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5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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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리강변유원지
내도리강변유원지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에 위치한 강변 유원지로, 금강 물줄기가 크게 휘어 흐르는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과거 금강이 돌아나가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금회'라 불렸으며,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인 지형에서 내도리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원지 내에는 옛 선조들이 뱃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칠암소와 강물에 비친 산세를 감상할 수 있는 칠암산이 있으며, 강변에는 조약돌과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여름철에는 물놀이와 캠핑, 낚시 등을 즐기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으며, 가족 단위 방문객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야외활동을 즐기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분양서원
무풍면 소재지 남쪽에 있는 국도 30호선 무풍터널 인근에 위치한 분양서원은 본래 달성서씨 문중의 서당이었던 풍성당이었다. 그러다 1901년(고종 38)에 분양정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후 1973년에 분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사당에는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으로 유배된 문신 서섭과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곳 깊은 산속으로 이주하여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들을 살린 서효재를 분향하고 있다. 서원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의 서원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사당 숭모사가 있다. 또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달성서씨 제각 추원재와 3기의 비석이 있다. 분양서원 주변에는 대덕산장터, 민주지산, 덕유산국립공원 등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길 119
백산서원(무주)
백산서원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산 이씨를 비롯해 하위국과 하징도·하정도·하형도·하현도를 배향하고 있다. 1821년 백산영당으로 창건되어 문중 자제와 지역 유생들의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백산서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당과 사당 등 서원 건축을 통해 조선시대 교육과 제향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북리길 40

원통사지
원통사지는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다. 1698년에 건립된 원통사 중창비에 따르면,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창건 시기와 사역, 가람 배치 등은 알 수 없다. 비문에는 조선 숙종 때 승려 탄언과 도영, 혜옥, 일학 등이 법당과 종각을 중창하고 동종을 주조하는 등의 대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보다 앞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유산에 원통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16세기 초반에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통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장인 김동신과 문태서, 신명선, 박춘실 등의 독립 투쟁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1949년에 여수, 순천 사건의 여파로 전소되었으며, 곧바로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복구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원통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본래 사찰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에 건립된 원통사 중창비에 창건 및 중창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무주군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안성면 원통사로 676
적상산성 호국사비
적상산성 내 안국사 경내 남쪽 축대 아래 있는 호국사비는 적상산성과 관계된 기록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호국사비는 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이직이 적상산성을 순찰하게 되었는데, 산성을 수비하고 있던 승병들이 정축란(1637년 호란)으로 모두 도망가고 군량미도 없는지라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사찰 건립을 건의하여 호국사를 창건하면서 세운 비이다. 현재는 글씨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고,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 고적조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비는 전체의 높이가 1.78m이다. 비신은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 赤裳山城護國寺碑]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본문을 새겼는데 높이는 1m, 폭 59㎝, 두께 17㎝이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1050

천일폭포
천일폭포는 적상산 북창마을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드라이브길 중간지점에 수십 길의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길이 약 30m의 천연 폭포다.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폭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적상산성 북문에서 동남쪽으로 보인다. 천일폭포 주차장으로 검색해서 그곳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천일폭포 아래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이곳은 낙석이나 기타 위험 때문에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승용차로 적상산 상부댐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러 구경하기 좋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관음사(무주)
관음사는 무주군 백운산 기슭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 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관음사라는 절 이름은 1958년 안심 승려가 관음사라는 현판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본전인 법보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 겹처마 집이며 그 옆으로 선방인 목우실과 요사가 있다. 법보전에는 1974년 관정, 성효례 승려가 충청남도 금산군 보석사에서 이전한 조선 후기 목조 관음보살을 비롯하여 고서와 1942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산신도 등이 있다. 관음사 법보전 목조 관음보살 좌상은 유형문화재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불상 조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설천면 양지길 92-38
도산서원(무주)
도산서원은 1813년(순조 13) 창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중건하였다. 이후 1997년 현재 위치에 옮겨 세웠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7일에 제사를 지낸다. 향사인물 중 김여석은 자 은경(殷卿), 시호 충목(忠穆)으로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공직에서도 학문 진흥에 관심을 두어 성리학에 관한 책을 펴내 임금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1길 24-13
익산근대역사관
독립운동가 김병수에 의해 지어진 큰 규모의 병원시설이었으나 현재는 익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번화가 거리였던 중앙동에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병수가 1922년에 삼산의원으로 개원했던 건물이다. 연면적 289.26㎡의 2층 건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코스코 장식을 두르고 건물 입구의 포치는 아치형을 이룬다. 8·15 광복 뒤에는 한국무진회사와 국민은행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익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 전시실의 왼쪽 벽면에 남아 있는 금고와 창문틀은 당시 사용했던 실제금고와 당시의 창문 모습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중앙로 12-151 (중앙동2가)

