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55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155페이지입니다.
세종로공원
세종로공원은 우리나라의 중심인 세종로 가로(경복궁-광화문-세종문화회관-청계천-서울광장)에 조성된 녹지공간이다. 노후되고 폐쇄되어 시민 이용에 한계가 있던 곳을 광화문광장과 연계하여 개방형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시민소통의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공원 내에는 그늘집과 나무의자가 곳곳에 설치되어 인근 직장인들에게 도심 속의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또한, 분수대와 야외 원형 무대, 각종 조형물이 들어서 깔끔하고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지하189 (세종로)
숭인근린공원
숭인근린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에 있는 공원이다. 동망산공원이라고도 한다. 1980년에 개원한 도시공원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면적 45,615㎡로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정자와 체력단련시설, 관리사무소, 화장실 등이 있다. 공원이 있는 동망산의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부르는데,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가자 단종비 정순왕후가 초가 암자인 정업원을 짓고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8년 4월 이 공원에서 정순왕후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경희궁 흥화문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읜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하여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하였는데,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이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화문은 원래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인 종로를 향하게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1915년에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지면서 문의 방향도 도로와 나란하게 남향으로 바뀌었다.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인 박문사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흥화문을 떼어갔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옛 개양문이 있던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면서 궁궐 정문으로서의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경희궁공원
경희궁공원은 서울의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경희궁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함께 다양한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원 내에는 산책로와 잔디밭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들이 고궁의 정취를 느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재 보호 공간으로 많은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 일원은 조선 24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1847년(헌종 13)에 창경궁 낙선당 터에 낙선재를 지었고,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를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황후 김씨(순조의 왕비)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창덕궁 인정문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인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경궁 홍화문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홍화문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또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화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대온실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융희 3)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덕궁 향나무
창덕궁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7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m, 뿌리 부분 둘레 5.9m이다.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렸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나무의 모양이 마치 용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4년(1404년)에 왕실의 별궁으로 지었는데, 별궁을 지은 다음 어느 정도 자란 커다란 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무 나이를 700년이라 추정한 것이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다래나무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우리나라의 다래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크다. 이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부터 이곳에 자생했거나 혹은 창덕궁을 지었을 당시에 자연산 다래를 조경용으로 옮겨 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다래나무는 덩굴나무로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깊은 산속 토질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며 봄에 돋아 가을에 떨어진다. 꽃은 흰색으로 5월에 3∼10송이가 피며, 열매는 10월에 황록색으로 익는데 맛이 좋아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었다. 창덕궁의 대보단 옆에 있으며 특별히 타고 올라갈 지지대 없이 이리저리 엉키면서 자라는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줄기의 껍질이 얇게 벗겨져 일어나는 점도 특이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현대원서공원
원서공원은 현대건설이 현대그룹 사옥을 건립할 때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로 시민들의 휴식을 위해 도심에 녹지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운동시설과 게이트볼을 즐길 수 있는 운동장이 있고, 벤치와 그늘이 조화롭게 잘 배치되어 있다. 현대그룹 직원들을 비롯해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때 휴식과 산책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수도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약 400m 거리에 있으며 도로변에 있어 약속시간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9 (원서동)

탑골공원 팔각정
