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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관광지 71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71페이지입니다.

남고문(나주읍성 남문)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남고문(나주읍성 남문)

나주 읍성의 동문인 동점문을 지나 나주초등학교 방향으로 중앙로를 달리다보면 도로 한복판에 큰 성문이 있는데, 이것이 남내동에 자리잡은 나주 읍성의 남문, 즉 남고문이다. 남고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남문을 나서면서 임금님이 계신 곳인 금성관쪽을 돌아보았다고 하여 남고문이라 했다고 한다. 삼봉 정도전이 나주로 귀향 오면서 여기에 올라 ‘유부로서’를 읊었다고도 한다. (출처 : 나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남내동 2-20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미천서원

미천서원은 영산포에서 다시면으로 가는 길목인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안창동의 철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강당 뒤편에는 미천 서원의 유래가 된 ‘미천'이라는 샘이 있다. 허목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이 우물이 없어서 팔 생각을 못하자 이에 '내가 일러준 곳을 파보면 물이 나올 것이다'고 이야기하였다. 과연 그 곳에서는 물이 솟아나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샘의 이름을 미천[眉泉]이라 부르고 이에 서원 이름의 연원이 된것이라고 한다. 이 서원은 17세기 조선시대 명현인 문정공 미수 허목의 도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16년(1690)에 나주 금강 미천상에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1693년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정조 23년(1799)에는 13대 미천서원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채제공은 허목보다 훨씬 후대 인물이지만 허목의 학문을 따르고 미천서원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추배하게 된 것이다. 1711년 홍명한이 중수하고 1715년에는 강당과 재실을 중수하였다. 그 후 철폐되었다가 영조 47년(1771) 이전에 사우가 중건된 후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으로 2차 철폐을 당하였다. 서원이 철폐되자 영당과 장판각은 허목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의 영당마을로 옮겨졌다. 1893년에 다시 미천서원의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이 복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영정을 이안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강당도 함께 중건되었다. 1930년 조기중이 강당 일부를 중수하였고 1937년 허영규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이곳에서 차량 이동 4분, 약 2.8km거리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나주철도공원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미천서원길 14-11

정열사비
문화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정열사비

정열사는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 선생을 비롯한 나주의 충절 인물 다섯 분을 모신 사우이다. 의병장 김천일은 중종 32년 나주에서 태어나 전란 시 각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직후 장수 여인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순절한 사건은 유명하다. 정열사가 최초로 건립된 것은 선조 39년(1606)으로서 현 나주 고교 뒤편 월정봉 아래에 위치했다가 이듬해인 1607년 정열사로 사액되면서 사우를 현 나주 잠사 공장 부근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여러 번 자리를 옮기고 보수를 거치면서 1984년 현재의 대호동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서 팔작지붕이고, 내삼문과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평대문이다. 정열사비는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장유 선생이 지었고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국내 전투 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 이곳에서 차량 이동 7분, 약 3.8㎞ 거리에 국립나주숲체원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정렬사길 43 (대호동)

죽림사(나주)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죽림사(나주)

죽림사는 백제 비유왕 24년 경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죽림사기를 쓴 이곡산인은 사찰 기록의 부록에 창건시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전, 3당, 2실, 3요, 6암, 1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극락보전, 영산전, 청향각, 삼성전 등이 있다. 내부공간은 실내에 기둥이 없어 통칸으로 처리하여 개방감을 준다. 천정은 층단을 둔 우물천장이며 불단위에 보개를 얹었다. 특이한 것은 불단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개구부의 문은 모두다 띠살창인데 정면과 우측면에 출입문이 있을 뿐 아니라 배면에도 문이 있는 것은 독특한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대지가 좁고 단차가 심한 곳에 위치하였으나 아담하고 가구구조가 간결한 건물이다. (출처 : 나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남평읍 풍림죽림길 255

광성보
역사관광인천광역시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구룡포해수욕장
자연관광경상북도

구룡포해수욕장

구룡포는 신라 진흥왕 때 장기 현감이 고을을 순찰 중 용주리를 지날 때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쳐서 급히 민가로 대피했는데 이때 용두산 해안 바다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후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부른다고 한다. 지리적 특성은 구릉지가 많고 평지가 적으며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한 기후로 15.8㎞의 긴 해안선에 둘러싸여 있다. 구룡포항은 수산업 중심지이자 어업전진기지로서 근해어업이 발달했고 주로 오징어, 꽁치, 대게 등의 어획고가 많다. 등대와 갈매기, 귀항하는 어선을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겨울철 해돋이는 보기 드문 장관이다. 반달형의 백사장은 길이 400m, 폭 50m나 되어 야영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선호한다. 해수욕을 할 수 있는 구역과 수상레포츠를 할 수 있는 곳이 분리되어 안전하게 바나나보트, 모터보트, 제트스키 등 수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오징어 맨손 잡기 축제도 진행된다. 해안경관이 수려하고 피서지로 각광받는 구룡포 해수욕장은 포항에서 24㎞, 구룡포읍에서 1.5㎞쯤 떨어져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426번길 6

