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관광지 47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47페이지입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
롯데월드는 롯데 그룹이 국민들의 여가 선용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이다. 모험과 신비를 주제로 한 실내 주제공원인 롯데월드 어드벤처, 호수공원인 매직아일랜드, 쇼핑몰, 민속박물관, 아이스링크, 호텔, 백화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광, 레저, 쇼핑, 문화를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단위 복합생활공간이다.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마파크로, 최첨단 탑승시설과 환상적인 퍼레이드, 각종 영상 시스템, 레이저쇼, 공연, 각국의 음식을 연중무휴로 즐길 수 있다. 민속박물관에는 한국의 오천 년 역사와 민속 문화가 역사전시관, 모형촌, 놀이마당, 저잣거리로 나누어져 쉽고 재미있게 재현되어 있다. 롯데월드 가든스테이지는 롯데월드 공연의 중심무대로 각종 시즌 뮤지컬 쇼, 공개방송 등의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며, 롯데월드 스타에비뉴는 한류스타 조성거리로 체험형 엔터테인먼트 시설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240

용산가족공원
용산가족공원은 넓은 잔디밭과 연못을 중심으로 서구풍의 분위기를 갖춘 공원이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임오군란, 갑신정변, 러일전쟁, 그리고 1906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 왜군, 청나라 군사, 일본인들이 군 시설 및 거주지로 사용한 곳이다. 1992년에는 6.25 전쟁 시기에 UN군 및 주한미군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은 남산과 한강 사이에 위치해 서울시의 남북 녹지 축의 연결고리로서 중앙공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곳은 넓은 잔디밭, 연못, 산책로, 화장실, 야외조각품, 운동시설,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 편안한 휴식이 가능하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85 (용산동6가)

국립산림과학원(홍릉시험림)
홍릉시험림은 서울의 동쪽 천장산(天藏山, 141m)의 남서 자락에 위치하며 ‘홍릉’의 유래가 되는 명성황후의 능터와 함께 근대 임업시험 연구의 최초 시험지라는 역사적, 문화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곳은 임학적 관점에서 1922년 임업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을 조성한 곳으로써 여러 가지 임업시험 및 연구과제를 수행 중이며, 국내외 다양한 식물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평일에는 유치원생, 초·중·고 및 대학생의 생태학습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1993년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개방하여 도시민의 자연학습 및 환경교육을 위하여 공헌하고 있다. 현재 약 41.8ha 면적에 침엽수원, 활엽수원, 초본식물원, 관목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평일은 숲해설가와 함께하는 숲해설 프로그램 참여만 가능하다. 예약은 인터넷 예약으로만 가능하며, 예약인원이 4명 미만 시 예약이 취소될 수 있다. 또한, 주말에는 예약 없이 입장 및 참여가 가능하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7 (청량리동)

개운사(서울)
안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개운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현재는 김포에 위치하고 있지만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이 절은 1396년(태조 5 )에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안암산 기슭,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1779년(정조 3) 5월에 정조의 후 궁 원빈(元嬪) 홍 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명인원(明仁圓)이 세워지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스님이 영도사를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절을 옮겨지었다고 하였으나 사기(寺記)라는 문현에는 1730년(영조 6)에 영도사가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개운사는 20세기 이후에 한국 교육불사와 불교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해 왔다. 1926년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고 이 절의 암자인 대원암에 탄허(呑虛) 스님이 머물면서 역경(譯經)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이지만 최근까지 태고종에서 관리하였으므로 1955년에 대처승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全國布敎師大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81년부터 중앙승가대학이 이곳을 교육도량으로 사용하면서 현대사 속에서의 개운사 전통을 꽃피우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명부전을 세우고 나서 7년 후인 1880년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73 (안암동5가)

도선사(서울)
우이동 서쪽에서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를 향하여 계곡을 따라 약 1㎞쯤 올라가면 일주석에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 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고 쓰여진 산문(山門)을 맞게 된다.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사는 862년(경문왕 2)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는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주장자로 갈라 마애관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보초 임무)을 서기도 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863년(철종 14) 김좌근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을 신축하였고, 1887년(고종 24)에는 임준이 오층탑을 건립하였으며, 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왕문, 범종각, 종무소,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법당의 내부 벽에는 달마(達磨)와 혜능(慧能), 청담(靑潭)의 영정이 그려져 있으며, 후불탱화, 팔상도(八相圖),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 현재 도선사에는 마애불입상(제34호), 목조 아미타불 및 대세지보살상(제191호), 석조독성상(제192호), 청동종 및 일괄유물(제259호) 등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을 비롯해 19세 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등의 성보문화재가 다수 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도선사길 278 (우이동)

