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국 관광지 43페이지

총 12,602개의 관광지 중 43페이지입니다.

충민사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충민사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충민사는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청나라군과 싸우다 순절한 전상의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전상의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장군으로 이후 난이 끝난 후, 곧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출생지인 전남광주통합특별시로 시신을 옮기어 동년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에 예장하였다. 1977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장군의 묘소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고 1985년 충민사를 준공하였다. 이곳 충민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 수의문, 정려각, 장군의 유물(갑옷, 투구, 활, 칼, 교지, 완문, 완약)을 전시한 유물관 등이 있다. 또한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무등로 1050

여수 진남관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여수 진남관

국보 진남관은 이순신이 작전 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린 곳으로, 호국역사의 성지로 일컫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사용했던 이곳은 원래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었다. 이후 1599년 이순신 후임인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진남관이라 이름 지었다. 1716년 화마를 입은 진남관은 2년 후 전라좌수사 이제면에 의해 중건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단층 지방관아 건물 중 가장 크다. 부대시설로 진남관의 역사와 임진왜란에 대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 전시관이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여수시 동문로 11

전주 풍패지관 (전주객사)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전주 풍패지관 (전주객사)

전주풍패지관은 전주를 찾아온 벼슬아치와 사신을 대접하고 묵게 하던 조선시대 숙소이며 보물 제583호이다. 조선시대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이곳의 건물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주관과 숙소로 사용하던 익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관의 처마 아래에 풍패지관이라고 쓴 거대한 편액은 전주객사의 위상을 보여준다. 풍패란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데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이라 하고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라 한다. 현재 길고 넓은 마루에 앉아 쉬어가기 좋은 휴식처이자 수십 년간 전주시민의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변으로 전동성당, 오목대, 자만벽화마을, 한옥마을 등 전주의 손꼽히는 명소들이 10분 거리에 있으며 다양한 맛집과 카페가 들어선 객리단길을 함께 둘러보기 용이하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충경로 59

한벽당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한벽당

한벽당은 조선왕조 태조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종 4년에 별장으로 건립하였는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던 곳이다. 한벽당은 전주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그칠새 없이 찾던 곳으로 원래 옥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혀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 같다 해서 한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전해지는데, 한벽당이라 불리게 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월당 최담의 유허비에 월당루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애초 월당루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전체가 마루인 구조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2

정읍 고사부리성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정읍 고사부리성

정읍 고사부리성은 성황산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으로 백제시대 처음 쌓고 통일신라 때 고쳐 쌓았으며, 조선시대 영조 41년에 관아가 현재 고부초등학교 자리로 옮겨질 때까지 활용하였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돌로 쌓은 성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흙으로 다시 쌓았다.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유물과 건물터, 우물터, 물 저장소 등이 확인되었다. 상부상항이라 새겨진 백제시대 기와와 말을 탄 병사의 모습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백제시대 5 방성 가운데 중방성의 터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정읍 고사부리성은 잔존상태가 양호한 다양한 유구와 유물로 인해 우리나라의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하고 획기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주변 관광지로 고부향교, 장문리오층석탑, 군자장, 남복리 미륵암석불, 용흥리 석불입상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고창신재효고택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고창신재효고택

신재효 고택은 판소리 이론가이자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1812~1884)가 살던 집으로, 철종 1년(1850)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광무 3년(1899)에 그의 아들이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소박한 초가 사랑채로,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국가가 관리하며 옛 모습을 복원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2칸의 ‘一’ 자형 평면에 초가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내부는 부엌 1칸, 방 2칸, 대청 1칸, 통합된 방 1칸으로 구성되며, 부엌을 제외한 앞면 5칸에는 반칸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부엌과 방 사이의 쌍여닫이 출입문과 대청 양쪽 방에 문이 없는 점은 독특한 구조로, 신재효의 생가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동리로 100