양천향교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양천향교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양천향교는 서울에 유일하게 남은 향교로,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조 태종 12년(1411)에 건립됐으며 1963년 경기도 김포군 가양리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교가 되었다. 양천향교는 과거 일제 강점기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제향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과 부속건물 등 8동이 있다. 현재 양천향교에서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석전을 봉행하고 있으며, 지역주민과 초,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문과 서예 및 사군자 등을 가르치는 등 청소년의 인성교육 및 옛 전통문화 재현에 노력하고 있다. 양천향교 외삼문 앞에 있는 유예당은 2007년 강서구청에서 신축한 것으로 유예당 놀이마당에서는 문화행사와 각종 민속놀이를 공연한다. 주변의 겸재정선미술관, 궁산땅굴역사전시관, 궁산근린공원, 소악루, 고성지 등과 연계 방문이 가능하며 서울도보해설관광 양천로 겸재정선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양천향교는 수도권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2번 출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로47나길 53 (가양동)

서울 양천고성지
역사관광서울특별시

서울 양천고성지

양천고성지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궁산 정상부의 주능선과 가지능선 상단부를 에워싸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궁산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한강 하류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지였다. 성은 북쪽이 한강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보이며, 성의 길이는 약 220m, 면적은 29,370㎡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여러 옛 문헌에 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적심석과 성돌 등 성벽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이곳에 머물다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행주산성·오두산성과 함께 한강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포항 장기읍성
역사관광경상북도

포항 장기읍성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위치한 장기읍성은 이 고장의 진산인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고려시대 1011년(현종 2년) 당시 여진족이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1439년(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성으로 재축된 후 군사기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일제의 잔혹함은 이 읍성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안의 모든 관아 등 시설이 파괴되고 지금은 동·서·북문의 터와 수구 1개소, 12개소의 치성 4개소의 우물, 3개소의 못 등으로 옛 성의 모습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으며 단지 향교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고, 허물어진 성벽은 복원 중에 있다. 읍성이란 지방의 관부와 민거를 둘러서 쌓은 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읍성 둘레 2,980척(약 1,392m), 높이 10척으로, 성내에는 우물 4개소, 못 2개소가 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읍성의 규모와 이 기록에 별 차이가 없다. 축조 방법은 산성적 읍성으로 한국에서는 매우 귀한 존재이며, 현존 남아 있는 읍성 중 보존상태가 좋아 읍성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56

포항 발산리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
자연관광경상북도

포항 발산리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

포항 발산리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은 해안에 인접한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발산리의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모감주나무 군락지 중 크기와 면적, 개체 수가 가장 크고 많은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병아리꽃나무와 함께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아 보호되고 있다. 모감주나무는 일명 염주나무로 불리는 나무로, 세계적인 희귀종이다. 큰 나무의 경우 높이가 15m에 이르며 줄기가 굵으면 위쪽으로 가지가 퍼져 자란다. 잎은 봄에 돋고 가을에 지며, 한여름에는 노란 꽃이 피고 10월이면 열매가 익는다. 병아리꽃나무는 키가 작고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로, 4~5월에 청초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지름 4㎝ 정도 되는 꽃잎 4개의 백색 꽃이 가지 끝에 핀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호미로2122번길 64

수국사(서울)
사찰서울특별시

수국사(서울)

수국사는 1459년에 세조의 큰 아들 승(덕종으로 추존)의 왕생을 위해 고양군 동쪽 봉현에 능침사찰로 창건을 명한 정인사(正因寺)의 후신이다. 하지만 재목이 부실하다 하여 1471년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가 판내시부 이효지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여 총 119칸의 규모로 중창하는데, 당시 사격이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1721년에는 서오릉에 소재하는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안장된 명릉(明陵)의 능침사찰로 지정되면서 이름도 수국사로 바뀌었다. 순종이 태자 시절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승병의 최고책임자인 총섭 월초스님의 기도로 쾌차되어 이를 계기로 고종의 후원을 얻어 1900년 수국사를 중창하였다. 그 뒤 6·25 전쟁으로 옛 모습은 잃었지만,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하여 중창을 거듭해 오다 1995년 황금법당을 지었다. 현재 수국사에는 고려 후기 불상인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907년에 제작된 불화 6점이 남아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서오릉로23길 8-5 (구산동)