봉원사(서울)
천년고찰이자 전통사찰인 봉원사는 2011년 전통사찰로 등록되었으며, 2014년 7월에 아미타괘불도와 범종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신행단체로는 관음회, 화엄회, 합창단, 민화회의 법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부설기관으로는 영산재 보존회, 영산재연수원, (사)한국불교영산재보존회와 범패교육기관인 옥천범음대학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도심 속에 위치한 봉원사는 전통불교의식인 영산재를 국내는 물론 국외로 홍보하며 또한 계승발전을 통해 전통불교의 총본산의 위상에 걸림이 없고, 생활 속에서의 불심증장 도량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원동)

봉은사(서울)
봉은사는 서울의 중심지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이다. 794년 연화국사가 창건하였고 처음엔 견성사라고 하였다. 이후 1498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선릉)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로 바꿨다. 조선조에는 조계종을 대표하는 선종 수사찰로, 근대에는 역경사업과 도제를 양성했던 동국역경원이 세워진 터전이다. 오늘날 봉은사는 수행 중심의 사찰 운영으로 새로운 불교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대학, 경전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양질의 한국불교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 또한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승가사(서울)
승가사는 신라 낭적사의 수태스님이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존경받던 서역 승려인 승가대사의 거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각산 남쪽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암벽을 뚫어 승가대사의 상(보물 제1000호)을 봉안하였는데, 고려시대 이예가 쓴 『삼각산중수승가굴기』에 승가사 창건의 경위가 대략 실려 있다. 또한 고려시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조성된 절 뒤편 암벽의 마애불(보물 제215호)은 고려 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나라에 큰 난리나 재해가 있을 때 왕이 친히 이 마애불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특히 불교가 억압당하던 조선 초에는 함허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성원스님이 마애불 앞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탐욕·노여움·어리석음을 없애고 깨달음에 이르게 해 달라는 주문)를 꾸준히 외워 득도하는 등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중생의 기도처였던 승가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종단정화를 계기로 1955년부터 도원·상륜·정호스님이 연이어 주지를 맡아 도량을 새롭게 꾸며 과거의 명성을 찾아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4길 213 (구기동)

흥천사
최초 흥천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지금의 정동 일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1397년에 완공된 흥천사는 170여 칸에 달하는 큰 규모였고, 이듬해에는 북쪽에 사리전도 세워졌다. 흥천사는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되어 왔다. 왕실의 제사와 치병 기도, 가뭄 때는 기우제등이 열리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고, 선조 2년(1569년)에는 함취정 자리로 옮겨 ‘신흥사’로 불렸다. 이후 정조 18년(1794년)에 다시 현재 자리로 옮겨 중창되었다. 고종 2년(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절이 크게 고쳐졌고, 본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직접 쓴 흥천사 현판은 지금도 전해지며 사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동)

화계사(서울)
화계사는 원래 부허동이라는 곳의 보덕암이라는 암자였으나 그 후 보덕암을 중종 17년(1522)에 남쪽 화계동으로 옮겨 법당과 요사채를 짓고 화계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도월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북한산의 핵심인 삼각산의 동남쪽 칼바위 능선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심과 가깝고 주택가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숲과 계곡이 감싸 안아 자연에서 주는 편안함과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북구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화계사는 숭산스님에 의해 시작된 관음국제선원의 산실로서 외국인 승려들과 불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이기도 하다. 화계사에서는 매일 사시 예불 및 기도가 있으며 매주 일요일에는 가족 법회가 봉행되고 있다. 화계사는 교육의 도량이기도 하다. 화계사불교대학은 2002년 인가를 시작으로 매년 700여 명의 불자들이 교육받고 있다. 기초교리 과정과 천수경, 예불, 반야심경과 의식 등을 배우는 교양과정이 각 3개월간 진행되며 2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주간·주말반으로 나누어 실시하고 대학원과 경전반을 각 1년 과정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도회, 청년회, 나한대학생법회, 학생회, 어린이회 등의 신행 단체와 신도회 안에 거사회, 합창단 각종 봉사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 (수유동)

