 세운 것인데, 원래의 비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제각으로 썼던 [봉양제]라는 건물은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그 터에 주춧돌과 정문만이 남아 있다. 훼손된 묘역은 2004년 11월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완주군에서 신도비와 사당 봉양사를 세웠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추동안길 14-7

이월드 83타워
문화관광대구광역시

이월드 83타워

83 타워(대구타워)는 대구를 상징하는 하늘의 궁전이며 대구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와 통신 홍보관, 과학관, 기획전시관이 있다. 또한 호텔식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3대 스테이크 하우스와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푸드코드가 있다. 전망대에서 사계절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으며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별빛로드를 따라 올라가 보면 아름다운 야경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건물 내에 다양한 포토존이 있어 소중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공원로 200 (두류동)

화암사 우화루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화암사 우화루

화암사우화루는 불명산 자락 화암사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우화루는 화암사의 정문 역할을 하는 건물로서 경내 및 극락전으로 가기 위한 입구에 자리한다. 우화루 정면은 높은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놓은 2층의 구조이나 뒷면은 평범한 단층 구조를 가진 공중누각식의 형태로서 자연적인 지형과 조화를 이루어 선인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화암사에서 우화루뿐만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볼 수 있으며,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식(처마 무게를 받치는 건축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더 길게 낼 수 있도록 한 것) 건축물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달성(현풍)사직단
역사관광대구광역시

달성(현풍)사직단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을 가리키며,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토지를 주관하는 사신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의 사직단은 옛 현풍 사직단 터에 충혼탑이 세워져 원래 자리에 복원하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1996년~1997년 2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이때의 사직단은 500㎡의 대지 위에 가로, 세로 각 5m, 높이 1m의 방형 단을 5m 거리를 두고 2기가 동서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사단은 서쪽에, 직단은 동쪽에 배치하여 북쪽을 제외한 3면에 계단을 쌓았다. 이후 1998년 한 개의 단으로 새롭게 복원하였고, 2010년 개축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사직단은 사면의 방형 담장 안에 남쪽으로 치우쳐 1기의 사직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담장의 각 중앙에는 홍살문이 있다. 사직단은 3단이며, 각 방향의 중앙에는 3단의 계단이 있는 형태이다. 현풍사직단은 달성군의 전통문화유산을 계승함과 동시에 후세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환성정
역사관광대구광역시

환성정

환성정은 1582년(선조 15) 이주가 27세에 금호강 변에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대구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주는 조선의 학자이며 성리학을 연구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군량을 조달하고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관으로 있었으며 뒤이어 체찰사 이덕형의 추천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다 서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환성정은 이주가 타계한 후 없어졌다가 1902년 이주의 9세 손인 수헌 이억상이 지금의 자리에 중수했다. 정자는 6칸이었고 동쪽에 건 편액이 경의재, 서쪽은 체인재다. 1971년에는 11세손 회연 이순희가 다시 중수했다. 조선 후기에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변순 형제와 면암 최익현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곳에 방문하여 교유하고 강학을 하며, 대구지역 최고의 정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환성정은 서계서원의 경내에 있으며, 인천 이씨 서계서원 보존회에서 관리하고 환성정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경내의 배롱나무는 201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 270년, 높이 10m, 가슴높이 나무둘레는 115㎝이며 가지가 갈라진 쌍간 나무이다. 이 보호수 외에도 총 10그루의 배롱나무가 꽃등처럼 경내를 환하게 밝혀 탐방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51길 45-17

문창공영당
역사관광대구광역시

문창공영당

동구 향산 인근의 문창공영당은 통일신라시대 문장가이자 경주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857-?]의 영정이 봉안된 곳이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중앙관직과 지방관직을 거쳐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까지 올랐다. 40여 세 때 관직을 버리고 은거 생활을 하다,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창공영당은 1755년(영조 31) 지금 자리가 아닌 인근 대구 동구 해안동에 처음 창건한 계림사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864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12년 지금의 자리에 문창공영당을 중수했다. 매년 음력 3월 3일 향사를 지낸다. 영당 내부에 도교의 신선풍으로 묘사된 문창공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문창공영당은 영정각으로는 그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솟을지붕과 기둥머리 장식 또한 특색이 있어 조선 후기 목조건물의 전형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38길 51