백제도예원
백제도예원은 도자의 이론과 실습을 겸하는 체험 공간이다. 백제도예원은 실생활에 필요한 자신만의 도자를 만들기 위한 곳으로 살아 있는 도자 제작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으며, 강사진은 도예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전문가이다. 100% 천연 흙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친화적이며, 흙을 만지고 빚다 보면 정서적 안정을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는 획일화된 도자가 아닌 자신이 디자인하고 흙 반죽을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직접 빚어서 실생활에 필요한 자신만의 도자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백제도예원은 교과 내용에 밀접한 교육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종합 도예전통문화 체험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하나로 685 (임상동)

남궁찬묘석상
남궁찬묘석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남궁찬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상이다. 석상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오른쪽 석상의 높이는 260㎝, 왼쪽 석상은 250㎝이다. 각진 큰 머리에 구슬 모양 장식을 붙인 모자를 쓰고 있으며 툭 튀어나온 눈과 두툼한 코와 내밀고 있는 턱이 특징이다. 옷은 도포를 걸친 모습으로 선을 가늘게 조각하였으며 양손은 소맷자락 속에 넣고 있다. 석상의 제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석상이 남궁찬의 묘석으로 있기 때문에 남궁찬의 묘를 조성할 때 같이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석상의 얼굴 등이 이국적인 점에 주목하여 중국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전기 묘소에 조성된 석상은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남궁찬묘석상은 안면이나 의습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조선 전기 조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성당면 목사동길 48

두동교회 구본당
두동교회 구본당은 1929년에 건립한 두동교회의 초기 본당이다. 두동교회는 1923년에 마을 부호 박재신의 사랑채에 예배소가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29년에 교인들이 현재의 자리에 ㄱ자형 한옥식 교회를 지었다.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로 1964년 현 예배당이 건립될 때까지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두동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ㄱ자형 교회는 전국에 걸쳐 세워졌으나 지금은 전북 김제 금산교회와 두동교회 구 본당만 남아 있다. 이것은 전통 유교 문화를 교회 건축에 반영한 사례로 우리나라 개신교의 전파 과정과 초기 교회 건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물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길 17-1
금마저수지
금마저수지는 그 모양이 대한민국 지도를 닮았다고 해서 지도연못이라고도 불린다. 새벽 물안개 사이로 보이는 한반도 지형은 너무도 아름답고 독특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미륵산을 발원지로 안정적으로 용수가 공급되는 금마저수지는 1년 365일 물이 마르지 않으며 주변에 축사나 공장 등 오염원이 없어 1 급수의 수질을 자랑한다. 저수지 주변에는 서동공원과 마한관이 있는데 공원에는 백제무왕의 동상과 서동선화공주 조각상 등 많은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마한관에서는 익산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탁 트인 푸르른 금마저수지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보자! 주말에 가족과 함께, 또는 연인과 친구와 함께 나들이를 나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출처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관광홈페이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고도9길 41-64