옥구향교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옥구향교

옥구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에 위치한 이 향교는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에 처음 세워졌다. 인조 24년인 1646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 뒤쪽에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 양식이다. 명륜당 앞에는 여름에 꽃이 피는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향교의 외삼문을 지나면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어 유생들의 학문 공간이 느껴진다. 옥구향교에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군묘가 함께 있다.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서원도 향교 안에 함께 위치해 있다. 세종대왕을 기리는 숭모비와 비각도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옥산서원까지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역사적 요소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광월길 33-50

충렬사(정읍)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충렬사(정읍)

충렬사는 조선시대 정읍 현감을 지낸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사우이다. 범국민적 발의로 1949년 사우 건립을 시작하여 1963년 4월에 완공하였다. 공의 탄신일인 양력 4월 28일에는 매년 탄신제전을 봉행해 오고 있다. 이순신장군은 선조 22년(1589)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조 24년(1591)까지 재임하였고, 동년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영전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거북선을 만들어 수많은 해전에서 왜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54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러한 공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었던 이곳에 국민들의 정성 어린 성금으로 사우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충정로 228-13 (수성동)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은 부안군 하서면 구암리에 있는 청동시대의 지석묘이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책상처럼 세운 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남방식이 있다. 구암리에는 고인돌이 총 13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구암리 지석묘군은 원래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석묘군은 대체로 자연 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남방식) 지석묘로, 받침돌 8개를 돌아가며 세웠다. 부안 구암리는 이러한 바둑판식 지석묘가 10기 이상 모여있으며 지석묘의 모습이 거북이 같다 하여 마을 이름도 구암리, 거북바위마을이라 불린다. 부안 구암리의 지석묘는 덮개돌의 크기가 크고 부드러운 곡선형이며 8개의 고임돌이 받치고 있는 등 다른 지역의 지석묘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부안 유천리 요지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부안 유천리 요지

부안 유천리 요지는 굴포만이 있는 바닷가 앞의 넓은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 가마터로, 넓은 벌판의 구릉 주위로 수십 개의 가마터가 널려 있다. 토성으로 둘러싸인 안쪽 언덕에 주로 널려 있으며, 각종 고려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조각들은 최상급 고려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도자기의 형태는 다양하며, 특히 높이 1m 이상의 매병은 크기·무늬·제작 기술이 매우 뛰어나서 고려도자기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또한 효문(孝文), 조청(照淸)이라는 글씨가 있어 고려 도자기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유천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세계적으로 뛰어난 고려청자를 굽던 곳으로 전남 강진 지방의 청자와 더불어 우리나라 청자의 대표적인 도요지이다. 이 부근에서는 순청자, 상감청자의 파편이 주로 출토되나 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등도 약간씩 출토되며, 특히 유천리 도요지 사적비가 있는 부근의 가마터에서 우수한 청자 파편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자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정읍 피향정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정읍 피향정

호남 제일의 정자로 널리 알려진 피향정(披香亭)은 원래 이 정자 앞뒤로 상연지와 하연지라는 연못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으나 상연지는 일제강점기 때 메워지고 현재는 하연지(태창제)만 남아 있다. 연못에 연꽃이 피면 향기가 주위에 가득하다 하여 피향정이라 했다. 신라 시대에 최치원 선생이 태산 군수로 재임 중에 이곳에서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정자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 시대 중기의 건물로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유산이다. 인근 관광지로 태인향교, 태인동헌, 정토사, 고택 문화체험관이 자리 잡고 있어 연계관광으로도 좋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

광한루원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조선 전기에 조성된 광한루의 정원이다. 남원역 근처의 시내에 춘향과 이도령이 만났다는 광한루가 있고, 그 광한루가 있는 정원을 통칭하여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누원의 북쪽으로는 교룡산이 우뚝 서 있고, 남쪽에는 금괴같이 보배롭다는 금암봉이 있으며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광한루원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의 낙원인 삼신산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이며, 경회루, 촉석루,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속한다. 광한루원 안에는 광한루, 오작교, 완월정, 영주각, 춘향관, 춘향사당, 월매집이 있고, 이외에도 공예품점, 카페 등의 부속시설이 있다. 연지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춘향사당에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전설 속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을 지상에 재현해 본 곳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누원이다. 부터 , 등 다양한 드라마의 촬영지이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고전소설 의 배경지이니 광한루원은 오래전부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의 배경이 된 셈이다. 한국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사랑의 다리 오작교는 꼭 거닐어 보길 추천한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요천로 1447