도곡재
역사관광대구광역시

도곡재

도곡재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달성군 하빈면에 위치하였다.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2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은 순창군이 전통장류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순창전통고추장의 명성과 전통적 제조비법을 이어가기 위해 조성한 마을로 3년여의 조성 기간을 거쳐 1997년에 생겨난 곳이다. 순창군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고추장 제조 장인들을 아미산 자락에 있는 순창읍 백산리 일대에 모아 전통고추장민속마을을 형성시켜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장인들의 비법이 잘 어우러져 위생적이면서 전통적인 본래 고추장의 맛을 만들어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에서는 각 호의 고추장 제조 기능인들이 저마다의 고추장을 생산하여 판매하며, 재래식 된장과 간장, 감, 깻잎, 오이, 마늘, 고추, 도라지, 더덕, 매실 등으로 만든 절임류도 취급하고 있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265-66

달성 삼가헌 고택
역사관광대구광역시

달성 삼가헌 고택

달성 삼가헌은 사육신의 한 분인 충정공 박팽년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 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별당, 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 지었으며 그 뒤 그의 아들 광석이 1783년 이웃하고 있는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 곳간채, 안변소가 자리 잡고 있다. 삼가헌의 백미, 별당인 하엽정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하였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이라 하엽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방앞 처마에는 파산서당 편액을 같이 볼 수 있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을 두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여름철 연못에 연꽃이 피고 주변 배롱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풍광이 삼가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주택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강화유수부 동헌
역사관광인천광역시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유수부 동헌은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후기 강화에는 개성, 수원, 광주와 함께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고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는데, 유수가 집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 강화 유수부 동헌이다. 조선 1638년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1769년에 유수 황경원이 현문관이라 이름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앞면 8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당시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이 쓴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강화유수부이방청
역사관광인천광역시

강화유수부이방청

고려 고종 때 궁궐이 있었던 터에 있는 이 건물은 조선 중기 강화 유수부 6방 중 하나인 이방청(吏房廳) 건물이다. 지방 행정 관아로 수령을 보좌하던 행정 실무자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이 건물은 한식 목조 단층 기와집으로 ㄷ자형인데,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이다.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 양식이다. 현재의 건물이 건립된 것은 효종 때로 유수 정세규(鄭世䂓)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1783년에 유수 김노진(金魯鎭)에 의해 내부가 수리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종해루
역사관광인천광역시

종해루

종해루는 전등사 삼랑성의 남문에 있다. 전등사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는 영조 15년(1739)에 유수 권교가 수축하고 종해루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영조 40년(1764)에 중수하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1976년 남문을 중수하고 문루도 건립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을 삼랑성이라고 부르며 단군이 세 아들인 부여(夫餘)·부우(夫虞)·부소(夫蘇)을 시켜 쌓았다고 전해온다. 고려 고종 46년(1259) 이 성내에 궁궐을 지었으며 조선 현종 원년(1660)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는 양헌수 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 군을 격멸한 전승지이기도 하다. 성내에는 양헌수 장군의 전승비가 있다. 이성에는 원래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5년(1739)에 남문에 무루를 건립하였다. 그간에 성곽과 문루가 무너졌던 것을 197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철종외가
역사관광인천광역시

철종외가

조선 25대왕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가옥으로, 1853년(철종 4)에 강화유수 정기세에게 명하여 지은 가옥이다.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844년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1847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으로 배치되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있다. 경기 지역의 사대부 가옥 형태를 따랐으나 사랑채와 안채가 ‘ㅡ자형’으로 연결돼 있고 안채와 사랑채 공간을 작은 담장인 화장담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에 비해 작지만 고풍스럽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봉일사지삼층석탑
역사관광인천광역시

봉일사지삼층석탑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봉일사지삼층석탑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다. 계양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경인여대 건물 옆으로 백룡사가 자리 잡고 있다. 동국흥지승람과 부평읍지 기록에 의하면 봉일사가 보수, 개축하며 백룡사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봉일사지삼층석탑은 봉일사에 있던 것을 백룡사가 세워지면서 백룡사 경내로 옮겨졌다. 1층과 3층은 옥개석만, 2층은 옥신과 옥개석만 남아있어서 나머지 분실된 것들을 보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비록 탑신부 일부가 소실되기는 했으나, 인천 지역에서 원위치에 남아있는 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산로75번길 7-13

지선사
역사관광인천광역시

지선사

지선사는 원래 백룡사 터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88년 4월에 지금의 계양산 자락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중창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사찰로, 도심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지역 주민들과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선사의 본당에는 지장보살님 500분이 봉안되어 있어, 특히 지장기도를 올리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불교 신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공덕을 안겨주는 공간으로, 사찰 특유의 정갈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기도하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2022년 9월에는 경내에 약사여래불상이 새롭게 세워져, 병고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많은 신도들에게 큰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사찰이 위치한 계양산 자락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명상과 휴식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지선사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며, 도시민들에게 정신적 안식처이자 수행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계양구 경명대로955번길 13-12