경복궁
경복궁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 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궐(창덕궁)이나 서궐(경희궁)에 비해 위치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진 왕들을 보면 제2대 정종, 제4대 세종, 제6대 단종, 제7대 세조, 제9대 성종, 제11대 중종, 제13대 명종 등이 있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 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경회루와 향원정의 연못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근정전의 월대와 조각상들은 당시의 조각미술을 대표한다. 현재 흥례문 밖 서편에는 국립고궁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경복궁 내 향원정의 동편에는 국립민속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의 주요 문화재로는 사적 경복궁, 국보 경복궁 근정전, 국보 경복궁 경회루, 보물 경복궁 자경전, 보물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경복궁 아미산굴뚝, 보물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보물 경복궁 풍기대 등이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미국의 국민 TV 쇼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서는 ‘BTS위크’라는 이름을 붙여 닷새간 BTS 특별 방송을 진행했는데, 그중 BTS가 ‘맵 오브 더 솔 : 페르소나’ 미니앨범 수록곡 ‘소우주’와 ‘IDOL’을 부른 장소가 화제다. 그 장소는 바로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인 ‘경복궁’의 경회루와 근정전이다. 보랏빛 조명에 아름답게 빛나던 경복궁에서 한국의 과거를 체험해 보길 추천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덕수궁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 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_photo/57/4063057_image2_1.jpg)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종묘에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렀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五廟制)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조·부)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別廟)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世室, 대대로 정전에 신주를 모심)’과 ‘조천(祧遷,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김)’의 예로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祔廟禮,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 때 정전에 처음 신주가 모셔지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하여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되어 현재의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그 밖에 종묘 경내에는 망묘루(望廟樓, 종묘서(宗廟署)의 관원들이 제례에 관한 업무를 보던 곳), 향대청(香大廳,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재궁(齋宮, 왕과 세자가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 전사청(典祀廳, 제사의 음식을 마련하는 곳) 등의 건물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창경궁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인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점은 광화문을 비롯한 성문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서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광화문은 그중에서도 홍예문을 셋이나 내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어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 문양은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관악산 낙성대공원
낙성대공원은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년∼1031년)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붙은 이름이다. 1973년 서울특별시에서 주변 지역을 정돈하여 사당과 부속건물을 조성하였다.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어 안국사라 하여 장군의 영정을 모셨고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떠 세웠으며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문 안에는 낙성대 3층석탑을 강감찬 장군 생가터에서 옮겨왔으며,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다. 공원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계절 따라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어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자작나무숲, 소나무숲, 참나무숲, 사시나무 군락지, 전나무숲 등이 형성되어 있으며 산책로의 길이는 총 3㎞에 이른다. 그 외에도 연못과 야외놀이마당, 야외예식장도 있다. 위치가 서울대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 서울 남부지역의 명소가 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로 77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서울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서울성곽은 서울 한양도성의 옛 이름이며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 동쪽에 있는 큰 문이라 하여 동대문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 때 건립했으며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고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중에서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수도권 지하철 1호선, 4호선 동대문역 9번 출구 바로 옆에 있다. 도보로 5분 거리에 성곽공원과 한양도성박물관이 있고 DDP와 동대문시장 등의 서울 명소가 있어서 같이 돌아보면 좋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서울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은 방이동 일대 낮은 구릉의 능선부에 축조된 백제시대의 무덤들이다. 1970년대에 발굴 조사한 뒤 고분 및 외형에 대한 수차례의 발굴 및 정비공사를 거쳐 지금 모습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무덤은 8기로 서쪽 높은 지대의 4기와 동쪽 낮은 지대의 4기이다. 제1호분과 제4호분, 제6호분 등은 깬돌로 쌓은 궁륭식 천장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백제 전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제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조사되었다. 도시 개발로 사라진 제4·5호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것은 10기 중에 4기(1·4·5·6호분)뿐이므로 나머지 무덤들(2·3, 7~10호분)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고분군은 발굴 조사하기 전에 이미 도굴되어 유물이 많이 출토되지는 않았으며, 제6호분에서 회청색 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전형적인 신라 토기들이 출토되어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성백제지역이었던 서울 우면동, 하남 광암동, 성남 판교 등지에서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이곳 고분군이 백제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로 219 (방이동)

