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1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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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이후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 16년이 지난 충렬왕 때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가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에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가 경내에 있다. 또, 동문 쪽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등사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인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가 준비되어 있으며,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으로 나뉘어 있다. 당일형은 짧은 시간 틈을 내 한국의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고, 체험형은 계절 또는 참가자들의 특성에 따라 사찰마다 조금씩 다른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휴식형은 말 그대로 사찰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청룡사(안성)
청룡사는 1265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 국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이라 하였으나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관음 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 국사가 세웠다는 삼층 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 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에 만든 5톤 청동 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기둥)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 지주는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청룡사 주변에는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 성지, 죽주산성 등의 관광지가 있다.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40

칠장사(안성)
칠현산 기슭에 있는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는 사찰로 고려 시대 1014년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1383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역대 실록을 칠장사로 옮겨 8년간 소장해 소실을 면한 일도 있었다. 138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1506년에 흥정이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1623년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사세를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을 비롯하여 혜소 국사비, 철당간 등 지정문화재가 많다. 또한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 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가 있다. 또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 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 시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용문사(용문산)
용문산관광단지에 있는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양평군 용문면의 용문산 자락에 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용문사에는 대웅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이 있다. 용문사에는 나이는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는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15.2m인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문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2km 올라가면 산중턱에 용의 뿔을 닮은 용각바위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1km 더 올라가면 100명가량 앉아 쉴 수 있는 대형바위, 마당바위가 있다. 템플스테이도 운영을 하고 있으며 휴식형 프로그램과 체험형 프로그램 중 원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

현등사(가평)
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1772년 쓰인 운악산 현등사 사적이란 책에 신라 23대 법흥왕 때 인도 승려 마라가미가 들어오자 그를 위해 운악산에 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 희종 6년(1210) 보조국사 지눌이 등불이 거듭 보이는 꿈을 꾸어 운악산을 방문하니 건물 앞에 옥으로 만든 등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다시 크게 지은 뒤 현등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1년(1411) 함허대사 기화가 절을 다시 고쳐 지은 후 왕실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찰로 위치하게 되었다. 영조 39년(1763)에는 화재를 입어 많은 건물이 없어졌고 이듬해 다시 지었으며 계속해서 조금씩 수리를 하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탄 이후 지금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운악산 등산로 입구에 일주문이 있으며 사찰 안에는 불이문, 극락전, 보광전, 지장전, 삼성각, 영산보전, 만월보전, 적멸보궁 등의 주요 건물들이 있다. 현등사에는 보물 현등사 동종을 비롯하여 석탑 2기, 승탑 1기, 불상 2점, 불화 7점 등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12점을 소장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등사길 34
상원사(용문산)
상원사는 용문사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려 시대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암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에 속해 있다.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330년대에 보우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했고, 1398년에 조안이 중창했으며, 무학대사가 왕사를 그만둔 뒤 잠시 머물렀다. 1458년 해인사의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1462년에는 세조가 이곳에 들러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어명을 내려 크게 중수했다고 하는데, 최항이 그때의 모습을 기록한 관음 현상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1463년에는 왕이 직접 거동하였으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그 후 끊임없이 중수되어 왔으나 1907년 의병 봉기 때 일본군이 불을 질러 겨우 법당만 남게 되었다. 1918년 화송(華松)이 큰 방을 복원하고 1934년에는 경언(璟彦)이 객실을 신축했으나 6·25전쟁 때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 없어졌다. 1969년에 덕송(德松)이 복원에 착수했으며 용문사의 암자에서 독립시켰다. 1970년 경한니(鏡漢尼)가 요사(寮舍)를 복원하고 1972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각각 복원했으며 1977년에는 용화전과 청학당을 지었다.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기암괴석과 고산준령을 고루 갖추고 있는 산이다. 본디 미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을 개국하고 이태조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원사길 292