북한산국립공원(서울)
자연관광서울특별시

북한산국립공원(서울)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이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자원을 온전히 보존하고 쾌적한 탐방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6.922㎢의 면적을 차지하며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중생대 때 관입된 화강암이 주된 암석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을 구성하고 있는 화강암 지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 침식되면서 보른하르트(Bornhardt), 토르(tor), 판상절리, 수직절리, 타포니(tafoni), 나마(gnama), 그루브(groove) 등 다양한 미지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고생대부터 화강암의 지반이 융기 및 침식되어 지금으로부터 약 2억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중엽의 대보조산(大寶造山) 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지질명소로는 인수봉, 사모바위, 구천계곡 등 능선과 계곡을 따라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수도권 최고의 야외 지질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이 빚어낸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 우이암, 오봉은 도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북한산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긴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 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한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국문로 262 (정릉동)

상달암
역사관광경상북도

상달암

포항 상달암은 양동마을 경주손씨 입향조이자 조선 전기 문신인 손소의 묘를 조성할 때 묘소를 수호하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분암이다. 인근에 있던 분암(제사를 위한 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1484년에 중건된 재실 건축으로, 이후 1595년과 1786년에 각각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달암은 ㄱ자형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건물로, 1484년 중건 당시 누마루(화수루) 부분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가적지붕(본채의 맞배지붕에 덧댄 지붕)의 독특한 지붕 구성은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판단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한 유교 시설로서의 재실로 변모해 간 역사적 전개과정이 기록과 건축 유구를 통하여 확인되는 중요한 사례이다. 상달암은 조선시대 묘소 수호와 제사를 수행하는 재사 건축으로 15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지정유산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새마을로766번길 21

남성재
역사관광경상북도

남성재

남성재는 고려시대의 문신 영일 정 씨의 시조 형양공 정습명(?~1151)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로 1722년 후손들이 묘소에 묘단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1742년 현 위치에 묘단과 석상을 신축하였다. 이후 1751년에 묘단 위에 비를 세웠으며, 이듬해 1752년에 비로소 재실을 건립하였다. 창건한 재실이 오래가지 못하고 퇴락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지대가 높은 곳에 1784년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785년에 19칸 규모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 재목이 약하여 기둥이 기울고 도리가 처지며 서까래가 부러지는 등 많이 훼손되어 1801년에 옛 관청의 객사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정당 3칸, 재실 4칸, 부곡채를 합하여 총 14칸으로 1808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현존하는 남성재의 모체이다. 1858년부터 수년에 걸쳐 중수한 바 있으며, 현재는 대문채, 동재, 서재, 재실 등이 남아 있으며 매년 4월 영일 정씨 대종회에서 시조 형양공 단향제를 지낸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송면 남성안길 18-16

웅천왜성
역사관광경상남도

웅천왜성

남문동에 있는 남산(184.5m) 산봉우리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와가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왜군의 제2 기지로 삼던 곳이다. 웅천읍지에 따르면 원래 남산은 3개의 봉우리가 있었으나 이를 깎은 뒤 일본군이 산의 정상부에 본성을 두고 능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적으로 제1외곽, 제2외곽을 질서 있게 배치하여 축성하였다고 전한다. 육지로부터 방비를 철저하게 하기 위한 것인 듯 남북으로 긴 돌담이 쌓여 있으며 돌담 서쪽에는 해자를 2중, 3중으로 두어 공격에 대비하였다. 성내의 넓이는 약 17,930㎡ 정도이고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3~8m에 이른다. 축성에 사용된 성석은 현무암과 청석이 대부분이며 현재 남은 성벽 길이는 700∼800m 정도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신돌석장군 생가 및 유적지
역사관광경상북도

신돌석장군 생가 및 유적지

신돌석장군 유적지는 어린 나이에 항일구국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의병 신돌석 장군(1878~1908)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조약 이후 의병을 일으켜 영덕, 영양, 울진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되었다. 신돌석장군 생가지는 장군의 부친인 신석주가 1850년경 초가로 건립하였으나, 1940년경 일본관헌들이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불태워 소실되었다. 1942년에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으며, 1995년에 현재의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유적지 내에는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처럼 호랑이 옷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고 실내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신돌석 의병장의 약력, 설화, 태백산 전투 등의 내용과 일제 침략의 만행과 그에 항쟁하던 의병 활동의 기록,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당시 의병들이 사용하던 장도 화승총, 창검류 둥 유물 18점 전시되어 있다. 외부에는 27세 나이에 나라를 걱정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우국충정의 마음을 읽었다는 월송정 시비와 장군의 어릴 적 설화부터 의병 활동을 알 수 있는 일대기를 이야기 형식의 기록물과 신돌석 장군 돌 들기 체험, 활쏘기 체험이 있어 어린이들도 쉽고 재미있게 구한말 의병 활동을 이해하고 호국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신돌석장군길 218