탑골공원 팔각정은 종로2가 탑골공원에 있는 누정으로 1989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종 34년(1897)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탑골공원을 조성할 때 함께 건립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며 팔각정은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해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은 황실 관현악단이 음악 연주소로 사용했는데 일요일에만 공개로 관현악을 연주하다가 음악을 듣기 위해 많은 시민이 모여들자 1913년 7월부터 평일에도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됐다. 건물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의 큰 기둥인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며 기둥열을 구성하고 있다. 지붕은 팔각지붕이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기단은 각 면을 둘러가며 장대석으로 5단의 층단식(層檀式)으로 쌓았다.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을 칠하였다. 건물 외관의 비례가 뛰어나 뒤에 건립한 남산 팔각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학생들과 시민이 이 누정 앞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대원군별장(석파정)
조선 후기에 건립된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왕산 바위 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이라 이름 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본채 7채의 살림채와 육모정, 유수성중관풍루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된 별서는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정자로 4개의 동만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경관과 수려한 건축을 자랑하며 조상들의 풍류와 예술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현재 서울미술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근현대 미술관 전시와 함께 미술관 입장권으로 석파정 야외 공원 관람이 가능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11길 4-1 (부암동)
훈련원공원
이곳 훈련원 터는 병사의 무술훈련 및 병서전투대형 등의 강습을 맡았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처음에는 훈련관으로 불렀는데, 태종 때 이곳으로 옮겨 청사 남쪽에 활쏘기 등 무예를 연습하고 무과시험을 보는 대청인 사청을 지었으며,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고쳤다. 현재의 훈련원공원 및 주차장이 건설되기 이전 이곳에는 적벽돌로 장식되고 내부구조는 백두산에서 벌목되어 압록강을 따라 황해로 운반된 육송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 철거 시 회수한 목재를 가공하여 여기 안내판을 제막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옛 내음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1997년 6월 30일 개원했으며, 잔디밭, 음수대, 안개분수 등의 조경시설과 관리실, 화장실, 벤치 등의 편익시설을 갖췄다.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27 (을지로5가)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서소문역사공원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원래는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구한말 서소문 전투의 군인 등 사회개혁 세력들뿐만 아니라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된 천주교인 중 44명이 성인이 되어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도 자리 잡았다. 서소문역사공원 지상에는 역사공원과 시민 편의시설, 지하엔 기념전당, 하늘광장, 역사기념관, 교육 및 편의시설,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1984년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은 그대로 보존한 채 광장을 공원 중심부에 놓고 녹지와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소나무, 대왕참나무, 장미 등 수목(45종) 7100주와 창포, 핑크 뮬리, 억새 등 초화류(33종) 10만 본을 심어 힐링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지하 1층은 도서실, 세미나실, 기념품 매장과 카페, 운영사무실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지하 2층~3층은 기념전당인 하늘광장과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로 구성된 역사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광장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추념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지하에 있어도 천장을 텄기 때문에 명칭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박물관의 하늘광장 등 주요 지점이 지상과 연결되어 존재함으로써 지하 문화 공간의 역사적 당위성과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5 (의주로2가)
덕수궁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원래 대한문은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문을 지나서 있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관훈동 민씨 가옥 (구 부마도위박영효가옥)
관훈동 30-1에 위치한 민씨 가옥은 조선 말기의 정치인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민영휘 일가가 거주한 곳이다. 민영휘는 일제강점기 판서, 한일은행 은행장 등을 역임한 관료로 막대한 부를 누렸으며 1895년 안국동으로부터 교동으로 이주하면서 관훈동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일가를 거주하게 했다. 1936년 기준으로 총 6동의 목조와즙과 2층 양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76년 가옥 중 일부가 멸실되고 안채 일부와 문간채 등 목조와즙 2동만 남아있다.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민영휘와 그 본처 대방마마 평산신씨와 입양한 장남 민형식 등은 경운동에, 첩인 해주마마 안유풍과 그 아들 민대식은 관훈동에 살았으며 그 자식들까지 경운동과 관훈동 일대에 한데 모여 살았다. 관훈동 30번지는 1970년대까지 민영휘의 자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가 경매와 매매를 거친 끝에 1986년 경인미술관이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경인미술관 소유 당시인 1995~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로 안채 일부와 문간채가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34길 28
해풍부원군윤택영댁재실
이 가옥은 순종의 장인인 해풍 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순정황후가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이다. 건축자재는 경운궁을 헐 때 그 재목을 이용한 것으로 재질은 홍송이다.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다. 가옥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으뜸 원(元)모양이다. ㅡ자형 인 사당은 원자의 머리에 위치하여 집의 제일 안쪽 높은 터에 자리 잡았다. 그 앞 남쪽 한단 낮은 터에 원자의 ㅠ형 몸채를 두었다. 몸채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연속되어 ㅡ자형으로 ㅠ의 ㅡ를 이루고 그 앞 동서로 행랑채가 팔을 이루며 연속되어 있다. 사당은 1960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사당 앞에 두 단의 석축을 쌓아 화계를 구성하였다. 원형 평면의 중앙은 자연히 가운데 마당이 되는데 전면 동서 행랑채 벽선을 따라 담장을 치고 일각대문을 두어 마당으로 드나든다. 안마당은 서쪽 행랑의 중문을 통하고 사랑마당에는 동쪽 행랑 끝에 뻗어 나온 담장의 일각대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 기와지붕으로 사랑채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나머지는 홑처마이다. 행랑채는 삼량가구로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가옥 전체의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 용도에 걸맞게 되어 있다. 때문에 대청을 중앙에 두고 안방과 사랑방이 마주한 것 등 특수한 요소가 많은 가옥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34길 28