인하대후문먹거리타운
문화관광인천광역시

인하대후문먹거리타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한 인하대후문먹거리타운은 학생들과 방문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맛집 거리이다. 이곳은 인하대학교 후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다양한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먹거리타운은 학생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도 적합한 곳이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며, 대표적으로 떡볶이, 순대, 덮밥, 찜닭 등 한국 전통 음식을 비롯한 다양한 메뉴가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어 사람들로 붐비는 활기찬 거리로 유명하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경인남길30번길 45-1

대한민국 수준원점
역사관광인천광역시

대한민국 수준원점

수준원점이란 우리나라의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평균 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하여 1963년 육지에 설치해 놓은 시설물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의 높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준원점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받침돌 위에 화강석으로 된 육면체의 설치대를 얹고 그 위에 자수정으로 수준원점을 표시하였으며, 아담한 원형 벽돌 건축물이 수준원점을 보호하고 있다. 전국의 수준점을 정할 때 높이 기준이 되는 이 수준원점의 높이는 26.6871m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하로 100

용화선원(인천)
역사관광인천광역시

용화선원(인천)

용화선원의 모든 운영 중심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정진수행에 있다. 특히 일반신도에게는 법회를 중심으로 신행활동을 하면서 불교의 진수 활구참선을 널리 수행할 수 있도록 보살선방과 시민선방을 개설하여 참선입문에 도움을 드리고 있으며, 조실 전강스님과 송담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을 언제든지 육성으로 들으실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널리 전파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학생회와 청년부를 운영하여 불교포교에도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 : 용화선원 홈페이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염로 43

자연관광인천광역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래습지생태공원은 갯벌, 갯골과 폐염전 지역을 다양한 생물 군락지 및 철새 도래지로 복원시키기 위한 공원 조성 사업을 2009년 5월 완료했다. 약 350만㎡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서 습지 내에서 각종 해양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천일염을 생산했던 시설물과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관, 직접 천일염 생산 및 습지 내 사는 다양한 동·식물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과 광활한 갈대 및 풍차, 산책로,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의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갯벌과 습지의 중요성을 몸소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소래습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체험해 보기 추천한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소래로154번길 77

굴포천 생태하천
자연관광인천광역시

굴포천 생태하천

굴포천 생태하천은 물길을 벗 삼아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인천광역시 부평구를 대표하는 친수 공간이다. 2008년에 굴포천 자연형 하천 사업을 통해 부평구청에서 부천 경계까지 6㎞ 구간을 생태하천으로 되살리며 조성한 하천이다. 조선 중종 때 삼남지방에서 곡물 등을 싣고 바다로 이동하는 배가 강화 손돌목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이 뱃길을 피하여 보다 더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판 하천(판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운하공사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굴포천 생태하천은 도심 속 시원스러운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수변 산책로를 중심으로 분수대와 친수시설이 들어섰고, 물을 정화하는 물억새, 부들, 수크령, 노랑꽃창포 등 다양한 수생식물을 심어 아름다운 수변 공간으로 변모해 많은 이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굴포로 141 (삼산동)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
역사관광인천광역시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

인천 검암동 일대에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5∼6기의 고려 가마터이다. 가마터 주위 지세는 얕은 비탈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발굴조사 시 드러난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지만, 나머지 일대는 골프장으로 변해있다. 발굴 당시 가마 1기를 조사하여 많은 녹청자조각과 가마도구들을 발견하였다. 가마는 자연 경사를 이용한 것으로 칸이 없는 통가마이다. 3차례에 걸쳐 다시 고쳤쌓았는데, 경사도 20°도 안팎의 가마바닥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경사진 넓적한 자기로 만든 도지미를 깔고 그릇을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에서 구운 것은 녹청색의 짙은 청자로 유약은 녹청색·녹갈색으로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문양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 병의 몸통에 주름무늬가 보인다. 토기의 형태는 대접, 접시, 병류가 많다. 이러한 녹청색의 청자가마터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녹청자는 토기에서 변화 발전한 청자발생 이전의 것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초기 청자의 영향을 받아 지방수요용으로 대량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암동 가마터의 연대는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인천광역시 서해구 도요지로 54 (경서동)

능허대지
역사관광인천광역시

능허대지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 동진(東晋)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이다. 당시 백제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중국도 남·북조(南·北朝)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고구려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이곳 능허대를 통해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뱃길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인천광역시 연수구 능허대로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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