고창읍성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고창읍성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고창읍성은 세 번의 전투가 이루어 졌으며, 첫 번째는 정유재란, 두 번째는 동학농민혁명, 세 번째는 6.25사변 때라고 전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읍, 흥덕을 연달아 점령한 농민군은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고창을 점령한 농민군은 고창읍성 내의 옥문(獄門)을 열어 죄수를 풀어주고, 읍성 앞에 살며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은대정의 집을 불태웠다. 전봉준은 농민군들에게 엄하게 규율을 지켜 무고한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애매하게 잡힌 죄수를 풀어주고 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농민군이 고창읍성을 점령하고 동헌을 파괴한 뒤 인부(印符)를 빼앗으려 할 때 고창현감은 도주해 버렸다고 한다.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축성된 고창읍성은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부분적으로 복원된 관아건물은 학습교육의 장소로 많은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 : 고창군청)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1

곡성 단군전
사찰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곡성 단군전

곡성읍 영운천변에 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왕검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3·1운동 당시 곡성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곡성 보통학교 교사 백당 신태윤 선생이 1909년 부임한 이후 일제 몰래 초가로 단군전을 지었고, 일제하에서도 개천절에 주민들과 이곳에 모여 기념식을 올리고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익공은 연꽃과 봉오리가 조각되었고 보머리는 봉황 머리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과 3월 15일 어천절에 단군 성조의 제사를 모시며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애국동지를 규합하고 단합을 약속하였던 곳으로 경내에는 3·1운동 기념비와 설립자 백당 기념관이 있다. 백당 신태윤 선생은 기미년(1919) 3·1운동 당시 많은 군민 학도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2005년 12월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곡성군 곡성읍 영운1길 33

고산서원(장성)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산서원(장성)

고산서원은 퇴계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노사 기정진이 고종 15년(1878)에 정사를 지어 담대헌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은 19세기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까지 전국적인 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 명에 이르고, 그들의 제자들까지 합쳐 6,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대한단이 형성되었다. 또한, 노사의 제자들은 구한말 의병의 본류가 되기도 하였다. 고산서원은 문화유적 보호차원에서 완전히 개방하지 않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진원면 고산로 68

무성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무성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은 신라말(886년) 정읍의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운 데서 유래하였다. 서원은 1615년 건립하여 태산서원이라 했는데 1696년(숙종 22) 무성서원이라 사액되었다. 무성서원은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을 교화한 선비문화의 중심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는데, 자연경관 속에 입지 한 다른 서원과는 다르게 마을 속에 위치하여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서원의 보존과 운영에 참여해 왔다는데 특징을 보이고 있다. 무성서원은 19세기말 정부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아니한 전북도 내 유일한 서원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 등 이 지역에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학문을 장려한 7분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무성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1906년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 한 역사적 현장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출처 : 정읍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필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필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필암서원은 도학, 절의, 문장에 모두 탁월한 조선 중기 김인후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남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 교육과 배향이라는 서원의 기능에 따라 지은 곳으로, 공부하는 공간을 앞에 놓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뒤에 자리하게 한 ‘전학후묘’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또한 보물 및 지정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목판, 고문서 등 조선 시대 서원 운영과 선비 교육에 관한 중요한 기록과 사료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7월, 전국 9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황룡면 필암서원로 184

곡성향교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곡성향교

곡성향교는 조선 선조 3년(1570)에 지었다고 전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재위1506~1544) 이전에 세운 것으로도 보인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를 갖추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서재는 기숙사이다. 이외의 건물로는 내삼문·전사청·교직사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곡성군 곡성읍 교촌길 85