연천 숭의전지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을 비롯하여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천진암 성지
천진암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 선조들의(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유해를 모신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성지에는 성모마리아 상, 천진암 대성당 터, 성모 성당 등 둘러볼 곳이 많이 있다. 36만여 평 성역에 3만여 평의 대성당 건립 터에서는 매년 수 만 명의 신도들이 모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납부하던 지방특산물 대신 쌀을 납부하는 제도로,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100여 년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효종 2년(1651)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효종 10년(1659)에 세운 비로, 원래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김포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으로, 병인양요의 격전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프랑스군이 내륙으로 침투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한성근을 순무 초관에 임명하고 문수산성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프랑스군이 70여 명이 바다를 건너오자 문수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프랑스군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수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조선군이 퇴각하자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의 남문과 성벽을 파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사른 뒤 강화로 다시 돌아갔다. 조선군은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패전했지만 프랑스 군대에 처음으로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포 문수산성은 1694년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1812년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04/4066104_image2_1.jpg)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동구릉(東九陵)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다가 문조의 수릉(綏陵)의 옮겨지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왕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능이 모여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남양주 광릉(세조·정희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 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 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사대석(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능 내부의 방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왕릉 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원을 감소시켰다. 이 방법은 광릉 이후에 조성된 왕릉에 모두 적용되었다. 또, 병풍석이 생략되면서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을 난간석에 새겼다. 이후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능의 이름을 동광릉(東光陵)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 하여 광릉으로 합쳤고, 정자각은 두 능 사이로 옮겨지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고,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권율장군묘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만취당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창녕조씨와 후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권율 장군 묘 뒤쪽 언덕에는 형 권순과 아버지인 권철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이 마모되어 1861년(철종 12)에 장군의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장군의 일대기와 함께 자손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묘 아래에 있는 재실은 묘를 관리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곳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다. 송추IC에서 차량으로 약 10분 소요된다. 인근에 장흥관광지(청암민속박물관, 가나아트센터, 두리랜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송암스페이스센터, 장흥자생수목원 등),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 북한산국립공원, 국립아세안자연휴양림, 필룩스조명박물관, 회암사지 등이 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06/3500306_image2_1.jpg)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와 조선왕릉의 제도를 결합하였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뿐이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고양 벽제관지
고양 벽제관지는 조선시대의 객사인 벽제관이 위치했던 장소이다. 1476년(성종 7)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과 조선을 잇는 곳에 위치하여 당시 중국과의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당시의 고양군청이 훼손되면서 1625년(인조 3)에 이곳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그 원형이 훼손되었고, 조선총독부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벽제관의 부속 건물인 육각정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다. 한국전쟁으로 건물과 담장이 소실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삼문마저 허물어졌다. 현재는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돌의 일부만이 남아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지리적인 위치로 인한 전투와 한중외교사의 역사적인 의미가 인정되어 196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년)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고양 서삼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서삼릉(西三陵)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릉 중 서오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이다. 1537년(중종 32)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현 서울 서초구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1545년(인종 1) 중종의 정릉이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자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합쳐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 서울 강남구로 옮겨지면서 다시 희릉이 되었다. 이후 인종의 효릉(孝陵), 소현세자의 소현묘(昭顯墓, 이후 소경원(昭慶園)), 철종의 예릉(睿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있던 왕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태실(胎室)과 왕자·왕녀·후궁의 묘와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45년 광복 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이 옮겨졌고, 도시화 개발 시기에 왕실 후궁들의 묘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경내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서삼릉이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69/4075769_image2_1.jpg)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한다. 서오릉은 구리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040~1111)의 무덤이다. 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정벌의 공이 컸던 명장·문신이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1988년 2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유엔군 초전기념비
1982년 4월 6일에 건립된 신(新)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초전비는 북한군에 맞서 유엔군이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나타내는 세 겹의 높은 탑신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에는 스미스 부대원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매년 7월 5일을 기하여 죽미령 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추념식이 거행된다. 경기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舊)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본래 오산 죽미령 전투 당시 보병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되었던 1번 국도 건녀편의 99 고지에 위치했으나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기단부는 이전하면서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이후인 199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다시 돌아와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며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오산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소위 UN탑이라 불렸다.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_photo/97/3478597_image2_1.jpg)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출처 :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처인성
용인시 남사읍 아곡리에 있다. 형제봉에서 동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며 돌출된 해발 70.9m의 자연 구릉이다.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길목이자 수원-오산-안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처인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전체 둘레는 351m다. 작은 규모지만 성 내부가 평탄하여 공간효율성은 좋은 편이다. 성벽은 남서쪽이 높고 북동쪽이 낮은 형태다. 성문은 개거식[開据式]이었으며 북동 성벽에 2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낮은 지점은 판축공법으로 성토하는 방법으로 구축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깊게 박고 목수와 목주 사이에 판목을 설치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다짐하여 성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처인성에서는 통일신라 이후의 판축토성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기단석열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류, 대도와 화살촉등이 출토되었다. 축성법이나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처인성은 신라말-고려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인성은 몽고군의 2차 침입시 승전지로 잘 알려져 있다. 호원IC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소요된다. 인근에 장흥관광지,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 등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처인성로 673

화산서원(포천)
화산서원은 1631년(인조 9)에 창건된 백사서원(白沙書院)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즉 이겸(李馦)을 비롯한 포천의 유림들이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가산면 옥금동에 사우를 마련, 그의 호(號)를 따서 백사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1635년(인조 13)에 현 위치인 화봉산(花峰山) 아래로 옮겨 세웠다. 현재 화산서원의 외삼문 현판에 ‘인조을해건(仁祖乙亥建)’이라 새겨져있는 데에서 서원의 창건을 1635년으로 보기도 한다. 1659년(효종 10)에는 이곳 지명을 본떠 화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영조는 임진왜란 당시 이항복의 공로에 감격한 나머지 승지를 화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후손을 등용하도록 특별히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이후 지역 유림들이 사우 터에 제단을 세우고 향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에 화산서원복원추진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복원하였다. 동, 서재·담장·삼문·홍살문 등도 건립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9월 12일을 기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

김포향교
김포향교는 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향교는 원래 김포 여자종합고등학교가 있는 산기슭에 있었으나 왕의 능을 그곳에 모시게 되면서 김포읍 걸포리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재실(齋室)과 출입구인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대성전과 달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명륜당 내부는 일반적으로 좌우 1칸씩 방으로 꾸미는 것과 달리 김포향교에서는 전체를 1칸으로 구성하였다.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기도 김포시 북변중로25번길 38 (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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