아석정
아석정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정자이다. 1934년 소진홍이 자신의 선조인 진주소씨 곤암 소세량, 양곡 소세양의 자손이 대대로 살았고, 문정공 약곡 소세양이 퇴휴당에서 활을 쏘던 과녁터 서편에 세웠다고 전한다. 당시 아석정 앞에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며, 넓은 바위도 있어 쉬는 장소로 제격이었다고 전한다. 아석정은 산 중턱에 터를 마련해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조성하고 원형초석에 기둥을 세웠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기둥뿌리와 마루를 구성하는 멍에 사이에 八자형 빗장을 대어 마루를 바치도록 했다. 마루에는 한자 높이의 난간이 설치되었고 亞자와 안상 형태로 뚫은 판자를 대어 바람이 통하게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마룻대 밑에는 건립 연도를 적은 상량문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며 목가구 기법에서도 비교적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일제 강점기 당시의 새로운 건축 수법이 반영되어 있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아리랑로 9-34

수덕정
수덕정은 여산면 태성리 화산 중턱, 남서쪽으로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사각형 정자로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농은 송기인의 뜻을 받들어 1938년에 건립하였다. 초석은 대리석을 흘림기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높이 67㎝의 원형 장초석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평면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서 지면에서 90㎝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난간을 시설했다. 난간은 띠장과 지방 사이에 몇 개의 각재를 끼워 간단히 구성했다. 전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끊어져 있고 그 앞에 두 단의 콘크리트 계단이 각각 놓여 있다. 정지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함석으로 차양을 덧달았으며, 전통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일제 강점기 그 당시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자 바로 옆에는 농은 송기인 선생의 커다란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송기인은 호가 농은이고 본관은 여산이며, 근검절약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 때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몽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정 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장례원 좌장례에 임명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태성1길 199
익산 춘포역사
익산 춘포역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에 있는 역사 건물이다. 이곳은 2005년 11월 11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철도공사 소유이다. 익산 춘포역사는 1914년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 건물이다. 춘포역은 처음에는 대장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익산(당시 이리)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의 보통역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 근처에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면서 형성된 ‘대장촌’이라는 일본인 이민촌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했던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장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로, 일본사람들이 들이 넓다고 큰 대(大), 마당 장(場)자를 써서 대장촌이라고 했다. 이후 1996년에 춘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에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어 지금까지 삼례역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장 쪽 출입구 위에는 캐노피, 철로변에는 직교형 박공지붕이 돌출되는 등 군산 임피역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전형적인 소규모 철도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철로 위의 추억을 간직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춘포역사 전라선에 있는 한적한 마을의 춘포역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철도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철도역사이다. 춘포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실어 나르고, 농사를 짓기 위한 물자가 역을 통해 들어왔다. 화려했던 과거였지만 지금은 역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춘포1길 17-1
남중동 오층 석탑
남중동 오층 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지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현재는 익산시 남중동 이리여자고등학교에 위치하고 있다. 5층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2.74m이다. 기단부는 기단갑석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탑신부는 1층에서 5층까지 완만한 체감을 보이나 기단갑석이 1층 옥개석의 넓이와 같아 안정감이 적어지고 고준해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상륜부는 탑신 정상에 노반과 앙화, 수연이 1매석으로 큼지막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연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24길 8-5

모현동 부도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모현동 부도는 군산의 보천사에 있던 것을 혜봉원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연화당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전체적인 모습은 낮은 사각바닥돌 위로 3단을 이루는 8각 기단을 쌓고,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8각 지붕돌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두 겹의 연꽃잎을 둘러 새겼으며, 그 위로는 가운데받침돌을 괴기 위한 높직한 받침을 하나 더 두었다. 이 받침은 이 부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서 각면이 사다리꼴을 이루며, 위아래에 연꽃무늬 등을 새겨 장식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그에 비해 아주 낮고, 윗받침돌은 8 잎의 연꽃을 새겼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하며,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 위로 둥근돌과 꽃봉오리 모양의 돌을 차례로 얹어 머리장식을 하였다. 높직한 기단이나 길쭉해진 머리장식 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길어 보이는 느낌을 주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을 괴어주는 높직한 받침은 이 부도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는데, 표현된 조각의 솜씨로 보아 훗날에 만들어 새로 끼워 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홈페이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군익로11길 29-11 (모현동1가)