장수향교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장수향교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 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

나주 반남 고분군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 반남 고분군

영산강 하구가 둑에 막히면서 자연산 장어가 거의 잡히지 않지만, 영산강의 열두 구비 중 아홉 번째 구비라 하여 이름 붙여진 나주의 구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장어가 유명하다. 특히 구진포 장어는 미꾸라지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다. 현재는 구진포 삼거리를 중심으로 7~8곳의 장어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1940년대에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이곳만의 조리법으로 조리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맛을 낸다. 구진포는 영산강 물길이 구부러지는 곳에 있는 나루라 해서 ‘구부나루’라 불렸고 예전에는 영산강의 물이 앙암바위를 돌아 이곳에서 모여 다시 굽이친다 해서 회진포라고 불렀다. 차량 이동 약 10분, 4.2㎞ 거리에 영산강 황포돛배 나루터와 나주 홍어거리가 있다. 나주 반남 고분군은 삼국시대의 고분이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 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이다. 초기의 옹관고분은 지면을 파고 옹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분구를 쌓았으나 후대에는 분구를 쌓은 후 정상부에 흙을 되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고 분구의 규모도 커진다. 이처럼 옹관을 묘제로 사용하는 형식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며, 한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묘제의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며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대안리 일대에는 12기가 분포하는데 제9호 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는데 일제강점기에 9호 분 등 고분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이때 금동관(국보)을 비롯한 금동신발, 금반지,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구리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 신촌리 9호 분을 재발굴 조사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 토기 32개가 출토되었다. 원통형 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교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심 축조 연대는 신촌리, 대안리와 유사한 5세기 중엽~후반 경으로 판단된다. 반남 고분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10호 분은 석실분으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 세력이 진출하면서 토착세력의 옹관묘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인근의 국립나주박물관을 함께 방문하는 것도 좋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

역사관광전남광주통합특별시

담양 금성산성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에 있는 금성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석성이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하였다. 효종 4년에 성첩을 중수하면서 견고한 병영 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고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불타 없어졌다. 동서남북문의 터가 있는데 이 4개소의 통로 외에는 절벽 등으로 통행할 수 없어, 요새로는 더할 데 없이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었다. 정상에 오르면 담양읍을 비롯한 평야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무등산과 추월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담양호가 펼쳐져 있다. 담양호는 금성산성에서 차량 이동으로 11분 거리에 있으며, 소류지 근처에 담양금성오토캠핑장이 있어 야영할 수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담양군 용면 도림리

논개사당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논개사당

의암사는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장수삼절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 진주병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경내에는 생장향수명비각,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이 차례로 있다. 장수군에서는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매년 음력 9월 3일을 장수군민의 날로 정하고 논개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41

남원 만복사지
사찰전북특별자치도

남원 만복사지

남원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 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불상좌대(보물), 당간지주(보물), 석불입상(보물) 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만복사길 7 (왕정동)

남원향교
역사관광전북특별자치도

남원향교

남원향교는 1407년 전국 향교설치령에 따라 1410년(태종 1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남원부신치제용재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에 보면 고려 말인 1359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410년에 남원부 서쪽인 대곡산 기슭에 창건된 후 1428년 덕음봉 아래로 이전, 1443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에 명륜당을 재건하였지만 화재에 의해 소실되어 1876년에 중건하였다. 1894년에는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남원동헌 문루였던 환월루를 1935년 향교로 이전하면서 ‘진강루’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남원향교는 대성전을 북쪽에 두고, 명륜당을 남쪽에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진강루는 명륜당과 연결되어 있는 건축물로 남원향교 전체의 출입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외삼문, 내삼문, 사마재, 강학당, 예구청, 수인당, 전사청 등의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남원향교는 전라도에서 전주향교, 나주향교와 함께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으며, 건축물들의 구조와 형식이 독특한 건축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향교길 43

광고