건봉사
역사관광강원특별자치도

건봉사

금강산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사찰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승려 아도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승려 발징이 절을 고쳐 짓고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 의식)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조 2년(1456)에 임금이 행차하여 이곳을 왕실의 안녕을 비는 왕실 원당(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지으며 큰 사찰이 되었다. 조선 고종 15년(1878)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 다시 고쳐 지었다.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규모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터는 휴전 하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부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광덕사(천안)
역사관광충청남도

광덕사(천안)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광덕산 동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기·충청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이 많이 되었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3층 석탑이 남아 있으며, 팔각 형태의 지붕을 삽입하여 건축양식이 특이한, 새로 지은 종각과 대웅전, 천불전이 있다. 또한 대웅전 입구에 있는 수령 400여 년의 높이 20여 미터 호두나무도 볼만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광덕사는 계절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며, 천안은 호두과자를 만드는 호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26

남미질부성
역사관광경상북도

남미질부성

남미질부성은 포항시 흥애읍 남성리, 중성리, 망천리 일대에 있는 신라시대 성곽이다. 흥애읍 남쪽 평지에 돌출된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토성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약 2km이다. 성 안에는 남성리 못산마을이 있고, 이 마을 서쪽 구릉지에는 성주의 무덤인 듯한 고분이 9기 정도 있다. 못과 우물도 한 개씩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504년 9월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등 12개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실성이 지금의 남미질부성에 해당된다. 동국여지승람 22권 흥해군 고적조에 따르면 고려 태조 13년 북미질부성의 성주 훤달과 남미질부성의 성주가 함께 항복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는 이 성이 흥해군 일대를 다스리는 중심 성곽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축성 당시의 이름을 알 수 없어 후대에 행정구역이나 산 이름을 따서 임의로 이름이 붙는 대부분의 성곽과는 다르게 남미질부성은 축성 당시의 이름이나 연대가 확실하고 포항 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연일향교
역사관광경상북도

연일향교

연일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연혁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숙종 때 대송면 성좌동에 중창하였고, 고종 8년(1871)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연일향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25분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소박하고도 단정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유동길48번길 5 (효자동)

공주 석장리 유적
역사관광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유적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 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차에 걸쳐 연세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하였다. 유적에서는 찍개, 긁개, 주먹도끼, 새 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터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 년에서 3만 년 전의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 전나무, 목련, 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금벽로 990 (석장리동)

수리치골 성지
사찰충청남도

수리치골 성지

공주 수리치골 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 신자(교우)들이 숨어 살던 곳으로 성모성심회가 조직된 뜻깊은 장소이다. 중국에서 사제로 서품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1845년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수리치골로 피신했으며 성모성심회를 조직해 신앙활동을 이어갔다. 수리치라는 취나물이 많이 나는 골짜기라서 수리치골이라 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기,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곳에 교우촌이 있었는데 그중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경기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있던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2012년 수리치골 성지로 옮겨와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또, 신앙인들을 위해 피정의 집을 운영한다. 아름답고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신앙인들의 피정에 좋은 환경으로 개인피정과 단체위탁피정 모두 가능하며 연중 신청을 받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역사관광충청남도

공주 계룡산 중악단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창건한 신원사(新元寺)의 산신각이다. 산신은 원래 산하대지(山河大地)의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산신제는 민족정기의 고양과 모든 백성의 합일(合一) 및 번영을 기원하던 팔관회(八關會)를 후에 기우제, 산신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제단의 명칭은 계룡산 신 제단이라는 뜻에서 계룡단(鷄龍壇)이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묘향산과 지리산 산신각을 각각 상악단(上嶽壇)과 하악단(下嶽壇)이라 하고 두 산의 사이에 있는 계룡산 산신각을 중악단(中嶽壇)이라 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철거되었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가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양식을 그대로 축소하여 만든 건물의 안에는 산신도(山神圖)가 모셔져 있다. 산신제는 예부터 내려온 산악신앙인 바,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소실되었고 이 제단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 백제 시절의 고찰, 신원사 * 신원사(新元寺)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로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이 절은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창건하고 그 뒤에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1876년 보련 화상이 고쳐 짓고 1946년 만허 화상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의 건물지는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전개된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금당지를 중심으로 신원사의 원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나 조사의 결여로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금당지로 믿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오층의 석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본래의 사역이었음을 쉽게 알게 한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역사관광충청남도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자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새로 나는 장소, 은총의 배움터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 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사학죄인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할 경우 사형 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제민천변 황새바위에서 참수 처형 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위치는 지리학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4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에 내려와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포교회는 곧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기록상 마지막 순교자를 낸 1889년까지 100여 년 간 공주는 박해의 땅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처형 되었고,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약 1,000여 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 년 순교 역사의 현장이다.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었기에 천주교인들이 가장 많이 처형된 곳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118 (금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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