영등동 유적
익산시 영등시민공원 안에는 커다란 무덤 형태의 구릉이 있는데 이는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된 영등동 유적이다. 영등동 유적은 영등동 택지개발 과정에서 유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장방형 집터 3기와 원형 집터 2기 등 총 5기의 집터가 남아 있던 곳이다. 이 중에서 장방형 집터 1기는 본래의 영등동 유적에 있었고, 나머지 4기는 조금 떨어진 주변 지역에서 이전해 온 것들이다. 영등동 유적은 익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이며, 마한 시대의 수장급 묘로 보이는 주구묘까지 조사 됨으로써 익산지역 청동기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고 마한 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궁동로 57

이배원 가옥
이배원 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에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인근에 조해영 가옥과 김병순 고택이 있어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이 집은 현 관리자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이씨집 외에도 당시 함라에는 소위 만석꾼으로 일컬어지는 두 명의 부호, 즉 김씨집(김안균가)과 조씨집(조해영가)이 있다. 이 집은 세 집 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김안균가와 조해영가의 모델로 작용하였으며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 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 뒤쪽 공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천남1길 13

조해영가옥
조해영가옥은 익산 김병순 고택, 이배원 가옥과 함께 ‘함라마을 삼부잣집’이라 불린다. 다른 부잣집과 달리 조해영의 선조들은 예로부터 함라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씨 집안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조해영의 고조할아버지인 조한기인데, 고종 때 사천군수와 정읍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조해영의 아버지인 조용규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18년 조해영가옥을 세웠다. 조용규는 1923년 함라마을의 다른 부자들처럼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였으며, 대륙호모공업 주식 500주를 소유하면서 대주주로서 기업 운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조해영가옥은 본래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랑채, 몸채와 별채 새방채, 행랑채, 농장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 부농 집안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한옥의 변화 과정과 함께 외래문화의 유입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유적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
익산 김병순 고택
익산 김병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 건립되었고, 행랑채는 1930년에 건립되어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개화기 전통가옥 형식에 근대의 건축기법이 가미되는 당시의 시대상과 건축적 특징, 건축양식의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20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은 익산 미륵사지 내 동원과 중원에 있는 2기의 하대석이다. 중원의 석등 하대석은 석탑과 금당지 사이에 있고, 동원의 석등 하대석은 탑과 금당 사이에 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1974년 8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 실시한 [동탑지 발굴 및 서탑 기초 조사] 당시 풍탁 및 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석등을 이루었던 부재들은 옥개석·화사석·상대석·연화하대석으로 하대석을 제외한 부재는 원래 위치를 이탈한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화사석 3개는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상면에는 8개의 연화문이 조각되었는데, 백제 말기 연화문 수막새의 무늬와 같은 양식으로 백제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이 한국 석등의 시원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내

소자파묘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소자파의 묘비다. 1526년(중종 21)에 건립되었으며 진주소씨 익산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65㎝, 너비 93㎝, 두께 23㎝이다. 화강암으로 된 대석은 가로 136㎝, 세로 98㎝, 높이 73㎝이며, 전면과 후면은 2개의 정사각형 안에 용화문을, 윗부분은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4각의 받침돌은 국화무늬를 조각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연꽃과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그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뛰어나다. 비의 전액은 글씨 크기가 약 10㎝로 김희수(1475~1527)가 썼으며 남곤(1471~1527)의 글이다. 비의 뒷면은 이행(1478~1534)의 글이고, 글씨는 크기가 약 10㎝로 성세창(1487~1548)이 썼다. 비의 모습이 완전하고 비문의 글씨도 선명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또한 비의 건립연대가 중종 21년(1526)으로 익산지역에 전해오는 금석문으로서는 가장 빠른 것이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화곡1길 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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