보신각터
보신각터는 도성 안팎에 시간을 알리는 종루 보신각이 있던 곳이다. 보신각은 일명 종각이라고도 하며 조선 고종 32년(1895) 보신각이란 사액을 내린 데서 이름 지었다. 태조 4년(1395) 처음 지어진 후 4번이나 불타 없어지고, 8번에 걸쳐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 8월 서울시에서 지은 것으로, 동서 5칸, 남북 5칸의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보물 제2호인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에 만들어져 원각사에 있다가, 절이 폐사된 후 광해군 11년(1619)에 현재의 보신각 자리에 옮겨졌다. 보신각종은 오전 4시에 33번, 오후 7시에 28번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종을 칠 수 없게 되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종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현재 신각에 걸려 있는 종은 1985년 국민의 성금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 그해 광복절에 처음 타종하였다. 해마다 12월 31일이면 보신각 인근은 차량이 통제되고 새해를 맞이하는 타종식을 함께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54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유적으로 1398년 조선 태조가 창건했다. 문묘는 유교를 집대성한 성인 공자를 비롯하여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고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중국 당나라 때 공자가 문선왕으로 추봉 됨에 따라 문선왕묘라고 부르다가 원나라 이후 문묘라고 하였다. 전묘후학의 건물 배치 형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제향 구역인 문묘는 앞에, 교육을 실시하는 강학 구역인 성균관은 뒤에 두었다. 제사를 담당한 제향 관련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서무, 비각, 삼문(신삼문), 동삼문, 제기고, 전사청, 수복청, 향관청, 포주 등이 있다. 교육을 담당한 강학 관련 건물로는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재·서재, 존경각, 육일각, 진사식당, 정록청, 비복청, 서리청, 비천당 등이 있다. 주요 건물인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삼문(신삼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나머지 유적들은 1964년 11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명륜당 앞쪽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시대에 제향과 유학 교육을 담당한 유교의 중심지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건축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도 가치가 큰 유적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

아차산성
광진구 광장동 한강 북쪽에 있는 해발 285m의 아차산에 있는 아차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쌓은 큰 성이다. 또한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하류의 남쪽에 있었던 백제의 왕성을 빼앗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성으로 끌고 와서 죽인 곳이기도 하다. 한강 하류를 장악한 신라에 있어서도 고구려를 공격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야망을 미리 막기 위하여 싸움터로 나왔던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이라고도 한다. 이때 사랑하는 남편 온달장군의 주검을 거두기 위하여 천 리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려온 고구려 평강공주의 슬픈 사랑 노래가 한강을 따라 천여 년을 흐른 곳이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의 1차, 2차 발굴에서 고구려 성벽과 건물터, 연못터가 확인되었고, 2015년부터 이뤄진 발굴을 통해 신라의 배수구 시설과 고구려 토기 등 삼국시대 유물이 다량 발견됐다. 아차산성 남벽 90m 외벽에선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 시설과 출수구(3곳), 내벽에선 입수구(2곳)가 발견됐으며, 감시 초소인 망대지에선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과 방대형 시설 등이 확인됐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서울 암사동 유적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서울 암사동 유적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방사선탄소측정에 따르면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여러 차례 발굴조사 결과 40기 이상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발견되었다. 한강을 중심으로 어로와 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집터는 바닥을 둥글거나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로 팠으며, 크기는 길이 5~6m, 깊이 70~100㎝ 정도이다. 집터 가운데에 돌을 두른 화덕자리도 보이며, 입구는 주로 남쪽을 향한다. 기둥구멍은 보통 4개이며,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도 출토되었다.서울 암사동 유적은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75 (암사동)
서울 풍납동 토성
풍납동 토성은 백제 한성기 시기에 흙으로 쌓은 평지성으로, 배 모양을 띠는 성곽이다. 현재는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유실되어 약 2.7㎞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총 둘레 3.7㎞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고구려 국내성이나 신라 월성보다도 크고 웅장하다. 초기 성벽 높이는 10.8m였고, 두 차례 증축을 통해 최대 13.3m에 이르는 대규모 성으로 확장되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상류층 유물인 청동초두, 허리띠장식 등이 출토되며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되었고, 1936년 조선고적 제27호로 지정된 후 1963년 국가지정 사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내부에서는 백제 초기 도로 유구, 대형 수혈건물지, 기와 건물지,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제사 관련 유물이 확인되며, 2000년부터는 6개 권역으로 나뉘어 보존·복원이 진행 중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국립서울현충원
국립현충원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영령들이 안장된 국립묘지이다. 국가유공자의 유골, 유해를 안장하고, 그 충과 의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을 주봉으로 하여 동작의 능선이 병풍 치듯 3면을 감싸고 있으며 앞에는 한강이 굽이쳐 돌고 있다.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되어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으며, 기관 명칭은 1996.6.1 국립묘지관리소에서 국립 현충원으로 변경하였다. 43만여 평의 이곳 성역에는 구한 말의 의병들을 위시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신 애국지사,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국가 유공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다 장렬히 산화하신 국군 장병과 경찰관, 예비군 등 165,000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영령은 현충탑 내 위패 봉안관과 묘역에, 무명용사는 납골당에 안장되어 있다. 경내에는 현충탑, 현충문, 충성분수대, 현충지, 현충관, 사진 전시관, 유품전시관, 각 시도 공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거국적인 추념 행사가 거행되며, 2023년 3월부터 주중 및 토요일에 유가족과 참배객의 교통편의 제공을 위하여 현충원 주요 묘역 및 충혼당을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