삼청동오위장김춘영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은 고종 때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에 지은 한옥으로, 조선시대 서울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전통 가옥이다. 원래 서울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었으나 1996년 남산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좁은 대지에 맞춰 각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가 특징이다. ㄷ자형 안채를 중심으로 ㅡ자형 대문채와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에는 안방과 부엌, 찬마루, 광, 대청, 건넌방 등이 자리한다. 특히 부엌 남쪽의 찬마루와 광이 문간방과 연결된 구조는 이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형태는 이후 좁은 집터에 지어진 집장사들의 주택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당시 서울의 주거 형태와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 전통 한옥의 건축적 특징을 이해하기 좋은 곳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34길 28
순정효황후윤씨친가
순정효황후윤씨친가는 조선시대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옥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있는 옥인동윤씨가옥을 본떠서 복원한 것이다. 본래 종로구 옥인동 47-133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겼다. 조선말 윤비의 저택이었다고 전하는 이 가옥의 평면은 전체 ㅁ자형이고 대문은 동향으로 내었다. 사랑채는 대지의 동남 모서리의 전체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누각식으로 꾸몄다. 안채의 대청마루는 통 2칸 전면 3칸의 6칸 대청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기둥머리는 모두 초익공이며 운공을 써서 도리를 받고 있는 짜임새가 특이하다. 사랑채의 지붕은 네귀에 추녀를 걸어 팔 작지붕으로 하고 합각면은 전돌 쌓기로 마감하였다. 창호는 덧문형식으로 살문과 완자창을 달고 있으나 퇴락하였다. 사랑채 고정들창의 세로살을 약간 엇물려 꾸민 의장수법은 볼만하다. 부엌의 박공벽 면에는 낮은 행랑채의 지붕 위에 사롱창을 내어 자연환기를 도모하였는데 새김이 우수하며 박공끝 초각도 전형적인 쇠사리를 쓰고 있고 기둥모서리, 중방 면치기 등(외사모, 실오리, 모쌍사 치기 등)도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34길 28

경희궁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 국가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 불렀던 곳이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26년에 필동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의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건 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2중 월대를 만들었다. 월대 정면에 3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1개의 계단을 놓았는데 임금이 다니는 정면의 가운데 계단에는 소맷돌과 답도를 두어 다른 계단과 차별을 두었다. 원형의 주춧돌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중화전의 내부는 한 공간으로 뚫려 있으며 정면 가운데에 어좌가 설치되어 있다. 남쪽에는 숭정문, 동쪽에는 여춘문, 서쪽에 의추문, 북쪽에는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이 자리 잡고 있다. 1980년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1985년부터 경희궁 터의 발굴조사 및 복원 사업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국대학교의 정각원 건물을 다시 경희궁 터로 옮겨오려 했으나 건물이 노후화되고 변형도 심해 새로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경희궁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숭정전 2중 기단을 근거로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경희궁의 본래 자리에 경희궁 숭정전이 복원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극락사(서울)
1968년 4월 10일 건립된 극락사는 태조 이성계가 ‘절골’이라 이름 붙인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불교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극락사에는 아름다운 정원과 다양한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둘러보기 좋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방문한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91길 100 (망우동)

성덕사
성덕사는 중랑구 상봉동 봉화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주택가가 밀집한 골목에 있다. 1957년에 세운 사찰로 경내 건물로는 대웅전, 종각, 칠성각, 삼신각, 미륵전 등이 있다. 주택가에 있어서 주민들의 신앙생활과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곳은 원래 애동지 전설이 내려오는 터가 센 땅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노인이 산 중턱에서 나무를 했는데, 베어도 베어도 나무가 다시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마을로 도망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는데, 탁발시주를 위해 마을에 들렀던 한 스님이 그곳은 많은 사람의 원한이 서린 곳이라서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치성을 드리고 애동지(음력 11월 초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지 말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아이가 넷인 과부만은 스님이 당부한 대로 매년 치성을 올렸다. 이후 마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을 때, 과부의 아이들은 아프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었다. 과부는 자기가 죽기 직전 자손들을 모두 불러 치성을 올려야 한다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이 일대에 사람이 모여들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공사를 하면 서까래가 무너지거나 기둥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조계종에서 절을 지을 때도 목재를 실어 나르던 황소가 죽고 인부가 여럿 다쳤을 정도였는데, 절이 완공된 이후에는 불의의 사고로 다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드리기 때문이라고 마을 토박이들은 말한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봉화산로 109-8 (상봉동)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 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상군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이다. 울퉁불퉁한 자연 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 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 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명문까지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마애불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내면 정령치로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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